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전객사(典客司. 외교 담당 관청).


아침 해가 천천히 밝아오고, 야근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람시계가 울리자 전객사에서 철야근무를 한 간원들이 기지개를 폈다.


"어유! 이제 좀 퇴청을 하겠네."


"내일모레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천천히 일어나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란하게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전객사 최하급 간원 한 명이 달려와서 소리쳤다.


"소비에트 대사관에서 사절입니다!"


침침한 눈으로 짐을 싸던 간원들이 일제히 놀라서 가방이나 책더미를 내던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열린 문으로 소비에트군 복장을 한 군인 여성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서 옆구리에 서류철 두 개를 끼고 그들 앞에 섰다.


"그간 기체후 일향 만강하셨습니까. 전객사 간원 여러분."


간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전객사 도제조 한류면이 물었다.


"그래, 이 늦은... 아니, 이 꼭두새벽부터 어찌 찾아오셨담가?"


말갈국, 그러니까 대한제국령 만주 출신인 한류면은 함경도 사투리와 황해도 사투리를 많이 사용했다. 그 소비에트군 여성은 사투리도 문제없이 알아듣고 서류철을 집어들며 말했다.


"우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정부 측에서는 지난주에 대한 제정연합국 조정에 국서를 보냈습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현재 조차하여 쓰고 있는 일본 열도 북부의 석권(石卷. 이시노마키)항에 대한 계약 연장을 요구하였고, 그 답변을 4월 16일 자정까지 하기를 요구했습니다. 헌데 4월 17일 오전 6시 34분 현재까지 대한 제정연합국 조정은 답변이 없었고, 이에 따라 대답을 독촉하기 위해 도달했습니다."


외교적 수사라고는 전혀 없는 직설적인 발언. 이제까지 없었던 말투다. 심지어 마지막 문장에서는 "독촉"이라는 단어를 자기 입으로 언급했다. 전쟁 직전에 이른 국가들 간에서나 오갈 법한 외교발언이다.


한류면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 무시기 일로 그리 격노를 하셨수까. 가라앉히시고 잠깐 앉아 보우다."


그러자 여장교가 서류철 하나를 더 집어들어 흔들어 보이고는 책상에 딱 하고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이 서류철을 대한 제정연합국의 최고 외교권 행사자이자 군 통수권자인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 폐하께 전하라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주 대한 제정연합국 대사관 대사 에라스트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여장교가 뚜벅뚜벅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한류면이 천천히 일어나서 그 서류를 집어 들고 말했다.


"내래 서류를 황제 폐하께 전할 것이니, 그대들은 모두 퇴청하여도 좋다."


"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간원들이 모두 일어나서 전객사 건물을 나섰고, 낮 근무를 하는 간원들이 교대하면서 들어왔다. 한류면이 서류를 들고 뚜벅뚜벅 밖으로 나섰다.


 


+ + +


 


광만제는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황제는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머리가 비상한 황제였고 그것은 부정할 자가 없었다.


그가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서류들이 쉬지 않고 넘어갔다. 자기 손으로 넘기기 힘들었는지 광만제는 자동으로 책장을 넘겨 주는 간단한 장치를(이것도 본인이 개발한 것이다) 최대 속도로 올려 놓고 서류철에 끼운 채 보고 있었다.


김경훈이 천천히 걸어들어와서 광만제 앞에 조아렸다. 서류장이 거의 1초에 두어 장 이상씩 넘어가고 있었다. 저런 속도로 넘기고 있으니 자기 손으로 못 넘기지. 김경훈이 당황해서 말했다.


"폐하, 그렇게 보시면 내용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건성으로 국정을 보시면 아니되옵니다."


광만제는 기계를 끈 뒤, 대답하는 대신 그 서류를 확인하라는 듯 김경훈에게 던져주고, 맨 앞에서부터 읽은 부분까지 외워서 읊어 버렸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광만제의 전성기를 말로만 듣다가 이제야 그 진짜 모습을 본 김경훈은 무용담이라며 의심했던 자신의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 어리석었나이다."


"그래, 내 그대에게 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불렀네."


광만제가 빙긋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곤룡포 소매를 걷었다. 그 안에는 그가 취미 삼아서 어릴 때 만들었던 손목시계가 있었다.


"올 시간이 됐는데... 셋... 둘... 하나..."


광만제의 카운트다운이 0이 되는 순간, 밖에서 대전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강정대군 입시이옵니다."


"그래. 들라 이르라."


광만제가 기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문이 열리고 광만제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누군가가 선비의 복장을 하고 걸어 들어왔다. 광만제가 김경훈을 보고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이쪽은 짐의 둘째 동생 강정대군 이거명일세. 현재 몇 안 남은 전주 이씨 종친들의 수장이기도 하네. 강정, 이쪽은 예조 참판 김경훈이라 하오. 인사하시오."


이거명이 김경훈 앞에 곡좌하여 앉은 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강정대군이옵니다."


"어이쿠, 이거 왜 이리 깍듯이 인사하십니까. 소생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거명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폐하, 소생이 무엇을 하여야 하겠사옵니까?"


"내일 조정의 인사권을 집행하는 이조판서 홍예찬이 파직될 것이오."


광만제가 거침없이 말했다.


"내일 홍예찬에 대한 탄핵 상소가 올라올 것이오. 그럼 짐이 즉시 그 탄핵을 받아들여서 홍예찬을 하옥시키고 그 자리에 그대를 앉힐 거요."


"예?"


이거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경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 임금의 족친은 5대까지 관직에 오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누가 감히 천하 무적의 경주 홍씨 세도가를 상대로 탄핵 상소를 올린단 말입니까?"


그러자 광만제가 여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미 사헌부에 이야기를 해 두었네."


"예?"


김경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광만제가 빙긋 웃었다.


"황국민정당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곳이 사헌부라는 게 참으로 다행이더군. 날카롭게 벼린 다음 칼집에 채워 둔 명검 같았다. 꼭 노련한 무인이 그걸 쥐고 뽑아들기를 기다리는 명검 말이야."


그가 빙긋 웃고 생각했다. 신의 칼. 잠깐 15초 정도 숨을 고르는 동안 서류 하나를 더 보면서 외운 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알아보니 과거 시험이 18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더군. 평소에는 1년에 3회씩 치렀고, 전국에서 지방 구실아치들을 뽑는 과거는 1년에 12회씩 치렀는데 말일세. 덕분에 조정 물이 썩을 대로 썩었고 성균관은 텅 비어 버렸다지."


"실로 그러하옵니다."


"때문에 광명서원이나 말결서원 같은 지방의 명문서원들에서는 자기들이 사과(私科. 사사로운 과거)를 집행하여 합격자를 뽑기도 한다고 했어. 올해부터 당장 과거를 재개할 것이네."


광만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빠르게 나라가 정상화되는 모습이었다. 김경훈은 아직 이 나라의 명운이 다하지 않았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거명이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어허, 강정, 어찌 이러시오. 그래, 내 너무 오랫동안 그대에게 무심했구려. 아바마마께서 남기신 소중한 피붙이인데."


광만제가 서안을 짚고 앉으면서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거명을 보며 말했다.


"짐을 형이라 불러 보시오."


"예?"


이거명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광만제가 껄껄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어서요. 짐이 듣고 싶어서 그러오."


"마, 망극하옵니다, 폐하."


"어허, 황명이오."


이거명이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그러면 소신이 실례를 범하겠사옵니다. 혀... 형님."


광만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김경훈을 보며 말했다.


"예참, 그대는 지금부터 그대가 천거하고자 하는 인물의 목록을 짐에게 제출하시오. 강정대군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나면 곧바로 대거 등용할 것이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김경훈이 엎드려 절했다. 그 때 밖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대전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전객사 도제조 한류면 입시이옵니다."


"전객사?"


광만제가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전객사가 이 이른 시간에 왜?"


"야간에 소비에트 대사관에서 군인이 다녀갔다 하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한류면이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참담한 표정으로 광만제 앞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힘겹게 내뱉었다.


"...폐하."


"어찌 그러시는가?"


한류면이 내관에게 서류를 넘겼다. 내관이 광만제 앞에 그 서류를 주자 광만제는 습관적으로 서류철 넘기는 기계를 서류 옆에 꽂고 쫘르르 넘기며 보았다. 그리고 1초도 지나지 않아 광만제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그가 서류가 다 넘어가기도 전에 내팽개치면서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제국군 전군에 5거 비상령(전쟁 직전)을 걸라 전해라. 지금 당장!"


"예, 예, 폐하!"


내관이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나갔다. 놀란 이거명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니,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광만제가 서류 맨 앞 페이지를 떼어내서 휙 던지고 다급하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서류의 첫 문장은 러시아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Считается объявлением войны, если ответ не получен до 25 апреля.



광만제야 37개 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으니 러시아어 국서를 읽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겠으나, 김경훈, 이거명은 그걸 보자마자 해석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한류면이 중얼거렸다.


"...4월 25일까지 응답이 없으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함메."


광만제가 침전을 뛰쳐나와 요란하게 걸으면서 소리쳤다.


"모든 백관은 즉각 근정전으로 모이라 해라. 만약 오지 않는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붙잡아서 끌고 오라!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서 끌고 오라!"


 


+ + +


 


"황제 폐하께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셨다고? 이유가 뭐라던가?"


"소비에트에서 꼭두새벽부터 국서를 보냈다 합니다."


홍지아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지금 국서를 보냈다면 틀림없이 전에 이야기했던 그것일 텐데...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젠장, 타이밍 더럽게 애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