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장단군 진서면(현재 파주시 진서면으로 일부만 남한이 수복. 판문점의 소재지)은 딱 38선이 걸치고 있던지라 같이 마을을 오가던 주민들도 미군과 소련군 점령지역으로 한순간에 갈라지고 말았는데, 이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진서면에 있는 유일한 학교인 진서국민학교에는 일제 시절부터 38선 이북, 이남 학생들이 전부 다니고 있었던지라 38선이 나뉘어진 후에도 당분간은 계속 양측 학생들이 계속 다녔습니다. 진서면에 주둔한 미소 양국군 병사들간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고, 서로 음식을 나눠먹는 등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1947년에 진서국민학교 제1회 졸업식이 열리는 때에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당시 졸업식엔 학생들의 학부형이던 남한 경찰, 북한 경비대원 등이 전부 참석했고, 그냥 여느 학교처럼 평범하게 졸업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근데 졸업식이 끝난 후 뒤풀이로 다과회가 열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일련의 소련군 병사들이 학교 운동장을 포위합니다. 병사들은 따발총을 들고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과 어른들을 모조리 밖으로 나오라고 했고, 결국 건물 밖으로 나온 진서면장, 진서국민학교 교장, 장단군 학무과장 등은 영문도 모른 채 소련군에게 끌려가고 맙니다.


다행히 학생들은 잡혀가지 않았고, 소련군에 끌려간 어른들도 대부분 무사히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적지 않은 고문을 겪는 등 심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진서국민학교는 즉시 폐교되어 학생들은 졸지에 다른 면의 먼 학교를 대신 가야 했죠.

아직까지도 소련군이 갑자기 이런 패악질을 부린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진서국민학교 폐교 이후인 1947년 6월에도 진서면 면소재지인 눌목리(38선 이남)에서 지게를 지고 가던 여성들을 납치해 식량을 빼앗은 소련군 병사 2명이 남한측 경찰관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건 상부의 명령 없이 그냥 일개 병사들이 멋대로 38선을 넘어 약탈을 벌인 것이었죠.

이 사건으로 소련군 병사들과 북한 경비대원이 대놓고 진서면의 38선 인근 지역으로 급파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우리측 경찰들도 총기를 들고 대치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이는 미소 양국간의 국제재판으로까지 번졌고, 판결은 소련군 병사들이 멋대로 38선을 넘은 것으로 밝혀져 우리측에 유리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위협하는 바람에 더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진서면 주민 상당수가 남쪽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미 진서면 지역은 거의 준전시상태나 마찬가지였고, 이대로면 소련군의 총칼에 자신들의 가산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으니요.

소수의 주민들은 남긴 했으나, 이들도 6.25 이후 북한군의 군홧발과 북진 국면 등을 겪으며 최종적으로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지금의 진서면은 판문점의 소재지로서 분단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출처: 윤택림, '구술로 쓰는 역사: 미수복경기도민의 분단과 이산의 삶', 아르케, 2016.

장단군지편찬위원회, '장단군지', 2009.

블로그 출처: 네이버 블로그 무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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