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련이 천천히 백마에서 내렸다. 바로 옆에 있던 고이만년과 재증걸루가 놀라서 고개를 말 밑으로 내렸다. 거련이 맥검 칼집을 쥐고 천천히 앞으로 걸으면서 말했다.


"만년, 걸루."


"예, 태왕 폐하."


"그대들은 잔주를 추격하라."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의 군주가 단신으로 적장 앞에 서니 장수들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망설이자 거련이 쩌렁쩌렁하게 호령했다.


"어서! 잔주를 잡아 그 목을 잘라오라!"


"예, 태왕 폐하!"


두 사람이 말머리를 당겨 오른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위례성 한가운데에서 마침내 70년의 숙적이 서로를 마주했다. 두 사람은 얼굴에 하얀 수염이 가득했고 머리는 모두 하얗게 샜으며, 얼굴은 낡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목라만치가 협도를 어깨 위로 휘둘러 올려서 양팔로 받쳐 들며 거련을 보고 말했다.


"지긋지긋하게도 오래가는 악연이로구나."


"누가 할 소리."


거련이 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리고 옥이 박힌 칼집을 불길 밑으로 던져 버렸다. 그가 칼을 천천히 위로 치켜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해동의 조조라더니, 너의 주군을 도망 보내고 너는 끝내 운장처럼 적진 한가운데에서 죽기를 택하였구나."


"틀렸다."


목라만치가 협도를 앞으로 뻗으면서 대답했다.


"자룡처럼 적진을 단신으로 뚫고 주군에게 돌아갈 것이다."


거련이 검을 꽉 쥐었다. 한때 각각 요동과 삼한의 으뜸가는 무객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늙었다. 그들은 검을 들고 서기에도 힘들었고 지금 기싸움하는 것만으로도 지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더 늙기 전에 두 사람은 오늘 여기서 결판을 내야만 했다. 먼저 공격한 쪽은 목라만치였다.


협도가 위에서부터 길게 내려찍으며 거련의 정수리를 쪼갤 뻔했다. 거련은 급히 맥검을 치켜들어 그 공격을 막아냈다. 한창때의 목라만치였다면 그는 이 공격이 막힌 순간 곧바로 협도를 돌려 거련의 가슴팍을 찔렀겠지만, 지금의 목라만치는 그렇게 민첩하지 못했고 그렇게 활달하지 못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협도를 다시 품으로 끌어왔다.


거련이 칼을 허리 밑으로 다시 내리는데 팔이 후들거렸다. 이미 두 사람 다 아흔을 바라보는 몸, 무기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삭신이 쑤셨고 몸이 아렸다. 거련이 칼을 들어올리고 공격했다.


기습이 아니었고 민첩하지 않았으며 빠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늙었고, 근육은 모두 낡을 대로 낡았으며 관절과 뼈 마디마디가 한 번 동작에 천 번씩 비명을 질러댔다. 두 사람의 공방은 정직했다. 정면으로 파고들었고, 정면으로 막아냈다.


목라만치가 협도를 바닥에 내려찍으며 몸을 지탱하고 허리를 붙들며 소리쳤다.


"네놈은 도대체가 늙지도 않는단 말이냐!"


거련 역시 맥검을 짚고 한쪽 다리를 절면서 마주 외쳤다.


"오른팔이 말을 듣지 아니함이 야속할 따름이다!"


곧 두 사람이 다시 무기를 번쩍 들어올렸다가, 이내 신음하면서 동시에 주저앉았다. 10여 합을 싸웠을 뿐인데 이미 두 사람의 체력은 고갈되었다. 수백 합 수천 합을 겨뤄도 지치지 않던 청춘은 이미 모두 세월 속에 묻어지고, 지금 남은 것은 단지 권력욕과 정복욕에 가득 찬 고구려와 백제의 두 망령과 그 껍데기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목라만치가 비명을 지르면서 협도를 다시 들어올렸다. 왼쪽과 오른쪽을 막론하고 어깨 양쪽이 모두 생비명을 질렀다. 거련 역시 맥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발목 사이의 힘줄이 찢어지는 듯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보고 울부짖었다.


"내가 30년만 젊었더라면! 네놈 따위는 지금쯤 베어 넘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무기를 다시 집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충돌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모두 무기를 놓쳤다. 둘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팔목을 움켜잡고 땅바닥에 굴렀다. 부딪힐 때마다 삭신이 부르짖었고 골격이 뒤흔들렸다.


한때 천하 제일의 무객이었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개가 비웃을 정도로 두 사람의 싸움은 무식했고 비참했다. 서로 붙들고 땅바닥에 나뒹굴면서 머리로 들이받고 입으로 물어뜯었다.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의 다리와 허리가 너무나도 낡아 있었다.


목라만치가 필사적으로 거련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그리고 그의 낡은 주름살 가득한 피부를 깨물어 뜯어내려고 확 당겼다. 그러자 거련의 피부 일각이 찢어져 나옴과 동시에, 목라만치의 앞니 세 개가 뽑혀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붙들고 몸부림치며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 짜냈다. 먼저 지친 쪽은 거련이었다. 거련이 헐떡이면서 바닥에 털퍽 쓰러졌다. 목라만치가 끄윽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일어날 수도 없었다. 허리가 매 순간 매 일각마다 찢어지는 계집처럼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때 백제, 가야, 일본, 탐라, 신라 남방 5국을 호령했던 권신 목라만치가, 바닥에 떨어진 날카로운 돌덩이 하나를 집어 들고 물귀신처럼 부르짖으며 바닥을 기어, 거련을 향해 다가갔다. 거련이 헐떡이면서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낡은 몸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목라만치가 거련의 머리를 내려찍으려고 돌을 높이 들려 하다가, 자신의 어깨를 못 이기고 돌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얼굴을 쳐박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아아아아!"


그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다시 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거련의 얼굴 바로 앞으로 가져가 떨어뜨렸다. 하지만 늙은 몸으로 돌을 높이 들어 봐야 어디까지 들겠는가? 돌은 거련의 코피를 터뜨렸을 뿐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 버렸다.


거련이 신음하면서 그 돌을 붙들어 오른편으로 두 뼘쯤 밀어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미 그의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목라만치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뻗자, 거련 역시 힘을 쥐어짜서 목라만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여든 넘은 노인들이 불타오르는 진흙탕 한가운데서 씨름하는 그 모습을, 목라만치에게는 비극적이게도 먼저 발견한 쪽은 고려군이었다.


마침내 목라만치가 돌을 다시 오른손에 붙들어 쥐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쇠스랑 같은 쌍지창이 목라만치의 등을 뚫었다. 목라만치가 헉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쉰 뒤, 그대로 얼굴을 땅에 내팽개치고 입을 벌린 채 숨통이 끊어졌다. 다혜환노가 창을 뽑으며 외쳤다.


"태왕 폐하! 괜찮으십니까?"


지친 거련이 죽은 목라만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거련은 잠시 죽은 목라만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도 언젠가 죽을 때는 저런 표정으로 죽겠지,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불타오르는 위례성의 궁궐이 거련의 사방을 에워쌌고, 백제군의 피로 칠갑이 된 고구려 정병들이 달려와 거련을 들어올려 황금 장식 들것에 실었다. 숙적의 수도를 불사른 영광된 승리의 밤에, 거련은 단지 한 덩이 환자의 몸으로 후송되는 것에 그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