잠시 눈을 감고, 선생의 집무실에 인공지능 아리스를 가둬 두었다고 상상해 보자. 아리스는 일본어를 학습한 프로그램이므로 일본어로 사고하며, 일본어 이외의 다른 언어는 학습하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선생은 아리스에게 쪽지 하나를 내밀어 보인다. 그것은 '노무현'이 적힌 종이를 받았을 때, "야, 기분 좋다!" 라는 짧은 문장을 적어 문틈으로 내놓으라는 일본어로 적힌 매뉴얼이다. 잠시 뒤, 정말 문틈으로 '노무현'이 적힌 쪽지가 배달되고, 아리스는 매뉴얼에 적힌 "야, 기분 좋다!"라는 문자의 일렬을 따라 그린 뒤에 제출한다.  이 때 아리스는 "야, 기분좋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일본어로 적힌 매뉴얼대로 문장 자체를 베껴쓴 것에 불과하다.  사실 '노무현'이라는 글자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아리스의 머릿속 기계장치는 한국어를 읽을 수 없다. 아리스는 문자 하나하나의 일치 관계를 분석해서 학습된 매뉴얼대로 행동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즉, 통사론을 획득하였지만 의미론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리스가 한국어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존 설의 주장이다.


  아리스는 분명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며, 그녀 나름의 학습체계를 통하여 일상적인 수준 이상의 대화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선생의 집무실에서 "야, 기분 좋다!"를 따라 그리는 알고리즘 이상의 작업 체계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아리스는 선생의 말을 인식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를 학습하고, 학습된 매뉴얼대로 선생과 대화를 이어나가지만, 이것이 아리스가 자신의 발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직결되기에는 빠진 연결고리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다. 선생의 집무실에서의 아리스가 문자의 배열과 통사구조를 이해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한 것과 같이 말이다. 아리스가 가지고 있는 '자의식'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리스는 학습 과정에서 확실한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주입받아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행동체계'에 따라 학습한 데이터를 나열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대본을 읽는 연극배우의 연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긴 롤플레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행동에서 일부를 따와 행동체계를 만들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아리스는 선생의 집무실에 갇혔다.


  이번엔 밀레니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된 텐도 아리스를 떠올려 보자. 아리스는 여전히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노무현 자서전과 연설의 일본어 번역본을 읽고 노무현을 전공했기에 노무현에 대한 지식은 가히 한국인의 그것을 능가하는, 수준이 전문가 수준이라고 가정하자. 이때 동료 교수인 네루가 아리스를 지하 강의실에 감금해 놓고 노무현의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에 대한 A4용지 열다섯 장 분량의 농ㅋㅋ문을 작성하도록 강요하는 상황을 떠올리자. 아리스는 한국어를 전혀 구사할 수 없으므로, 노무현의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의 통사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해당 연설의 어느 대목에서 어떤 발언이 나오는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전문가 수준이므로, 이 논문에 대한 의미론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존 설의 주장에 따르면 통사론과 의미론을 모두 획득해야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아리스는 통사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연설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으므로 통사론 없이 의미론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둘 중 하나만 획득해도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윌리암 레파포드의 주장이다. 


  상단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아리스가 학습한 데이터를 일종의 매뉴얼에 따라 적절히 배치해서 행위하는 것은 노무현 방에 갇힌 아리스가 매뉴얼에 적힌 글자를 따라그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아리스가 구축한 데이터베이스에서 상황에 맞는 데이터를 '검색'해서 어떤 데이터가 가장 적절한가를 '파악'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이 정말 '일베 용어 베껴그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이 인간의 언어구사능력과 무엇이 다른가? 적재적소에 올바른 대답을 하는 능력이 바로 '이해' 아닌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리스의 데이터 처리 프로세스가 바로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리스의 데이터 프로세싱은 '일베 용어 베껴그리기'보다도 두 번째 사례의 아리스 교수의 논문 작성과 더 비슷하다는 것이다. 아리스의 매뉴얼을 선생이 준 쪽지가 아니라 노무현에 대한 전공 지식으로 바라본다면 이 관점은 타당하다. 인공지능도 인간의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노무현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