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이었다. 

 

 보름을 맞아 달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덕분에 조명을 켜지 않아도 대지에 가득 들어차 있는 흉물스런 것들이 그 윤곽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휴전선 인근에는 봄눈이 전혀 녹지 않았었기에, 그보다 훨씬 북쪽인 평강군의 평야지대도 온통 하얀 솜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 차가운 솜들은 환한 달빛을 반기듯 얼싸안은 채 지금도 자신의 몸 위에서 나뒹굴고 있는 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그러나 지상의 존재들에겐 보름날의 달빛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하다는 듯 곳곳에서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고, 크고 작은 조명탄들이 수시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방금 쏘아올려진 대구경 곡사포의 조명탄은 기껏해야 윤곽 정도만 보여줬던 달빛과는 다르게, 지상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아비규환이다. 

 

 조명탄의 연소가 끝날 때까지 지상에 연출된 상황은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심기에 이로울 정도였다. 

 

 평야에는 많은 수의 군인들과 전차, 장갑차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인외종이 그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용맹했던 군인들은 삽시간에 비참한 고깃덩이로 변했고, 지상전의 왕자라던 전차와 그것들을 백업해 주던 장갑차들은 포구와 배기덕트에서 매연을 내뿜는 볼품없는 고철덩이로, 방금 전까지 이 근처 상공을 배회하며 미사일과 폭탄을 떨어뜨렸을 공격기들도 캐노피 안쪽이 마치 토마토라도 터진 것처럼 붉은 살점들이 낭자한 채, 형편없는 모양새로 땅에 처박혀 있었다.

 

 전쟁터의 보병들에겐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소총마저도 내팽개친 채 달아나는 군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자들과 같이 인외종들에게 덜미를 잡혀 생명이 꺼진 고깃덩이로 전락할 것이 자명했다. 

 

 그것을 상기하면 할수록 그들의 두려움은 커져만 갔고, 의미 없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이 아닌 것들은 신이 난 듯했다. 

 

 기괴스런 사지를 뻗대고,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금 전, 자신이 죽인 군인 하나를 두고 신경전을 펼치거나, 분주히 전차와 장갑차에서 바싹 익은 시체들을 꺼내어 주둥이로 밀어 넣는 광경이 눈 덮인 평야지대 전체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대지를 덮었던 새하얀 눈은 더이상 그것 특유의 순결한 백색을 띄지 않았다. 

 

 타다 만 디젤과 종을 막론하고 흘린 시뻘건 핏덩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깨끗한 카펫을 더럽혀 갔다.

 

 그것들이 무의미한 살육의 환희에 젖어 도륙을 계속하고 있을 때, 놈들은 자신들이 발을 딛고 있는 피에 젖은 대지의 5만피트 상공에서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놓인 토막 난 고깃덩어리를 탐하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식별번호가 찍힌 군번줄마저 먹어치우는 것으로 봐서, 이 고깃덩어리가 군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길은 영영 사라진 것이다.

 

 5만 피트…. 약 15000 미터 떨어진 아득한 밤하늘에서 세 대의 거대한 비행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폭이 40m를 넘는 이 비행체의 정체는 미 공군의 초음속 폭격기인 B-1B 랜서. 

 

 이제 곧 그들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아직까지 목숨줄이 끊기지 않은 지상의 것들에게 또 다른 재앙을 선물해 줄 것이었다.

 

 별안간 폭격기의 폭탄창이 열리고, 로터리식 런처가 돌며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고성능의 레이더로 주도면밀하게 지형탐색 과정을 거치고, 임무컴퓨터가 계산해준 최적의 폭격 타이밍에 맞추어 폭탄창을 박차고 나온 그것들은 볼 것도 없이 지상을 쑥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지면에 떨어진 2000파운드 폭탄은 얼마 안 있어 신관이 작동됐고, 묵직한 TNT화약이 격렬하게 반응하며 주변의 것들을 찢어발겼다. 

 

 지면에 닿기까지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죽음의 씨앗들은 차례차례 터져나가며 지상을 침묵시켰다. 

 

 도망치던 패잔병도, 그들을 쫓던 것들도, 사냥감의 뱃가죽을 열어 내용물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려던 것들도, 아직 정신이 꺼지지 않아 자신의 뜯겨져 나간 사지가 놈들의 주둥이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던 부상병도…….

 

 차별 없이 단 한 번의 폭발로 침묵할 뿐이었다.

 

 도합 54톤이 넘는 폭탄을 쏟아붓고는, 볼일을 마친 세 대의 폭격기들은 기수를 돌려 십여 분 전에 자신들이 이륙했던 대구의 비행장을 향해 날아갔다. 

 

 지상에선 잘 보이지도 않는 그 폭격기들이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 지난 이틀간 혈전을 벌였을 평강군의 넓다란 대지에 산발적으로 거대한 불기둥들이 일었다. 

 

 애석하게도, 지상의 것들은 자신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불벼락의 잔향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그것들을 떨군 이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피아와 크기를 막론하고, 한때 생물이었던 것들의 사체 조각과 고철 덩어리들이 소리 없이 불타고 있었고, 그 뒤로는 깊은 침묵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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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살다 보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마주해야만 하는 때가 종종 생기곤 한다. 

 

 꼬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꼬이게 되고, 산다는 게 사실 다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느냐 물으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라 말하고 싶다.

 

 내가 그 사실을 정말 절실히 체감하게 됐을 때, 내 주위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었으니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 

 

 혹자는 그것들이 러시아 노릴스크의 코발트 광산 채굴작업 중 발생했다 하고, 더러는 인근 지역에 충돌한 소행성에 붙어 왔다고들 하지만 중요한 건 10년 전 그날 이후 그것들과 큰 전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현재진행 중인 그 전쟁에서 우리는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그것과의 전쟁은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피난길에 올랐다. 

 

 얼떨결에 동북아시아 최후의 보루가 된 대한민국은 각국에서 모인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그런 난리 통에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아니었다.

 

 도시 외곽 난민촌에서 굴러먹던 가족이 둘 딸린 조선족 청년의 잭나이프. 

 

 그 개새끼가 안방 장롱 구석 단지의 30만 원을 훔치겠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그날, 공교롭게도 나는 푼돈 좀 벌어보겠다고 물류 집하장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나도 그때 그놈 칼에 맞아 죽었더라면 지금쯤 이런 복잡한 감상에 젖을 일도 없었겠지.

 

 아버지께선 혹시라도 자기가 잘못되면 이 집안의 가장은 나라고 줄곧 말씀하셨었다.

 

 어머니께선 자신들이 죽고 나면 세상에 믿고 의지할 건 우리 형제뿐이라 말씀하셨었고.

 

 그러나 그런 두 분의 바람과는 달리 그동안 집구석에서 애물단지 취급받으며 일용직으로 빌어먹고 살던 내가 둘 뿐인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내릴 수 있는 결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단이 결과적으로 나를 고립시키는 결말을 가져온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확실한 건,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 동생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을 원망하되, 내가 내린 결단을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확실히 살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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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로 우리 이스트 컬리지의 학우가 된 여러분들은 출신 성분과 피부색에 구애받지 않고, 인류사회의 미래를 위해…”]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의 한가운데서 머리가 반쯤 까진 노인네의 앵무새 같은 말을 듣기 시작한 지 몇 분이 흘렀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길게 하는 것도 이쯤 되면 재주라고 느껴질 정도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학생들 중 저 노인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애들이 몇이나 될지도 의문이고 평등이니 인류의 미래니 하는 걸 찾기 좋아하는 교장 선생도 학교 바깥의 상황을 얼마나 잘 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깨에 별을 두 개나 얹은 양반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저런 희떠운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스트 컬리지…. 교장 선생이 자기 입으로 그렇게 소개한 장소는 나를 비롯해 지금 운동장에 서 있는 천 명 남짓의 아이들이 앞으로 3년 간 신세를 지게 될 학교의 이름이었다.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 학생 군사학교 극동지역 제1 분교.

 

 말이 좋아 학교지, 결국은 이 전쟁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죽어 나가게 될 고급 총알받이들을 양성하는 유사 교육기관이다. 

 

 모두들 그런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건지, 주변에 서 있는 아이들의 낯짝도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다. 학교도, 그렇다고 군대도 아닌 이런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장소에 좋다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상으로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담당교사의 지시에 따라 지정된 교실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기혐오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려운 생각을 이어나가던 중, 식의 끝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후에는 뭐, 어설프게 군대 흉내 내는 곳들이 으레 그렇듯 어디 훈련소 입영심사대 마냥 완장 찬 것들이 튀어나와 고함소리와 함께 애들을 3, 40명 단위로 집합시키기 시작했고.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는 4층짜리 병영에서 군용침대를 빼고 책상만 갖다 둔, 교실 같지도 않은 교실로 들어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입 닥쳐!”

 

 거칠게 교실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선 새카만 피부의 남성은 인상을 팍 구기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고, 잠시간 온갖 나라의 언어들로 뒤덮였던 교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난 오늘부터 3년간, 너희 구데기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줄 마틴 갤러웨이 중사라고 한다.” 

 

 자기 관등성명부터 밝힌 그가 다음에 취한 행동은. 매의 눈빛으로 교실 내부에 꽉 들어 찬 아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아이들은 그와 눈을 맞추는 걸 피하려 들었고, 몇몇은 아예 교실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같이 음식물 쓰레기 더미나 뒤질 것 같은 놈들을 한 트럭이나 떠맡게 된 내 신수도 참 사나운 것 같군.”

 

 간단하게 스캔을 끝낸 그 흑인 교관은 아마 엊그제부터 생각해 뒀을 법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멘트를 쏟아냈고,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군기 잡을 때 저런 식으로 윽박지르는 건 누런 놈이나 꺼먼 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

 

 자기를 호칭할 때에는 반드시 sir를 붙이라거나, 자신 없는 패배자들은 당장 짐 싸서 나가라는, 어린 애들 상대로 쓸데없이 겁부터 주고 군기 잡겠다는 꼴이 전형적인 권위주의자의 표본이었다. 

 

 적당히 끼어들어서 한소리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미군 2사단 마크 하며, 이마에서부터 왼쪽 뺨으로 길게 이어진 흉터는 적어도 나 같은 놈이 어떻게 해 볼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내 얘기는 이쯤 하고,”

 

 이런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교실의 모든 아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찌그러져 있는 게 썩 마음에 들기라도 했는지, 그 흑인 교관이 취한 행동은 교탁 좌측에 놓인 대형 TV의 전원을 켜고 입교 전 적어도 대여섯 번은 봤음직한 홍보 영상을 재생하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교정의 풍경과 수학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지나쳐, 투박한 디자인의 쇳조각을 몸에 두른 채 중기관총 사격을 하고 있는 한 학생의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오늘부터 너희 구데기들은 강화복이라는 끝내주는 물건을 다루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될 거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을 늘어놓는 그의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강화복. 영문 명칭은 파워드 슈트. 믿기지 않겠지만, 현 상황에서 핵무기와 더불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건이다. 

 

 병사 개개인의 전력을 무슨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슈퍼 히어로까지는 아니어도 지난 10년 간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는 끌어 올려주는 마법의 날개옷.

 

 인터넷에서 대충 긁어봤던 자료에 의하면 한 7년 쯤 전에 러시아 루간스크에서 시범적으로 투입된 이후, 그 근본 없는 괴물들의 진격속도를 획기적으로 늦추는 성과를 거두어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군대가 애용하고 있는 물건이라고 한다. 

 

 문제가 있다면…

 

 ‘강화복 구동에 사용되는 타우러스 반응로는 국제안전규격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기술이란 기술은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넣다 보니 동력원으로 플루토늄 핵전지를 사용하게 됐고, 덕분에 강화복 사용자는 항상 방사선에 노출되어야만 하는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는 것. 

 

 물론 정부에선 구동 시 사용자에게 노출되는 방사선의 양이 극히 미미하다고 저렇게 교육영상에서부터 찌라시를 뿌려대고 있지만, 과연 그 말을 믿는 애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언젠가 강습병과 전쟁영웅이라 주장하는 사람의 개인방송을 컴퓨터로 본 적이 있었는데,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전부 벗겨졌고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붉은 반점이 얼굴을 가득 메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이곳에 지원하기 전 찾아봤던 그 사람의 근황은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내용이었지 아마. 

 

 그러니 나를 포함해서 이 교실에 들어앉아 있는 아이들에겐 전쟁 끝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였다. 

 

 강도살인과 괴물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설령 그런 세상이 온다 쳐도 아마 그때쯤이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이상으로 아침 조회를 마치겠다. 각자 호출이 있을 때까지 기숙사에서 대기하도록.”

 

 그런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상념에 잠겨 있기도 잠시, 영상이 끝난 걸 확인한 교관은 처음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때 보단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더니 그대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기숙사라, 교실부터가 병영을 대충 개조해서 쓰고 있는 판국에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따로 있다는 게 의외라면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거기서도 군대 흉내 내겠다고 막 방 하나에 애들 열댓 명씩 구겨 넣고 감시 역으로 교관 붙여놓고 그러진 않겠지.

 

 통제하던 사람이 나갔으니 이후의 교실 분위기야 불 보듯 뻔했고, 무슨 뜻인지도 모를 외국말 대잔치나 듣자고 계속 이러고 앉아 있는 것도 뭣해서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제 딴에 완장이라고 감색 정복에 흰 정모를 눌러쓴 학생 한 쌍이 서류철을 옆에 끼고 학생들 틈을 헤집고 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전형적인 동남아 스타일이고, 옆의 안경 쓴 놈은 피부가 하얀 걸 보니 러시아 내지는 미국인 부모를 둔 녀석 같아 보였다.

 

 둘 다 신입생들과는 다른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게, 완장을 폼으로 차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보였고.

 

 “학생예비대 인사과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시간 되십니까?”

 

 그냥 지나쳐 가려나 했던 찰나, 그 안경 쓴 녀석은 뜬금없이 나를 불러 세웠고, 그와 동시에 옆에 서 있던 동남아는 서류철을 넘겨 안경에게 건네줬다. 

 

 뭐, 입학 첫날부터 대단하신 완장 선배님들께서 신입생 상대로 호구조사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것들의 의중 따윈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설령 그걸 안다 쳐도 그 대단하신 완장놀음에 어울려주는 것보단 기숙사 기어들어 가서 짐 풀고 밥 시간까지 낮잠이나 한숨 땡기는 게 내겐 훨씬 유익한 쪽이었다. 

 

 “저희한테 무례하게 구시면 재미없으실 텐데.” 

 

 내 나름대로 짧게 끝내고 지나가려는데 자기들 말 안 들어준다고 바로 협박조로 나오는 걸 보면 이 안경 녀석도 양반은 못 되는 것 같았다. 

 

 주변에 학생들도 많겠다, 이참에 권위부터 세워 놓겠다 이거겠지. 

 

 그래, 얼마나 대단한 완장인지 얘기라도 들어보자.

 

 “이준영. 올해로 32세, 한국군 복무 도중 현역 부적합 판정, 이후 이력은 없음. 본인 정보 맞습니까?”

 “뭘 다 아는 걸 다시 물어보고 그러시나.”

 

 나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진 않았는지, 정보를 확인한 안경이 보인 반응은 경멸 섞인 눈초리로 나를 훑어보는 거였다. 

 

 자기들이 그렇게 주워섬기는 인류사회의 미래를 위한 신성한 의무를 도중에 져버린 게 불만이다, 이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거만큼 단세포 생물 같은 사고회로도 없을 것이다. 

 

 전체주의에 미친 병신 호구도 아니고, 먼저 국민을 버린 정부와 자기들 고집만 피우다 망가진 군대에 뭔 좋은 감정이 있다고 그런 것들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 

 

 까놓고 말해서 지금 있는 이 자리도 짠밥이라도 하나 던져주고 있으니까 이러고 앉아 있는 거지, 안 그러면 이런 곳에 제 발로 기어들어 올 놈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저희 쪽 업무 절차입니다. 맞으시면 인사과 사무실까지 동행 해 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왜.”

 “당신은 지금 학생예비대 최우선 포섭 대상입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안경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여기서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짠밥 하나 주워 처먹자고 헛짓거리 하는 건 여기 들어온 거 하나로 끝내자, 아가야.” 

 “뭐라고요?”

 “난 너희들 완장놀음 하는 데에 관심 없으니까 딴 사람 알아보라고.” 

 “이준영씨, 지금 당신이 어떤 처지인지 알고도 이러시는 겁니까!” 

 

 내 말에 안경은 상당히 격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군대도 아니고, 하물며 사관생도 이상의 경험과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무슨 예비대니 인사과니 하면서 무게 잡고있는 것이, 애들 완장놀음 이상의 의미를 지닐 거라고 생각하나. 

 

 “몰라. 알면 뭐, 돈이라도 한두 푼 떨어지냐?”

 “상당히 무례하시군요. 한 번만 더 함부로 입을 놀리시면 그 때는‥,”

 

 녀석은 마치 경고라도 하듯 삿대질까지 곁들여가며 그리 지껄였으나,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지금껏 잠자코 서 있던 동남아의 귓속말을 듣곤 도로 손을 내렸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빨리 가라.”

 

 그 둘을 뒤로하고 건물 밖을 나서는 동안 등 뒤에서 느껴졌던 시선들이 곱지만은 않았던 건 기분 탓이 아니었겠지. 

 

 이러나저러나 이 아이들에게 있어 방금전의 일들은 그저 나이만 헛으로 처먹은 늦깎이 하나가 대단하신 완장 선배님들 심기를 거스른 것으로만 보일 테니 말이다.

 

 그게 딱히 틀렸다는 건 아니다.

 

 간판만 바꿔 달고 언 발에 오줌이나 싸지르고 있는 주제에 애들 이런 곳에 가둬 놓고 자기들 방패막이로 키워놓는 정부나, 거기에 편승해 밥숟갈 얹어놓는 나나, 누가 더 나은지를 가지고 논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도 없을 거다. 

 

 하지만 그것이 저 완장들에게까지 순종해줘야 한다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번 목숨 걸고 싸워보기를 포기했던 놈이 눈앞의 상황에 쫓겨 다시 이런 곳에 기어들어 온들 뭐 얼마나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가 생기겠는가. 

 

 굳이 저 친구들같이 앞장서서 뭘 해보려 하지 않아도, 그냥 흐름 따라 지내다 보면 이곳을 졸업할 때가 오고, 머지않아 어딘가에서 죽게 되겠지.

 

 그때까진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하며 적당히 교관들 장단에 박자나 맞춰주면 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 혼자 노력한다고 신세 펼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