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 18년 1월 1일.


경복궁 근정전.


오늘로 금상이 즉위하여 지정의 연호가 쓰인 지 18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의정성과 이,호,예,병,형,공부의 대신들이 검은색의 조복을 입고 각자 자신의 품계에 따라 품계석에 맞추어 섰다.


황색의 복장과 12류 면류관을 쓴 황제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고개를 조아린 신료들은 품계의 높음과 낮음을 가리지 않고 대동단결하는 듯이 표정이 굳어 있었다.


바로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좌승상 이완이 낭독하고 있는 표문 때문이었다.


"삼양(三陽)이 올해 차례가 되니 만물에 생기가 새롭고, 옥으로 꾸민 아름다운 궁전[玉殿]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龍顔)에 기쁨이 어렸습니다......(중략)

만물이 편안하고 태평한 때[交泰之時]를 당하여 닥쳐올 경사가 끝이 없으며, 대궐에 안녕을 빌고 남산(南山)에 나라의 장수를 축원하기 위하여 만방(萬邦)에서 앞을 다투어 주옥과 비단을 바치며 육지와 수로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뒤떨어지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좋은 날에 축하를 받으시니 더욱더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물며 요즈음 정무가 많은데도 저희를 만날 겨를을 주시며, 사신(詞臣)과 더불어 즐겨 사륙체(四六體)의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 보이고, 친히 가까이 앉아 시서(詩書)와 경사(經史)의 미묘한 뜻을 강론하시나이다. 북방의 여진이 와서 공물을 바치고 동방에서도 보물을 바치어 황상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성상 폐하의 아름다운 덕을 신하들이 칭송하니 이는 역사에 빛날 것이며 백성이 생긴 이래로 오늘에 비교할 성대한 때가 없었습니다. 여섯 가지의 음률을 아홉 번 연주하는 것은 비록 옛날 조간자(趙簡子) 때의 의식이기는 하나 어찌 만세를 세 번 불러 폐하의 장수를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없는 일을 지어내며 황제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 이 표문은 바로 황제가 직접 쓴 것으로, 신년 하례때 신료들이 자신에게 바칠 글을 스스로 쓰겠다고 하였더니 이러한 글을 쓴 것이었다.


거짓으로 가득찬 표문에서 용안에 기쁨이 어리다는 것 하나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년하례가 끝나면 총애하는 현빈과 그 소생 자식들을 보러 갈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니까.


좌승상 이완은 자꾸 일그러지려 하는 얼굴을 간신히 억누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 표문을 간신히 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