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초기 3일, 서울 조기 실함에 있어서 이승만의 책임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것 뿐, 그 이외의 비판은 억울하다는 식으로 쉴드를 치는 분들이 있어서 따로 발제해보는 글임. 


물론 개중에는 '북괴 아새끼들이 먼저 처들어왔는데...' 라며 억울해하는 식으로 이야기할 사람도 있지만, 이 글은 전쟁 이전 한국 정부의 전쟁 준비 태세에 대한 글이므로 전혀 상관없음을 미리 공지함.


그러면 과연 그의 잘못은 대통령이었다는 것 뿐이었나? 라는 주제를 알아보기 위해선, 우선 한국 정부의 전쟁 대비태세를 보아야 함. 이미 49년부터 한국군이나 한국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에 전차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음. 


드럼라이트 주한미국대리대사 역시 50년 5월에 T-34 전차 65대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로버츠 KMAG 단장 역시 한국군의 대전차포를 언급하며 북한군 전차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했음.


이에 따라서 사단장들의 인선이 49년부터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고, 특히 북한군의 주력 공세가 예상되는 1사단, 7사단, 6사단, 8사단 방면은 세심하게 공을 들여 교체를 단행함.


1사단에는 백선엽, 7사단에는 유재흥, 6사단에는 김종오, 8사단에는 이성가가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미군으로부터 방어전에 어느정도 일가견이 있고, 사단 지휘를 해낼 수 있는 자원들로 평가받았던 사람들임.


문제는 예하 병력들과 동원체제의 문제가 있었음. 예하 병력들의 경우 50년 기준 67개 보병대대는 49년 말에서야 중대급 기초 훈련이 완료되었음. 20개 대대는 이제서야 대대급 전술훈련에 나섰으며 28개 대대는 M1 소총 사격술을 마치지 못했고, 11개 대대는 소대급 훈련을 이제 막 시작한 상태.


이렇게 된 이유에는 1공화국이 저지른 실책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경찰을 너무 과도하게 증강시키기 시작했다는 문제임. 경찰을 50년에 65,000명까지 증강시키려다가 KMAG에서 제동을 걸어 실패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것임.


이미 49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경찰 병력은 5만명, 22개 전투경찰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실상 내무군 수준인 상태였음. 그리고 이들에게 들어가는 예산은 국가 재정을 뒤흔들기도 충분했고.


괜히 한국전쟁 직전에 국채 100억을 국민들에게 쥐어주고, 각 시/도별로 나눠서 분납하라고 한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님. 군사비와 치안비로 국가 재정의 대다수가 소요되었으며 심지어 49년 기준으로 7,000만 달러의 재정적자가 나왔을 지경임.


경찰 유지비용만 1,300만 달러. 그렇게 되면서 정작 일선 부대들이 대전차진지 및 축성진지를 만들 수 있는 자재 및 건설비용이 모두 예산에서 사라지게 되었음.


혹자는 이를 두고 간첩이 한국군 및 정부 내에 암약해서 대전차진지 및 축성진지 건설비용을 고의적으로 누락했다고 하지만, 전후사정을 보아서는 이미 과도한 군비 및 치안병력 유지비용으로 국가재정이 파탄이 나서 예산 확보가 안된 것에 가까움.


그렇다보니 일선 사단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거의 없었음. 보급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부식 같은 것도 사단장이나 연대장들이 알아서 후방에서 구해다가 전투부대에 보급해줘야하는 상황이었음.


괜히 미군이 한국군의 비리를 눈감아주었던 것이 아님. 돈이 없으니 병사들 식비라도 벌려고 비리를 해대서 미군도 적당히하는 선에서는 그냥 눈감아주고 말았던 것.


이런 상황에서 훈련이 제대로 될리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한정된 훈련소 부지에 경찰대대들이 자기들이 먼저 쓰겠다며 한국군 대대들의 훈련 일자를 밀어버리는 사태도 벌어졌음.


그래서 KMAG에서는 1만 명의 한국경찰들을 대상으로 1개 중대 112명으로 구성된 총 22개 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여 육군을 보조하는 방안을 채택하였으나 문제는 이마저도 너무 느림.


한정된 훈련소와 장비, 그리고 부족한 자금은 환장의 콜라보를 만들어냈는데, 안그래도 급한 한국군 대대들의 훈련 일정을 완전히 망가뜨렸고, 경찰대대 자신들도 훈련이 너무 느렸음.


1950년 1월부터 전투경찰대대 훈련에 나섰으나 5월까지 훈련을 마친 대대는 단 1개 뿐이었고, 그 과정에서 육군의 훈련은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함. 경찰을 너무많이 늘려버린 것에 대한 실책이었던 셈임.


KMAG과 국방부는 전투경찰대대 프로그램을 빠르게 실시하기 위한 예산을 요청했으나 50년 5월 내무부 장관은 자금 부족으로 이를 기각했고, 한국군은 훈련일정을 변경시킬 수 밖에 없었음.


당초 50년 3월 31일까지 67개 대대가 대대급 CPX를 마칠 수 있다는 계획은 6월 1일까지 밀리게 되었고, 그나마 6월에 100만원의 추가 예산 및 훈련일정 단축을 통해 14개 경찰대대가 6월 동안 훈련을 마칠 수 있었음.


그리고 7월부터 다시 한국군을 훈련시키고자 했으나 이미 전쟁이 터져버림. 즉 경찰에 대한 적절한 자금 지원 및 예산 배정없이 단순히 숫자만 증강하고 훈련 프로그램은 답없이 늘어지게 만들어버리니 한국군이 전방에서 대비할 태세를 갖추기가 어려웠던 것임.


거기에 축성진지 건설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들은 월급조차 받지 못하며 근무를 해야하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셈.


또 다른 이유로는 국경분쟁 및 대게릴라 작전으로 인한 훈련 실패임. 49년 12월 기준으로 67개 대대 중 39개 대대가 대게릴라전 및 국경분쟁에 참가하는 통에 훈련을 제때 이수하지 못했고, 5사단의 경우 50년 3월 중순까지 3개 연대 전체가 야전에 묶여버려서 겨우 1개 대대씩 돌려가며 훈련을 하던 형편이었음.


그 결과 전쟁 직전 대대급 훈련을 이수한 부대는 16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고 연대 CPX 및 대전차훈련까지 제대로 받은 대대는 3개 연대 뿐이었음.


이것을 가지고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의 실책이라고 보기엔 북한군의 게릴라전이나 국경분쟁, 그리고 군대 자체의 문제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KMAG에서는 국경분쟁의 다수는 공세적인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다고 이미 지적함.


괜히 전방 사단장들이 49년에 교체된 것이 아님. 이미 48년~49년 전반기까지 국경분쟁을 거치면서 문제를 심각하게 드러냈기 때문임. 게다가 예산 문제가 있음에도 무리하게 군대와 경찰 병력만 늘려둔 것도 문제.


기껏 뽑은 군대와 경찰은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도 없게 밀어넣었고, 거기에 월급이나 보급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아 알아서 숙식을 해결해야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졌음.


이러한 문제는 동원체제의 미비로까지 이어짐. 49년에 이미 징병제에 대한 대강이 나왔으나 실행되지 못한 것은 예산 문제였으며 이를 실시할 국가 기관 및 자금 부족으로 50년 현재에도 제대로 된 징병 검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음.


이루어진다하더라도 이는 징병검사를 받은 사람이 징병검사비용을 국가에 납부하고서 실실해야하는 상황.


이렇게 답도없는 상황 만든게 1공화국임. 이렇다보니 오히려 이기붕이 나서서 49년부터 어느정도 한국 정부의 법치 및 경제를 회복시키기 시작한게 의외라면 의외인 점임.


시스템과 예산의 부재는 전쟁 준비에 대해서 단 하나도 준비하지 못하게 했으며, 일선 사단장들은 지역 주민 및 학생들을 징발하여 무보수로 참호 및 축성진지를 구축하기도 함.


그 결과 전방 사단들을 부족하나마 방어진지들을 갖추기는 했는데 제대로 만든 것은 아니라서 오래 버티지는 못했음. 이러한 상황인데 과연 신생 국가의 대통령이란 이유만으로 너무 과도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은 글쎄.


경찰과 군대에 대한 폭발적인 증강을 일으킨 것은 그의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고, 국경에서의 대규모 분쟁과 그로 인한 사상자의 증대에 대한 책임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음.


전반적으로 서울 방어의 실책은 그에게서 많은 것이 기인된 문제임. 이미 KMAG은 한국정부와 군에게 군대와 경찰 숫자를 현실적으로 감축하고, 견실한 군대 재편을 권고했으나 이마저도 무시했고.


뭐, 전후에도 100만 대군 유지한답시고 미 정부가 제안한 육군 감축 및 해공군 최신장비 공급도 뻥 차버리고 대규모 육군 유지에 눈이 뒤집어졌으니 이 때라고 다를 것은 사실 아니긴 했음.


이런 전후사정을 모르니 한강교 조기폭파 쉴드나 치고 있지. 그리고 계속 전차들이 한강교 건너갔으면 한국 패망했다~ 이러는데 애초에 서울 진공한 북한군 사단들은 한강교 도하는 임무에 없었음. 그래서 미아리 뚫고서 전차들이 야간에 이리저리 헤멘거고.


김포의 6사단과 춘천의 2사단이 도하 임무를 갖고 있어서 걔들은 그냥 서울 점령하면 2/6사단이 도하 장비 깔아주면 그거 건너서 가던가 해야하는데 2사단은 춘천에서 박살나고, 6사단은 김포방어사령부한테 발목잡혀서 28일까지 도하 못하고 있었으니 못건너온거지.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패착은 아주 다양함. 무분별한 군사력 증강과 예산 부족에 대한 주먹구구식 대비, 그리고 축성진지 구축에 대한 무관심과 서울 방어에 대한 무대책도 한 몫함.


거기에 경찰의 무분별한 증강인 정말이지...KMAG이 오죽 답답했으면 직접 나서서 전투경찰대대 안건이랑 연계해서 빨리 훈련시키려고 개입했겠음. 방어할 군대의 훈련도 발목잡은 원흉이라면 원흉인 셈임.


P.S. 자료를 제공해주신 늑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출처

7사단 전투상보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Peace and War

KMAG and the 7th ROK Division

6.25사변 후방전사, 육군본부

중앙일보사 - '민족의 증언'(1976) 등 다수


출처: 네이버 블로그 오로라의 공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kumi17cs1013&logNo=222316077509&referrerCode=0&searchKeyword=%EC%9D%B4%EC%8A%B9%EB%A7%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