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조정최고청사 경복궁은 크게 3개의 권역으로 나뉘었는데 그중 가장 넓은 곳이 근정전 권역이었다. 황제와 대신들이 회의를 하는 일종의 강당으로, 가장 앞에 있고 가장 웅장한 것에 비하면 쓰이는 일은 별로 없었다.


김경훈이 천천히 근정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안에는 이미 수십 명의 대신들이 들어서 있었다. 맨 상석에는 홍지아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영상 대감."


김경훈이 고개를 숙이자 홍지아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찌푸렸다. 뭔지 몰라도 사헌부에서 어제 전화한 것이 홍지아를 좀 불쾌하게 만들려는 무슨 행동으로 연결된 모양이지. 그는 몹시 통쾌하여 만세를 부르고 싶은 것을 애써 억누르며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그 때, 찬의(贊儀. 예법 진행자)가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둥! 둥! 둥! 벽에 걸려 있던 두 북을 완전 군장한 근위병들이 두드려대며 엄숙한 소리를 정전 안에 가득 채웠다. 이어서 근정전 문이 열리고, 붉은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대한 제정연합국의 황제가 문지방을 넘어 답도를 걸어들어왔다.


찬의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외쳤다.


"극동의 천조질서를 지키시는 유일무이하신 천자이시자, 삼한 땅 대조선국의 대군주이시자, 일본 열도 왜주국의 덴노이시자, 만주 땅 말갈국의 대칸이시자, 대만 섬 다두 왕국의 렐린이시자, 유구 섬 유구국의 중산왕이시자, 필리핀 제도 필리핀 왕국의 군주이시자, 북중국과 남방제도의 위임통치자이시자, 사포대의 주군이시자, 대한 제정연합군의 통수권자이시자, 유학의 대통을 이으시는 분이시자, 천하의 모든 종교와 신앙과 신자의 수호자이신, 만민의 왕중왕 황제 폐하께서 입궐하십니다!"


광만제가 천천히 용상 위로 올라가 앉았다. 모든 대신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리고 황제 앞에 조아리며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18년 만의 어전회의였는지라 노회한 대신들은 어전회의 예법을 좀 까먹었고, 젊은 대신들은 어전회의 예법은 알았는데 해 본 적이 없었다. 광만제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말했다.


"정말 오래간만의 어전회의요. 그동안 짐이 우매하고 불매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은 탓입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광만제가 허어 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을 하겠소. 짐이 어제 영상에게서 어떤 상소를 받았소. 그 상소에서는 영상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감히 짐의 역린인 부마광합의 난을 거론하였소."


그러자 홍지아가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폐하, 영의정 홍지아이옵니다. 그 사건을 즉시 수사하여 배후를 밝힐 것이니..."


"짐이!"


광만제가 홍지아를 노려보면서 차갑게 두 글자를 내뱉자 홍지아는 놀라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더 푹 숙였다. 광만제가 싸늘하게 덧붙였다.


"...말하고 있다."


"...송구하옵니다."


홍지아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광만제가 단단히 노하여 홍지아를 보며 다시 한 번 쏘아붙였다.


"영의정은 황제가 말할 때 말을 자르고 아뢸 수 있다던가?"


"아, 아니옵니다. 소신이 잘못했사옵니다."


"짐이 그대들에게 발언권을 주기 전까지 입을 열지 말라. 황제는 짐이다. 그대들이 짐보다 더 많이 아는가? 짐보다 더 머리가 비상한가? 짐보다 더 빨리 배우는가?"


아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광만제가 용상 앞의 서안을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앞으로 당겼다. 그가 대신들을 둘러보면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조정이 이리 안하무인이 되었는가?"


"폐하,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엎드려서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광만제가 한번 그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하여 짐이 그 탄핵 상소를 읽어 보고 나서, 뭔가 이상하여 그동안 밀린 서류 2천 건을 모두 몰아서 결재했다."


"예?"


홍지아가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광만제가 신경질적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짐이 고개를 들라고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홍지아는 이마에 책을 얻어맞고 나서야 다시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광만제가 눈을 찌푸렸다.


"영상이 놀란 까닭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도다. 영상은 고개를 들라."


홍지아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광만제가 천천히 용상에서 일어나 걸어 내려오면서 물었다.


"왜 놀랐는가?"


"폐, 폐, 폐하께 상소를 보여드린 것이 분명 어제 저녁의 일이었는데, 어찌 오늘까지 서류 2천 건을 결재하셨다고 하시는지..."


"기껏해야 하나에 열댓 장 분량의 서류들이다. 외우면서 읽어도 하나 결재하는 데 20초 이상 걸릴 일이 없다."


대신들은 다시 한 번 저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가 어째서 인외의 마왕이라고 불렸는지, 과거의 대신들이 황제의 두뇌를 인도차이나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실감이 났다.


광만제가 홍지아에게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다시 고개를 숙이라."


홍지아는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광만제가 뚜벅뚜벅 엎드린 신하들 사이로 걸으며 경고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 짐이 조정 대신 모두의 문체를 다 외웠느니라. 각 관료와 신하들이 글을 쓸 때 많이 사용하는 어휘, 마침표의 규칙, 그리고 많이 틀리는 맞춤법까지 외웠다. 이제는 어떤 서류의 페이지를 보아도 그것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다."


다들 다시 한 번 그 황제의 머리에 든 정체불명의 신비로운 물건에 경악을 했다. 광만제가 다시 용상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헌데 그 상소는 어떤 대신의 문체와도 겹치지 않았다."


"예?"


홍지아가 다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번에는 노트북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노트북은 홍지아 등짝에 명중했고 광만제가 근정전을 날려 버릴 듯이 쩌렁쩌렁하게 포효했다.


"고개를 들라고 말하지 않았느니라!"


홍지아가 허리를 붙잡고 신음하면서 이마를 땅에 붙였다. 아무래도 알코올 중독 후유증으로 신경질적으로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박살난 노트북이 땅바닥에 조각조각 나뒹굴었다. 광만제가 천천히 둘러보면서 말했다.


"영상이 또 놀란 까닭은 분명 그 탄핵 상소의 전문을 자신이 가져갔기 때문이겠지. 상관없다. 영상이 보여줬을 때 다 외웠느니라. 어젯밤에 서류를 보면서 곱씹어 보는데 문득 걸리는 게 있더군. 그 상소문에서 밝힌 출처의 자료들 중 일부는 조정의 대신급이 아니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자료들이었다."


광만제가 둘러보면서 명령했다.


"다들 일어나라."


대신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광만제가 눈을 감은 뒤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명령했다.


"영상의 당여라면 영상을 탄핵할 일이 없을 터. 대한정우회 당원들은 모두 퇴청하라."


홍지아를 비롯한 대한정우회의 당원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광만제가 다시 명령했다.


"중추원일기(中樞院日記: 국회 기록물)의 기록 아카이브에 접근할 권한이 없는 대신들은 모두 퇴청하라."


다시 한 번 뭉텅이로 몰려 나갔고, 중추원 의관(국회의원)직을 겸하는 대신들 일부만이 남아서 고개를 숙였다. 광만제가 다시 눈을 찌푸리면서 명령했다.


"전장(戰狀. 전쟁 장계. 전시 보고서)의 아카이브에 접근할 권한이 없는 대신들은 모두 퇴청하라."


모두 다 퇴청하고 정겨열과 김경훈 두 사람만이 남았다. 두 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광만제가 말했다.


"가족이 없는 대신은 퇴청하라."


둘 다 퇴청하지 않았다. 광만제가 눈을 뜨고 한 번 둘러보며 물었다.


"계제정랑 정겨열인가?"


"그렇사옵니다. 딸이 있사옵니다."


"예조참판 김경훈인가?"


"그렇사옵니다. 아들이 있사옵니다."


"김씨. 잡았다."


광만제가 옆에 놓인 봉으로 서안을 탕 내려치며 소리쳤다.


"계제정랑은 퇴청하라! 예참은 당장 짐 앞에 조아리라!"


정겨열이 뭐라고 김경훈을 변호하려고 했지만, 저 철권의 황제 앞에 도무지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죄송한 눈빛으로 인사한 후 걸어나가야 했다. 김경훈이 광만제 앞에 조아리자, 광만제가 싸늘하게 물었다.


"짐이 그대가 작성한 서류를 읽어보았는데 탄핵문건과는 과연 문체가 달랐다. 허나 탄핵문건에서 밝힌 출처의 자료들을 모두 열람할 수 있는 것은 그대와 정겨열뿐이다. 그렇다면 탄핵문건의 초안은 그대들의 자식이나 가족이 그대의 계정으로 자료를 열람하여 작성했다는 것."


광만제가 천천히 파편을 짜맞춘 뒤 테이프로 덕지덕지 연결한 페이지를 집어 들었다.


"본디 상소문의 표지에는 제목과 작성자의 이름만 들어가니, 앞뒤가 모두 백지인데 큼지막한 글씨의 흔적이 남은 파편들은 분명 표지의 파편일 것. 하여 궁녀들을 시켜 짜맞추게 하였더니, 김씨라는 성씨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옆에 놓여 있던 다른 종이를 김경훈 앞에 던지며 다시 한 번 포효했다. 그 종이는 주민등록등본이었다.


"김민현! 이 젖비린내 나는 새끼가 감히 짐 앞에 부마광합의 난을 운운한 장본인이렸다!"


김경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 + +


 


김경훈이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이면서 아뢰었다.


"폐, 폐하, 소신의 아들은 이제 겨우 열둘이옵니다! 그와 같이 어린 아이가 어찌 탄핵 상소를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열둘?"


광만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은 열두 살에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느니라. 짐의 인생에 두 번째 노벨상이었다.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 아이를 짐의 앞에 대령하라."


"폐, 폐하!"


김경훈이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소신을 벌하시옵고 소신의 아들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 주소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이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광만제가 실소하면서 일어났다.


"영의정의 잘못 145가지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84페이지, 12만 3천 자 분량의 상소문을, 노성한 대학자도 빈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한 논리로 적어서 올린단 말인가?"


"폐하, 필시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옵니다. 소신의 아들은 결코..."


"짐을 바보로 아는 겐가?!"


광만제가 용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짐이 비록 시간이 없어 뒷조사는 못 했으나, 만약 여기서 밝히지 못한다면 짐은 뒷조사를 해서 그대의 아들에 대해 캐낼 것이다. 허나 만약 여기서 그대가 사실대로 말을 하고 아들을 데려온다면 참작이라도 하리라. 어찌하겠는가?"


김경훈은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그는 자기 아들이 상소를 올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가 마침내 굴복했다.


"...아들을 데려와 물어보겠사옵니다."


"좋다."


광만제가 밖을 보고 소리쳤다.


"지금 당장 금부도사와 금부나졸들을 보내 예조참판의 사가에서 아들을 데려오라!"


 


+ + +


 


그 시각, 김경훈의 집.


밖에서 한창 애앵거리는 포도차(경찰차)들을 바라보면서 김민현이 빙긋 웃었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


예상했던 도착 시간은 대략 정오경. 그런데 금부나졸들이 도달한 시점은 1시를 넘겨서였다. 김민현은 한상훈과 소일하다가 돌아온 상태였다.


그가 조용히 경비실 뒤로 걸어가 거기 숨겨 뒀던 짐가방을 짊어졌다.


"어우, 이거 생각보다 무겁네."


김민현이 계단실로 나가고 정확히 30초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졸 다섯을 대동한 금부도사가 천천히 와서 열려 있는 문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집 안에는 이렇게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옛 총기와 힘을 잃고 외척과 간신에게 눈과 귀를 잃어버린 군주는 그 인과 예의 덕을 상실한 것이니, 이는 군주가 아니요 곧 잔적한 필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