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곳곳에는 창검 꽂힌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 위로는 검은 까마귀가 날았는데, 본디 수의 내호아 수군이 상륙하여 평양성 문을 깨어 들어왔다가 고려의 매복에 걸려 멸절되었을 당시에도 창검 꽂힌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이와 광경이 비슷했고 그때도 하늘 위로 까마귀가 날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울부짖는 까마귀의 까악댐은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망자를 거두는 사신의 목소리 같았으며, 밑에서 담벼락 너머로 겁에 질린 아이들의 모습만이 비쳤다.


을지문덕이 헐떡이면서 맥검을 짚고 담벼락에 기대 주저앉았다. 내호아가 쳐들어왔을 때 시가전으로 수나라군을 완전히 짓밟았던 시가전의 달인 영양왕 고건무가 이제 죽었다. 남부여를 칠 때도 신라를 칠 때도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수장시킬 때도 을지문덕과 함께했던 붉은깃발부대가 전멸했다.


을지문덕의 입가에서 가쁜 숨이 나오는데, 그 숨결을 찢고 을지문덕의 목덜미로 피 묻은 맥검이 들어왔다. 검광은 그의 아래턱 수염을 자를 정도로 깊이 들어왔지만 그의 목덜미를 찌르지는 않았다. 을지문덕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목숨을 겨눈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연개소문.


을지문덕이 연개소문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연개소성을 어찌하였느냐?"


"오늘의 일은 그대가 자초한 것이오. 당에 대한 그대의 태도는 결코 지난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수장시켰던 그 맹장의 모습이 아니었소."


"연개소성을!"


을지문덕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면서 오른손으로 연개소문의 맥검 날을 붙잡아 힘으로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울부짖었다.


"어찌하였느냐 물었다!"


연개소문이 등에 꽂힌 채 남아 있는 4개의 칼 중 하나를 더 뽑아 들고 씁쓸하게 대답했다.


"형이기 이전에 정적이오."


을지문덕이 부들거리면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부들대며 말했다.


"...선화가 네놈을 죽이라 했을 때 죽였어야 했다."


"다 지난 일입니다."


"고건무를 태왕으로 세웠을 때! 고보장이 태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네놈이 고보장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붉은깃발부대를 시켜서라도 네놈의 목을 밤중에 취했어야 했다!"


"다 지난 일이라 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주먹을 쥐고 부들거렸다.


"나 연개소문,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살수에서 30만 수나라 대군을 밟아 익사시킨 당신의 그 백마를! 당신의 황금 마갑을! 당신을 따르는 붉은깃발부대를 동경했고! 오늘 등에 차고 다니는 다섯 칼 역시 당신이 살수에서 했던 그 모습을 따라한 것입니다. 항상!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아니, 아버지보다 더 따랐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왜!"


연개소문이 울부짖었다.


"왜 당나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왜 당나라에 지도를 갖다 바치고 남부여와의 연계를 끊은 것입니까? 왜요, 말씀을 해 보시란 말입니다!"


을지문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나를 죽일 것이냐?"


"그럼 살려주길 바라십니까?"


연개소문이 칼을 내팽개치면서 소리쳤다.


"나는 오늘 180명의 대신을 죽였고, 병사와 백성은 그보다 더 많이 죽였습니다. 태왕을 죽였고 그 태자와 공주들까지 몰살시켰습니다. 이제 와서 사사로운 정으로 한 사람을 살려주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과 친선한 자들을 다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군을 일으킨 이상, 당신도 나의 적입니다."


"...네가 나를 죽이고 나면 어떡할 것이냐? 고보장을 태왕에 옹립하고, 그 다음은 어찌 되는 것이냐?"


"당신이 만들고 스스로 앉은 그 대막리지의 자리."


연개소문이 불에 그슬린 장안성 궁궐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내가 앉을 거요."


"...그럼 느낄 거다."


을지문덕이 낄낄대면서 대답했다.


"선화 그 여자와 친하게 지내면 왜 안 되는지. 왜 우리가 더 이상 신라를 압박하면 안 되는지... 그리고 어째서 백제와 신라가 계속 갈라져 있어야 하는지... 선화가 말하는 삼한의 일통,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통일이 우리 고려에게 얼마나 엄청난 위협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제가 다 밟아버릴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주먹을 쥐고 말했다.


"만약 삼한이 일통하여 위로 치고 올라오고, 서로 중국군이 밀려들어온다면, 저는 겨울이 될 때까지 성문을 닫아걸고 있다가, 당신이 하셨던 대로 적들을 강에서 밟아 죽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30만 대군을 잃는다면, 그때는 두 번 다시는 그 어떤 국가도 우리 대고려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을지문덕이 푸흐흐 마지막 기력을 다한 웃음을 뱉으며 일침을 놓았다.


"그럼 네놈이 늙어 죽고 나면?"


연개소문이 주먹을 더 꽉 쥐면서 쏘아붙였다.


"제 자식들이 그리할 것입니다."


그러자 을지문덕이 폭소를 터뜨렸다.


"나를 아버지처럼 여겼다는 네놈은 내 목에 칼을 겨눴는데, 네 아들들은 퍽이나 아닐 것 같으냐?"


연개소문이 바닥에 떨어진 네 개의 검 중 하나를 을지문덕에게 던지고, 하나를 주우면서 말했다.


"더 이상 대화는 무용하오. 검을 드시오. 무인으로서 보내는 예우는 해 드리겠으니."


그러자 을지문덕이 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놈이 날 이길 수 있다고?"


연개소문은 칼을 꽉 쥔 채로 이를 악물었다. 괴물. 개마기병 일백 기를 끌고 들어가 임유관까지 쳐들어갔던 을지문덕이다. 고구려에서 김유신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장이 을지문덕이기도 했다. 연개소문이 칼을 겨누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검술을 가르쳤을 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죽기 전에 반드시 제가 당신을 한 번은 이길 것이라고! 어서 검을 드십시오, 제가 당신을 이기기 전까지는 당신은 죽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자 을지문덕이 한숨을 쉬고 벽에 기대면서 말했다.


"적이 약할 때 치는 것은 군략의 기본이다. 잘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감상에 젖어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나는 약하다. 무장해제됐다. 호위병도 없고 말도 없고 갑옷도 없다. 자, 내가 검을 들면 나는 강해질 것이다. 내가 강해지기 전에 내 목을 쳐라.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라."


연개소문이 칼을 쥐고 부들거렸다. 을지문덕이 눈을 살며시 감으면서 말을 끝마쳤다.


"...아니다, 됐다. 넌 못할 거다."


"씨발, 말해."


연개소문이 칼을 단단히 쥐고 소리쳤다.


"말하란 말이야! 뭘 약속하라는 건지!"


을지문덕이 한번 크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죽령 서북쪽 땅을 아까워하지 마라."


"그게 무슨 소리지?"


"알게 될 거다."


을지문덕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연개소문이 칼을 들고 바들바들 떨었다. 형도 죽였고 아버지도 죽였고 왕도 죽였다. 이제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히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앞에 있는데, 이 자 하나를 베지 못하랴? 연개소문이 칼을 번쩍 들고 크게 기합을 질렀다. 을지문덕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한숨을 쉬었다.


잠깐의 정적 후 연개소문이 주저앉아 칼을 땅에 내려찍으면서 소리쳤다.


"안 돼! 난 못해!"


"멍청한 놈."


을지문덕이 연개소문을 힘없이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당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하나를 베지 못하면서, 당군을 어찌 베겠다는 것이냐."


을지문덕이 옆에 놓인 검을 움켜쥐었다. 연개소문이 고개를 들었다. 을지문덕이 칼을 뽑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긴, 고건무를 옹립한 뒤의 나도 결국 너를 베지 못했지."


그리고 연개소문이 뭘 하기도 전에 자신의 배에 맥검을 꽂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연개소문이 놀라서 고개를 들고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을지문덕은 두어 번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숨이 끊긴 채 평양성의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