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율이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유구국 중산왕의 자리인 슈리 성 용상에 앉았다. 대신들이 일제히 그녀의 앞에 정좌하였다.


"오늘을 끝으로, 이스라엘과의 무역 전쟁은 끝났습니다. 대한제국의 반도체와 석유화학 패권은 앞으로 만 년 동안 영원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1990년대 이래 대한제국의 산업 근간을 대규모로 위협해오던 이스라엘의 경제는 이제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고 대한제국은 더 이상 결코 20년 전 그 멸망 직전까지 갔던 국가가 아님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이제 안보율의 정권 장악 능력과 정치력, 그리고 지도력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대한제국의 20대 남성들이 안보율에 대하여 강력한 불만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최고 권력자로서 부적합하다는 뜻은 아니었으며 단지 국가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얻는 원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안보율은 구심점 없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은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이 고개를 일제히 숙이면서 아뢰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안보율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 그녀가 슈리 성 용상의 맞은편 처마 안쪽에 걸린 스크린을 가리켰다.


"시작하라."


나소리가 고개를 숙이고 이내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했다. 안보율이 사실상의 전권을 장악한 이상, 그녀의 최측근이었던 나소리 역시 이제 원이청 도제조로서 대한제국의 정승에 준하는 힘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브리핑 하겠습니다."


그녀가 클리커를 눌러 프리젠테이션의 페이지를 넘기고 말했다.


"최근의 뉴스기사 조회수와 댓글 수를 분석한 통계입니다. 현재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 1위는 역시 이스라엘과의 무역 전쟁입니다. 2위는 하나되다의 위헌정당심판이고요."


안보율이 천천히 용상의 팔걸이를 짚고 앞으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1번은 이미 예루살렘 조약으로 다 정리된 사안이야. 세계 반도체와 석유화학제품 시장은 이제 우리 것이다. 2번... 하나되다의 위헌정당심판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일단은 말씀하신 대로 보류 중입니다."


"백성들의 인식에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은 간사해서 근본적으로 유죄를 추정한다. 누군가가 어떤 논란에 휘말리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며 그 논란이 해결되는 것과 무관하게 계속 피하게 마련이다."


안보율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머금어졌고 하늘에서는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위헌정당심판에 회부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하나되다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지난 1년간 우리 최대의 적이었던, 20대 남성들의 안티페미니즘 하나만 믿고 폭주하던 이푸름은 이제 부정선거밖에 입에 올릴 줄 모르는 멍청이로 전락했고, 자신들의 구심점은 없다는 것을 자각한 20대 남성들은 체념했다. 더 이상 하나되다가 대중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남아있지 않다."


그녀가 나소리를 바라보며 지시했다.


"좋아, 주요뉴스 안건 중에서 대중 관심도 뒤에서 1위는?"


"탈핵 관련입니다. 전하께서 윤지영의 탈핵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엎으신 것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윤지영의 탈핵을 계승한다고 떠들어놓고도 원전 증설을 허가한 안보율이었다. 이상과 꿈에 사로잡혀 폭주했던 윤지영과 철저하게 결과우선주의로 밀고 나가는 안보율은 그 근본부터 달랐다.


안보율이 페미니즘을 자신의 전략으로 택한 이유는 그녀가 페미니스트여서가 아니었다. 페미니즘이 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스라엘과의 무역 전쟁에서도 보여주었고, 재벌들과의 교섭에서도 보여주었듯이, 안보율은 결코 국가 경영을 할 줄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최상급의 정치인이었다.


그녀가 아직까지 페미니즘을 자신의 대전략에서 파기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이용가치가 있었고 그것이 대중에게 유효했기 때문. 그녀의 최종목표인 대한제국 용상을 찬탈하고 나면 그 역시 헌신짝처럼 버릴 대상일 뿐이었다.


탈핵은 그것을 가장 먼저 맞닥뜨린 존재였다. 더 이상 방사능 괴담은 대중에게 통하지 않았고 그녀는 과감하게 파기했다. 윤지영이 발작했지만 안보율에게 알 바 아니었다. 용상. 대한제국의 용상만 찬탈하면, 내가 집권하면서 개판 내놓은 모든 것들은 하루이틀이면 수습해.


"그렇다면 3위는?"


"교사 폭행치사 사건입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예상대로군."


프리젠테이션에 뉴스 캡처가 떴다. 남학생에게 맞아 죽은 교사가 바닥에 널브러진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고 남학생이 구치소로 끌려가는 모습 역시 똑똑히 보였다.


"촉법소년을 폐지하셨기 때문에 일단 구치소로 송치하는 것까지는 이루어졌습니다."


촉법소년.


안보율이 싱긋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집권하면 그것도 좀 손봐야지. 백성은 개돼지고 대중은 가축이다. 촉법소년제도를 망치로 때려 부수자마자 지지율이 25%가 상승했다.


현재 그녀의 지지율은 84%였고, 90%만 넘어가면 그때는 강청여제를 압박하여 찬탈을 개시한다는 그녀의 원대한 꿈이 눈 앞에 와 있었다.


"그래,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여론조사 결과는?"


나소리가 페이지를 넘겼다.


"백성들 중 70%는 교권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강화 수단은 무엇을 원하고 있던가?"


"교사들 중 25%는 체벌을 부활시키자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대중의 58%가 체벌의 부활을 통해 교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도 영 떨떠름해 보이는 나소리였다. 체벌이라. 한참 생각하던 안보율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예?"


대신들이 잠시 웅성거렸다. 안보율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일관되게 추진해 온 정책대로, 여학생에게는 무관한 정책이며 남학생에게만 적용하는 걸로 하겠다. 오늘을 기하여 대한제국에서 체벌은 합법이며 그것을 금지하는 모든 종류의 법 조항은 무력화되었다.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반발하는 자들은 반법치집단법을 적용하여 체포하라."


그 순간 밖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비를 한 바가지 쏟아 맞아 물에 홀딱 젖은 쥐새끼 꼴이 된 윤지영이 근위병 두 명을 밀치고 들이닥쳤다. 안보율이 윤지영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렇지. 사람한테 매를 대는 것에 인권충이 빠지실 수가 없지."


"전하!"


윤지영이 슈리 성 앞에 서서 처마에서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안보율이 손짓했다.


"들어오시오, 영상."


윤지영이 물을 뚝뚝 흘리면서 슈리 성 마룻바닥을 밟았다. 유구국 방식대로 바닥에 앉아 있던 대신들이 웅성거리면서 말했다.


"여, 영상! 이것이 무슨 무례요,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오다니!"


"게, 게 없느냐, 밑에 수건이라도 좀 깔아라!"


"전하!"


윤지영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이 체벌을 퇴출시키기 위해 어떤 염병질을 했는지 잘 아시면서!"


"어허!"


나소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무례를 삼가시고 말을 가리시오, 영상 대감! 이제 저분은 당신의 오른팔이었던 원이청 도제조가 아니라, 대한제국에서 황제 폐하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 더 높은 유구국 중산왕이시오. 군주란 말이오!"


그러자 윤지영이 그대로 돌아서서 나소리를 보고 더더욱 격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정 2품 원이청 도제조 주제에 영의정인 내 앞에서 주둥이 놀리지 마시오!"


나소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순간 안보율이 조용히 말했다.


"원이청 도제조는 그쯤 하고 물러나시오. 어쨌든 영의정이시오."


나소리가 그 말을 듣고 잠깐 윤지영을 쏘아보더니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윤지영이 안보율을 다시 올려다보고 소리쳤다.


"전하, 체벌의 부활은 절대로 아니되며 차별적 적용은 더더욱 아니됩니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소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페미니즘의 창시자이자 그 원조이신 영의정께서 남학생에 대한 차등적 체벌을 반대하시는 것이 참 우스꽝스럽고 민망합니다 그려."


안보율이 차갑게 말했다.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이며 그 성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셨던 영상은 어디 가셨는지요?"


"첫째로 나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고, 둘째로 나는 정말 그럴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인권을 탄압하면서까지 제어할 생각은 없소."


윤지영이 용상에 올라앉은 안보율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너무 높아 보였다.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산 같았다. 저것이 7년 전 정치를 가르쳐달라고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고, 1년 전까지도 내 오른팔이었던 그 여자가 맞는가?


안보율이 윤지영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허면 내 일단 여론을 진정시킨 다음에 생각하도록 하지요."


"전하!"


"근위병들은 영상을 끌어 내어라!"


안보율이 소리치자 곧 여군 일곱 명이 다가와서 윤지영을 붙들어 밖으로 끌어낸 후, 문을 걸어 잠갔다. 윤지영은 이제 전략을 수정했다. 당당하게 나가서는 도저히 저 산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슈리 성 앞에, 비를 맞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전하! 소신 윤지영, 다시 한 번 간청하옵나이다. 체벌의 부활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녀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댓돌에 이마를 들이받았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전하, 간합하여 주시옵소서!"


한때 전 대한제국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권신이 고작 1년 만에 어떤 꼴이 됐는지를, 그 슈리 성에 앉아있던 모든 대신들은 자신의 눈과 귀로 똑똑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안보율이 조용히 미소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철회는 없소. 법은 통과되었소. 이제 전 제국의 학교에 공문을 돌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