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이라는 말 자체는 사회주의자들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안물이 아니라 로마 시대의 시민들을 여러 등급으로 분류하는 지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시절 계급의 예시로는 정치권 없는 평민 Plebs 혹은 기사 계급 Equites가 있다) 또 고전 정치경제학이나 공상적 사회주의, 근대 정치사상에서도 계급이라는 개념은 사용되었고, 탐구되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이 계급 개념이 특수화된 것은 단순히 사회적 불평등의 지표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계급관계이고, 역사발전의 기본 동력을 이루는 것이 계급투쟁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급의 존재는 전적으로 생산의 발전에 있어서의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규정된다. 둘째,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로 귀결된다. 셋째, 이러한 독재는 그 자신, 단지 ‘모든 계급의 철폐와 무계급사회’로의 이행을 담당한다. 따라서 마르크스 계급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계급의 물질적 존재와 계급투쟁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이 도달하는 지점으로서의 사회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문명사회에서 계급이 선행해서 존재하고, 그 이후에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속에서 계급이 형성, 발전, 소멸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공산당선언에서 언급된 바 있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테제가 아주 중요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역사의 유물론적 파악 방법은 화석화된 경제법칙의 작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계급투쟁을 매개로 해서 진행되는 역사 진보의 인식론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서는 ‘계급이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인간사회는 항상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앞으로도 여전히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의 사회구성체인 원시사회는 무계급사회였다(흔히 말하는 원시공산사회). 그 당시에는 생산력의 발전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생산수단은 공동의 소유였으며, 모든 사회성원들은 공동으로 노동하였다. 따라서 인간을 착취할 가능성이란 없었다. 인간의 노동력이 자신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이상의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면서부터 경제적으로 계급의 발생과 착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생산력의 고차적 발전, 광범위한 사회적 분업 그리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형성은 계급발생의 객관적 기초를 형성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으로의 사회분열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필연이다. 


 어느 계급사회에서나 생산 수단을 소유한 계급은 소수이며 항상 민중의 강력한 힘을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계급들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힘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힘은 계급들이 상호투쟁 속에서 소멸되는 것을 막으며, 또한 지배계급의 권력을 뒷받침하게 된다. 계급과 더불어 생겨난 이 역사적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특히 경제 외적 강제가 아닌 경제적 강제에 의해서 착취가 이루어지고, 자본간의 시장을 둘러싼 적대적 경쟁원리의 작동은 경제의 외곽에서 부르주아계급의 통일을 보장하고, 노동자계급을 통제할 자본주의국가를 필연화한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며 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전반적인 계급구조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부르주아계급 내부의 변화이다. 자본간 경쟁의 귀결로서 나타난 자본의 집적·집중의 심화는 경쟁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산업자본, 상업자본, 은행자본의 분파적 상호관계를 상당히 변화시켜, 독점으로 성장한 자본의 경우 산업자본이 상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기능까지를 일정하게 통합하게 된다. 이는 주식회사 제도의 발전, 자본주의적 신용의 역할 증대, 기업관리 조직의 거대화 등과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은 이제 독점부르주아 계급분파와 비독점부르주아 계급분파로의 분화가 주요한 계급내적 분할의 형태가 된다. 한편 독점부르주아지 내부에서도 주식회사 제도의 발전에 따라 법적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일정하게 진척되는데(흔히 말하는 CEO의 출현.), 법적 소유자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산과정 안에서의 자본의 기능을 일정하게 전담하는 전문 경영자라는 기능적 자본가들이 형성된다. 이러한 기능적 자본가들 중의 최상층은 그 자신이 법적 소유자로 전화하기도 하며, 자본주의적 신용에 기초한 실질적 소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부르주아 사회과학에서 주장되듯이 ‘경영자계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신용관계의 독점적 변형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의 내부구성이 변모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공고화하는 가운데 노동의 합리성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기업조직과 국가조직이 관료체제화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강화될수록, 조직이 거대화될수록 관료체제는 강화되며 그에 따라 이를 억제하거나 이용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관료의 수도 증가한다. 이들 관료들은 한편으로 자본의 억압과 착취기능을 수행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임노동자로서 결합노동의 일부를 이룬다-이것이 관료주의에 대한 여러 사상가들 간의 상이한 해석에 큰 해석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 하에서이들의 계급위치는 그 중간층으로 규정될 수 있다. 마르크스도 <잉여가치학설사> 제2부에서 기계에 의한 노동자의 대체가 비생산적 고용자들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관리들과 기업의 중간간부들을 중간계급들로 표현하고 있다. 기업의 상급·중급 관리자들(매니저층)과 국가관료층(중상급 공무원들)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적 분할에 의해 형성된 신중간층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 신중간층의 절대적, 상대적 규모는 증가해왔다. 그러나 이들 신중간층도 정태적으로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적으로 분화하는 경향을 갖는다. 즉 상층의 신중간층은 부르주아지로의 상향의 가능성을 가지며, 하층의 신중간층은 프롤레타리아트화의 경향을 갖는다 ->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신분 상승 사다리"이다. 현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인 담론도 이러한 "사다리 밀어내기"에 관련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음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신중간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경계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화의 동태적 경향 속에서 ‘그물눈’과 같은 과도적 복잡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셋째, 임노동의 내부구성과 관련하여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대거 늘어났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크게 사무관리직, 전문기술직 노동자로 나눌 수 있다. 사무직 노동자의 증대는 자본의 재무, 판매, 구매 등과 같은 기능이 커짐에 기인하는 것이며, 관리직 노동자의 증대는 자본의 지휘와 감독의 기능이 기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해지는 데서 기인한다. 전문기술직의 증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에서 과학과 기술의 역할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이트칼라 노동자 가운데는 위의 두 번째 항에서 보았듯이 자본의 기능수행과 관련된 신중간층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위치를 갖는다.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정신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수에 있어서 많은 비중을 보이기도 한다. 


 넷째,1970년대 중반 이후 극소전자 자동화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혁명은 계급구조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의 계급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전의 포디즘 단계에서 주요한 노동자 집단이었던 반숙련 생산직 노동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프롤레타리아트들) 들의 지위를 약화시키며, 그 대신 일정한 전문적 자격과 숙련을 갖춘 지식 노동자들의 지위를 크게 상승시킨다. 이들 지식 노동자들의 다수는 관료적 중간층이 아니라 잉여가치를 생산하거나 잉여가치 실현을 보증하는 핵심적 노동자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들은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중산층적 생활양식에 친화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부르주아적 세계관과 의식에 노출이 심한 반면 또한 민주적 가치와 합리성에의 기대가 높은 집단이다 ('지식'노동자라는 말이 허울뿐인 단어가 아니다). 이들을 어떤 정치세력이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드는가가 서구의 현실 정치에서는 관건적 요소로 되고 있다. 특히 중도계층이 이러한 게열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많은 정당들이 이들을 지지기반으로서 삼으려 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지식노동자로서 새로 발달하는 문물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유연한 지지기반층으로서 아주 긍정적인 형태로 작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보편성을 띄는 현대 정당들에서는 필히 포섭해야 될 존재로서 부상중이다.


 다섯째, 1980년대를 기점으로 (그러나 실질적인 시작은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 매체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라고 사료되는 바이다) 게급간의 생활상이 여실히 드러나며 계급간 모순에 대한 의문을 보이는 현상이 많은 이들에게서 보이고 있다. 자신보다 어린 일개 학생이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가방을 사고, 수십만원짜리 식당을 가는 등 엄청난 사치를 부리며 사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 21세기의 인터넷 매체이자 정보의 확산이다. 이전에는 정보의 통제라는 개념에서 그 확산수단이 한정되어 있기에 잘못된 사회상에 대한 인식 즉 부르주아지들의 의도적인 정보편향 유도가 참으로 쉬웠다. 물론 현재도 그 확산수단으로서 기능하는 정보매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대개 부르주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축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목 하에 더욱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계층간의 모순을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이 직접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보며 더욱 비판적인 사회관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면에서 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