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일어나서 컵에 냉수를 따르고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크게 한 입 베어먹던 홍지아의 집에 초인종이 울렸다. 홍지아가 손짓하자 바닥을 닦던 노비가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내관이 서류가방을 내밀면서 말했다.


"오늘 결재해 주셔야 할 서류들입니다."


"아, 예."


노비가 서류가방을 받아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홍지아가 기지개를 펴면서 가방을 열었다.


"뭐야. 별거 없으면 그냥 바로 공지형한테 보내라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게 있어서 홍지아에게 전달된 것이 분명했다. 홍지아가 피식 웃고 서류가방을 열었다.


"어디 보자..."


그녀가 자주색 서류철 여러 개를 꺼내들었다. 그 중 하나가 유난히도 묵직했다. 홍지아가 서류철 더미를 탁자에 올려놓고 그 유난히 두꺼운 것을 집어 올렸다.


"뭐야. 뭐가 이렇게 길어? 어디서 반란이라도 났대?"


그녀가 서류를 펼첬다. 그리고 첫 문장을 보고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다. 한참 동안 서류를 쳐다보던 홍지아가 서류를 탁자에 놓고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류를 읽으면서 키득거리기도 하고, 갑자기 격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저 여자가 드디어 조울증이 왔나 싶어 노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을 때쯤 홍지아가 서류 마지막 장을 읽고 덮었다. 그리고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사헌부가 미쳤구나?"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그 서류만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 다음 다른 서류들을 가리키며 노비에게 명령했다.


"병조참판 공지형에게 모두 전달하라. 난 잠시 할 일이 있다."


홍지아가 서류가방을 들고 천천히 집 밖으로 나섰다. 그 뒤로 기사 두 명과 수행비서 두 명이 뒤따랐다. 그 일행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도달했다. 지하 주차장의 한 줄이 전부 홍지아의 차량이었고, 온갖 스포츠카에 마차까지 있었다. 홍지아가 검은색의 수수한 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걸 타자. 지금은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어."


홍지아가 그렇게 말하고 태연하게 뒷좌석에 앉자, 기사가 운전대를 잡았고 수행비서 한 명은 조수석에, 나머지 한 명은 홍지아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한 명의 기사는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는 경호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곧 차 두 대가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기사가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어디로 모셔야 하겠사옵니까?"


"대궐로 가자."


홍지아가 수행비서에게 한 입 베어먹었던 그 사과를 도로 건네받아서 다시 크게 한 입 베어먹으며 말했다.


"폐하를 알현하겠다."


 


+ + +


 


대한제국, 창덕궁 후원(비원).


대한제국에는 모두 5개의 정궁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창덕궁 후원의 야경은 단연 으뜸이었다. 궁녀들이 전등을 비추는 곳에 광만제가 혼자 서 있었다. 그 뒤로 홍지아가 다가가서 관복 차림으로 고개를 숙였다.


곤룡포는 짙은 붉은색의 얼룩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반창고가 잔뜩 붙어 있었다. 술병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친 뒤 그 위에 자빠진 흔적이었다. 광만제가 쓸쓸하게 물었다.


"영상, 무슨 일입니까?"


"폐하, 어찌 후원에 계셨습니까?"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만제가 돌아서서 자신의 아내의 조카딸을 바라보았다. 광만제도 그녀가 어떤 가렴주구를 일삼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애써 귀를 틀어막고 무시하고 있었던 것뿐.


"그래, 이제 짐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겠소? 어쩐 일로 짐을 찾으셨습니까?"


그러자 홍지아가 품에서 자주색의 서류철을 꺼냈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으면서 광만제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폐하, 사헌부에서 탄핵이 올라왔나이다."


"탄핵?"


광만제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대꾸했다.


"사람을 끌어내려야 하는 거요? 그런 인사 문제라면 이조(吏曹. 현재의 인사혁신처 및 행정안전부)와 논의하시오. 짐은 관심 없소."


"보셔야 합니다."


홍지아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이것은 역모이옵니다."


광만제의 눈빛이 바뀌었다. 홍지아가 날카롭게 웃으면서 서류를 펼쳤다.


"이 탄핵문건은 소신을 탄핵하는 내용을 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시면 소신의 부정을 지적하는 것은 일부일 뿐이고, 내용 전반에서는 폐하의 치적을 부정하고, 무려 부마광합의 난에 대한 옹호까지 들어 있나이다."


부마광합의 난! 그 말이 나오자마자 광만제가 펄쩍 뛰며 돌아서서 그 서류를 낚아챘다. 그리고 홍지아가 다 읽는 데 30분쯤 걸렸던 그 문건을 뒤적뒤적 10초쯤 보더니 다 외워버렸다. 역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노벨상 4개를 휩쓸었다는 비상한 머리는 다르다. 이 인외의 천재 황제가 과연 갑자기 다시 정신을 차리면 어떻게 될까? 홍지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그것이었다.


다행히 광만제는 여전히 정치에 별 의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내 어찌할까? 사헌부 간원들을 끌어다가 인두로 지지기라도 할까요?"


"조사를 허가해 주시옵소서!"


홍지아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사헌부에서는 이유 없이 어떤 탄핵안을 올리는 일이 없는즉, 반드시 이 탄핵문건의 초고가 되는 상소문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폐하의 치적을 부정한 장본인을 찾아내어 반드시 국문하고 그 배후를 밝혀내겠사옵니다!"


대한제국에서 고문이 폐지된 것도 벌써 50년. 국가전복을 시도한 반역자에게, 죄가 확정된 뒤 그 가담자나 배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광만제가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 뜻대로 하세요."


홍지아가 고개를 돌렸다. 감히 겁도 없이 자신을 공격한 이 상소문의 초고를 쓴 자를 아주 처참하게 찢어 죽여서 아무도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눈엣가시였던 사헌부도 한번 물갈이를 해 버릴 생각이었다.


홍지아가 걸어 나가면서 생각했다. 대체 어떤 겁 없는 새끼가 나를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렸을까? 감히 일개 백성이 그랬을 리는 없고, 노회하고도 충분히 뒷배가 있는 정치인이 그랬을 건데.


그녀가 씩씩대며 후원 밖으로 나가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광만제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20년.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 + +



 

한상훈이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김민현이 그의 앞에서 반기며 외쳤다.


“여어! 머저리 소굴 기어나왔냐!”


한상훈이 피식 웃고 돌아보았다. 깃발만 갈면 그냥 교도소하고 똑같이 생긴 대한제국의 학교. 그 웬수 같은 건물에서 앞으로 3년만 더 버티면... 이제 다른 교도소 건물로 옮겨져서 또 3년을 버텨야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김민현이 한상훈의 가방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어때? 요즘 애들 아직도 다 병신이야?”


“어떻게 달라지겠냐.”


한상훈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버지한텐 비밀인데, 국가인재속성교육 신청했어. 고등학교까지 안 가고 대학 진학하려고.”


“어디?”


“모르겠어. 취업 잘 되는 곳으로 가야지. 취업 잘 되는 곳이 요즘 어디랬더라.”


“취업이면 월성서원이지.”


대한제국에는 다섯 개의 명문대학교가 있었다. 두 개는 국영으로 각각 성균관, 제국관이고, 나머지 세 개는 사립으로 각각 말결서원, 월성서원, 광명서원이다. 이 중 제국관과 말결서원은 대한제국이 식민제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생긴 군사학교였고, 성균관은 관료 양성 학교였으며, 월성서원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성장한 월성상전과 대안상전이 지원하는 기술인재 양성학교, 광명서원은... 학교 자체가 도시국가화된 좀 독특한 사례다.


“월성서원이면... 경상도로 내려가야겠네.”


“대한제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경제권이야. 그쪽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내려온다고 안 하고 올라온다고 한다잖아.”


위로의 말일 뿐 그렇지 않게 된 지 한참 됐다. 특히 대한제국의 식민지였던 일본 열도가 1980년대 이래 일본 독립군에 의해 통제불능으로 접어들면서 부산은 수운항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광명서원은 어떨까?”


한상훈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김민현이 대답했다.


“거기야말로 진짜 정치병 걸린 사람들 모이는 서원 아니냐? 아예 교훈부터가 창조하는 개혁인, 혁신하는 혁명인이라던데.”


“취업은 어떻더라? 아직 안 알아봤는데.”


“거기선 그 안에서 취업할걸. 허가 난 자치령이잖아. 광명서원 재학생이나 졸업생 아닌 사람이 서원 안에 취직하려면 취업비자 받아야 될걸.”


“그래?”


“화폐도 다르잖아. 환율까지 자체적으로 책정하던데. 광명서원 안에서 일하고 나오면 돈 한 움큼 쥐고 나온대.”


“그럼 거기로 가야겠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김민현이 한상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술한 다섯 개의 대학교에 입학하면 – 특히 남학생은 – 군역으로부터 해방된다. 물론 각 대학교에서는 자체적인 교련 과목을 필수이수교육으로 갖고 있어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회로부터 2년 6개월간 격리되어 치열한 전쟁터에 투입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특히 1996년부터 1997년 사이에 입대한 청년의 95%가 중국 방면으로 차출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편을 들어 감히 소비에트와 대한제국에 도전한 중화민국은 처절하게 짓밟히고 중국 북부를 대한제국에게 내놓았지만, 1980년대 대한제국에 약해지는 것이 눈에 띄게 확인되기 시작하자 “항주의용대”라고 불리는 거대 군산복합체의 용병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북중국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검은 군복을 사용해 흑건적(黑巾賊)이라 불린 이 항주의용대는, 처음에는 경무장한 600~1,000명 정도의 게릴라 용병으로 국소적인 도발을 감행했지만, 1990년대 들어서 중화민국 정규군이 흑건적의 탈을 쓰고 투입되기 시작하며 그 수는 50만 명까지 늘어났고 전투기, 폭격기, 야전포와 전차, 구축함까지 동원한 총력전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적이고 무한정한 인력과 자원을 끝도 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중화민국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두 아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을 순 없지.”


두 아이가 손을 마주잡았다. 한상훈이 말했다.


“네가 먼저 정치계에 들어가서 기다려. 난 집안 정리 좀 하고 따라갈게.”


“좋아. 의정부에서 만나자.”


그게 두 사람의 오랜 결의였다. 정계에 입성해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 두 아이는 자신들의 지성이 그걸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김민현이 흠흠 하고 앳된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실은 엊그제 그 탄핵 상소 올렸어.”


“뭐? 벌써?”


한상훈이 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년에나 할 줄 알았는데.”


“기회가 지금밖에 없겠더라고.”


김민현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대영제국이 무너졌으니까.”


 


+ + +


 


“그 상소, 누가 썼습니까?”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카페에 앉아 코트 차림을 한 류주영이 눈을 찌푸렸다. 명품 겉옷을 걸치고 사파이어 목걸이를 목에 엮은 홍지아가 찻잔을 입에 대고 기울이면서 대답했다.


"그 탄핵 상소, 문장이 잘 뽑혀서 묻는 것입니다. 그 상소, 초안을 누가 잡았습니까?"


"불문언근의 원칙을 모르십니까?"


류주영이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탄핵문건의 원안 및 상소자는 밝혀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헌데 안타까워서요. 그걸 말씀 안 해 주신다면 당신과 사헌부가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쓸 것입니다. 그 탄핵문건은 저에 대한 탄핵이 아니라 역모성 발언이 가득 들어간 망발이었으니까요."


"뭐요?"


류주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영의정을 탄핵했는데 그게 역모란 말입니까?"


"나에 대한 탄핵은 겉치레일 뿐이고 그 내막에서는 부마광합의 난을 운운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대감을 탄핵하는 데 필요한 근거였을 뿐입니다."


"근거가 불경하다 이겁니다."


홍지아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정 말씀을 못하시겠다면 좋습니다. 사헌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것입니다. 아마 대엿 명은 목이 달아날 것이고, 내부 인사들도 깨끗이 물갈이가 되겠지요."


"영상 대감!"


류주영이 탁자를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지금 저를 겁박하는 것입니까!"


"겁박이 아니라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것 뿐이지요. 황제 폐하께서 격분을 하셨습니다."


"초안은 없습니다!"


류주영이 벌떡 일어나서 돌아 나갔다. 그러자 홍지아가 그녀의 뒤통수에 가볍게 위협을 투척했다.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나는 찾아낼 것입니다. 사헌부가 모조리 교체되고 서류들을 다 압수하면 나오지 않을 재간이 없지요. 어차피 그 초안을 쓴 자는 내가 찾아내서 죽일 것인데, 그러면 그대 입장에서는 고신으로 몸이 부서지고 일족이 풍비박산 나는 것보다는 적당히 사실대로 말하고 자리를 지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못 찾으실 겁니다."


류주영이 실소하고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그 초고는 파쇄해 버렸거든요."


그러자 홍지아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더니, 격분한 표정으로 류주영의 코트 멱살을 덥석 잡고 말했다.


"허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입에서 토설을 받아내야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공지형 병조참판의 이름을 대는 걸로 하지요."


류주영이 멱살을 잡힌 채로 킥킥거렸다.


"어쩌시렵니까? 유일한 증인이 그 사람이라는데, 어디 국문 안 할 재간이 있으시겠습니까?"


"이... 이 요망한 김경훈의 졸개 따위가..."


"능력도 없이 오라비의 자리를 물려받은 부패의 화신보다야 백 배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류주영이 홍지아의 손을 걷어내고 메롱 하고 혀를 내밀어 보였다.


"사헌부 간원들 중 초안을 잡은 사람의 정체를 아는 자는 저뿐이니, 한바탕 물갈이를 하겠다고 위협하셔도 결국 알아내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헌부 물갈이만 해도 당신네 황국민정당에겐 치명타요."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런데 대감."


류주영이 팔짱을 끼고 발을 까닥이며 여유만만하게 물었다.


"지난번에 보니까 김경훈 대감까지 불러서 회의를 소집하셨던데, 이 사람의 짧은 식견으로는 어떤 안건에 있어 황국민정당의 협치가 반드시 필요하신 것 같은데... 지금 황국민정당의 염장을 질러서 좋을 게 있으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홍지아의 얼굴에 광분이 피어올랐지만 류주영은 그녀가 그걸 표출하기 전에 후다닥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홍지아가 탁자를 내려치면서 내읊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그 때 문이 열리고, 내관 한 명이 나타나서 홍지아에게 말했다.


"영상 대감,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래? 앞장서라."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내관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어전회의(御前會議. 군주 앞에서 회의하는 것)를 소집하셨사옵니다."


"뭐?"


홍지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18년 동안 회의를 소집한 적이 없으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