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을 두려워 한다.


커뮤니티등을 관찰하다보면


어떠한 상황이나 액션 주장 뉴스 그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반응인 댓글에 더 관심이 쏠리고 공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단 댓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후기

~ 리뷰 웹툰

~ 유투브


~에 해당하는 사건들보다 뒤에 리액션으로 서 나타나는 곳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비꼬기 혹은 비판, 비난 인것은 현저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자신의 두려움을 대신 해소시켜줄

자신의 두려움의 대상을 두렵지 않은 것(멍청하고 한심해사 더 관심가져줄필요도 없는것)으로 만들어 줄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원한다.


본론은 여기부터다.

본래 안티테제는 테제를 보완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뉴턴이 우리의 사고를 보완했고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이론을 보완했고

보어가 상대성이론을 보완한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안티테제에서 보완이 이르는 길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인터넷상의 어노니머스들에겐 무리이기 때문에.

단순히 눈앞의 두려움을 해소시켜줄 안티테제를 갈구하고 좋아요와 구독을 누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테제는 두려운가.

왜 테제는 새로운 것인가.


우리는 세종대왕을 현명하다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왕들이 세종대왕만큼 현명하지 못하다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만약 조선의 다른 왕들이 세종만큼 현명하고 우리의 역사를 꿰뚫는 영향력을 끼쳤다면, 우리는 특별히 세종을 대왕이라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현명했다면 현명이라는 단어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아이큐가 같다면 아이큐 수치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종족이라면 인종차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말 할 것이 없다면 아무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테제도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테제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미 불안정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무질서를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에,


새로움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테제를 두려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