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만주, 대한 제정연합국 말갈국.


말갈국은 1870년대에 벌어졌던 극동대전에서 대한제국이 청을 쳐서 이긴 뒤 만주에 세운 괴뢰국이었다. 말갈국 대칸(靺鞨國大可汗. 말갈국 대가한)이라는 국가원수직이 존재했지만 실상은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가 겸임하는 자리였다.


남방전쟁 당시 크게 발흥했던 대한제국군의 파벌, 이른바 소장파는 부마광합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 시위대에게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병조의 지시에 반발했다가 모두 좌천되었다. 비록 원폭 투하를 막지는 못했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변방 중의 변방인 말갈국의 군대 말갈군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말갈군은 대한제국군에서도 가장 그 처우가 안 좋은 군대였다. 만주를 지키는 군대는 말갈군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민간군사기업이자 초거대 군산복합체인 사포대(私砲隊. Personal Gunner Company)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간도 분쟁 당시 그 주변의 사냥꾼과 양치기들을 모아 급히 꾸렸던 민병대에 불과하던 사포대는, 말갈국의 경제, 행정, 정치 전반에 깊숙하게 개입하며 점차 군사기업화되었고, 2차 세계대전 시점에는 병력 230만 명, 전차 1만 대, 항공기 3천 기를 거느리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비국가 단일 무력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몰락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30만의 병력과 최대의 군비를 자랑하는 사포대가 실질적인 말갈국의 주인이자 방위군으로 행세했기에, 말갈군은 사실상 말갈국이라는 괴뢰국의 구색맞추기용으로만 쓰이는 군대였다.


소장파 무신의 중핵이었던 늙은 백전노장 곽대진이 말갈군 기지 건물 안에서 스탠드를 켜고 조용히 서류를 넘기면서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한양에서 무슨 일이 터졌나 보군."


그동안 거의 일이 없었던 말갈군의 업무가 폭증하는 것을 보니, 한양도성에서 뭔가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 때 한 장교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곽대진 앞에 경례했다.


"충성! 병마사 대감, 한양에서 연락입니다."


"그래? 얼마 만이더라?"


"꼬박 4년 만입니다."


장교가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


"대감, 한양도성에서 전군에 5거 비상령을 걸라는 지시이옵니다."


"뭐라?"


곽대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구체적인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5거 비상령을 걸라는 황명만이 전달되었습니다."


"황명?"


곽대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18년 만에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 전투태세를 취하라는 것이라?"


"지금은 그런 듯 하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곽대진은 사태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대한제국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소비에트와 대한제국은 지난 18년간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니까.


"전군에 5거 비상령을 걸라 전하라."


"아니 됩니다."


곽대진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병사 출신의 장령인 김세환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최근 배식이 오지 않아 병사들 중 태반이 나흘을 굶었습니다. 지금 전투태세를 지시하면 탈진해서 사망하는 병사가 속출할 것입니다."


"허나 황명일세. 김 첨사, 그대가 병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군령을 어기면 군법에 회부될 수 있으니, 일단 따르는 척이라도 해 주게."


"아니 됩니다!"


김세환이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지금 군영에는 불량식품 납품으로 인해 설사병과 식중독이 돌아 이미 초죽음에 이른 병사들도 무더기입니다. 방산비리로 탄약 재고가 서류 기입분의 40분의 1도 안 되어 모든 병사에게 나누어줄 수도 없거늘, 어찌 지금 5거 비상령을 전군에 걸라 하십니까!"


"이보시게, 김 첨사."


곽대진이 천천히 다가가서 김세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허나 지금 18년간 아무것도 아니 하시던 황제께서 친히 황명을 내리셨어. 뭔가 대단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세."


"언제는 심상했답니까? 병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량 무기로 사고사하고, 식품 공급 부족으로 아사하고, 의복 부족으로 동사하고, 말라리아에 황열병까지 시달리면서 중금속 가득한 낡은 수돗물을 퍼마시는데, 언제 우리가 심상한 군대였던 적이 있습니까?"


김세환은 물러설 여지가 없어 보였다. 곽대진이 한숨을 쉬고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허면 그대 휘하의 부대는 비상령을 걸지 말도록 하세. 나머지 부대는 일단 비상령을 걸라는 지시가 하달되었으니 비상령을 걸 것이야."


"정녕 병마사께서는 이 사건의 진상을 모르십니까?"


김세환이 답답하다는 듯이 탁자를 탕 내려치며 소리쳤다.


"홍지아가 소비에트를 끌어들여 국가 위기 분위기를 조성해서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려는 술수가 아닙니까!"


"그런 추측에 의존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네."


곽대진이 다시 한 번 푹푹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는가. 군인이 까라면 까야지."


"원폭 투하 명령 때는 아무리 까래도 안 까셨던 대감이십니다!"


"어허, 김 첨사!"


곽대진이 눈을 찌푸리면서 소리쳤다.


"그 이상 언성을 높이면 나도 군율로 다스릴 수밖에 없어!"


 


+ + +


 


곧 근정전 안에 신하들이 빼곡하게 섰다. 그중 70% 정도는 대한정우회였고, 30% 정도는 황국민정당이었다. 그리고 높은 관등으로 올라갈수록 대한정우회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육판서(예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대한정우회였다.


그리고 근정전 중문이 열리고 찬의가 소리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근정전 중문의 문지방을 넘어 붉은 버선을 신고 붉은 목화를 신은 발이 근정전 바닥에 닿았다. 대신들이 일제히 엎드려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광만제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광만 38년(1997년) 4월 16일, 대한 제정연합국 대조선국의 긴급 어전회의를 시작하겠소."


대신들이 일어나서 정렬하여 섰다. 사관들이 열심히 컴퓨터를 놓고 타자를 치고 있었다. 광만제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서류철을 들어올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소비에트 대사관에서 보내 온 것이오. 우리 대한제국의 식민지인 왜주국(倭州國. 일본)에는 우리가 러시아 제국에게 조차(租借)해 빌려줬던 부동항, 석권포가 있소. 헌데 이 석권의 조차 기간이 올해 4월 1일까지였소."


광만제가 눈을 찌푸렸다.


"헌데 이번에 온 국서에서, 지난번에 이 조차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국서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소. 4월 16일까지 답변을 요구했다는데..."


그가 국서를 서안에 탕 하고 내려놓으며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짐이 지난날 국정 복귀를 선언한 뒤 밀린 서류를 모두 검토했는데 그런 국서는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된 것인가?"


홍지아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광만제가 천천히 대신들을 둘러보며 차갑게 말했다.


"짐이 없던 동안 국사 전반을 맡아보았던 대신은 누구인가?"


공지형이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옵니다. 폐하."


"4월 16일까지 답신을 하길 요구하는 국서는 대체 어디 있었는가?"


"송구하오나 그런 국서는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공지형이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러자 광만제가 천천히 홍지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홍지아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대사가 조현병이라서 과거에 국서를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도 모르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그 국서를 중간에 가로챘다는 뜻이로군?"


광만제가 홍지아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가 가로챘는지 혹시 영상은 아시오?"


홍지아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광만제가 홍지아를 흡사 자기 손바닥 안에 두고 들여다보듯이 말했다.


"모르시나 보오?"


그가 용상 손잡이를 움켜쥐면서 싸늘하게 덧붙였다.


"국정을 보는 재상이 이런 것도 모르시다니, 반성하시오."


"송구하옵니다."


황제가 한 번 놔줬다. 여기서 진상을 캐겠다고 나왔으면 홍지아는 또 모든 대신이 보는 앞에서 광만제 앞에 엎드려서 빌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처벌을 면키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파고들지 않고 놔주었다는 것은, 약점 하나쯤은 보험으로 잡아두겠다는 소리. 홍지아는 절대 반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광만제가 다시 서류철을 흔들었다.


"25일까지 응답이 없으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갑작스러운 통보요. 다들 알겠지만 지금 우리 국방력으로는 소비에트의 힘을 감당할 재간이 없소이다."


선전포고? 그 말을 듣자 대신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김경훈의 침착하던 표정도 크게 찌그러졌다. 광만제가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의 18년간 우리가 독자노선과 자주권을 유지해 온 것은 우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소. 그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난 18년간은 아니었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대한제국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만 그랬던 것이고, 경제력, 군사력, 패권체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소비에트는 1950년대 이래 대한제국을 시종일관 압도해왔다. 1952년을 기점으로 소비에트의 군사력은 대한제국의 130%, 경제력은 2배,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구는 3배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이 공산화되기를 거부하고 소비에트와 교린관계로만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에게 대영제국이라는 주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제국이 수틀려서 대영제국과 손을 잡을 경우 소비에트는 매우 곤란해질 따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소비에트는 대영제국의 해양 패권을 무너뜨렸고, 중동에서는 소비에트와 손잡은 이스라엘이 영국 패권 아래 있던 이집트와 요르단 등을 상대로 승리, 중동 전역의 대도시들을 점탈했다. 몽골, 동튀르키스탄(위구르), 토번(티베트), 아프가니스탄까지 모두 공산화되었다.


반공의 화신이었던 중화민국도, 그들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던 위구르 동부 지역에 대한 철군 요구에 곧바로 응하면서 무릎꿇었다. 1차 대전 이래 철저한 고립주의로 일관하던 미합중국도 소비에트의 태평양 진출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봄, 그 해 시베리아 영구동토의 붉은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범세계적 패권 질서를 누리고 있었고, 그 앞에 독자노선을 유지하려는 해동의 검은 제국은 불행히도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폐하, 영의정 홍지아 아뢰겠나이다."


광만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하시오."


"소비에트는 이제까지 지속적으로 극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확장을 꾀해왔사옵니다. 작금의 대한제국은 결코 그에 맞설 힘이 없사옵니다. 소신이 직접 나가 소비에트 대사를 만나보고 오겠사옵니다."


"그대가?"


"예. 소신이 직접 나가서 소비에트 대사의 뜻을 묻고, 이사노마키 조차 기한을 연장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또한 소비에트와의 외교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확정해 나갈지를 논하겠사옵니다."


그러자 광만제의 콧잔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급기야 그가 용상 앞의 서안을 쾅 내려찍으면서 쩌렁쩌렁하게 호통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홍지아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팍 숙였다. 광만제가 벌떡 일어나면서 서안을 뒤집어엎고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그 넓은 근정전 천장까지 마구 울렸다.


"소비에트와의 외교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확정해 나갈지를 왜 그대가 정한단 말인가? 짐이 국정을 놓고 뒤뜰에서 놀고 있었더니 이제 그대는 짐이 군주로도 아니 보이는 것인가?!"


홍지아의 얼굴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광만제가 용상에서 뚜벅뚜벅 걸어 내려와서는 홍지아 앞에 서서 중후한 목소리로 경고하듯이 말했다.


"다시 묻겠다. 그런 것인가?"


"...아, 아니옵니다."


"외교 향방 전반을 위해 소비에트의 대사를 접견하는 것은 짐이 직접 할 일이다. 네까짓 재상 따위가 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가 홍지아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홍지아는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중년의 군주가 고작 10대 때 모후의 수렴청정에 반발하여 외가를 풍비박산 내버리는 동시에, 최연소 노벨상을 거머쥔 인외의 괴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자각했다.


광만제가 홍지아의 귀에 대고 말했다.


"짐이 짐의 처가라고 해서 못 죽일 것 같으시오?"


홍지아가 놀라서 정렬한 자세도 흐트러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광만제가 싸늘한 눈빛으로 홍지아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마디 했다.


"처신 잘하시오."


겁에 질린 홍지아가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광만제가 뚜벅뚜벅 용상 위로 다시 걸어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