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새싹이 움튼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꼼짝없이 남아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울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죽어야 민주주의의 싹은 죽지 않고 힘차게 뻗어갈 것이다!'


장기영 체신 장관, 서울 사수 논의 도중 부르짖으며. 실제로 그는 답답한 서울 사수 논의 때문에 화가나서 이리 대답했으나 실제로 서울에서 죽을 각오를 하였다고 전해짐.


#2. - '지금 우리의 수도 서울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다. 우리는 조국을 지키는 간성으로서 마땅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죽어야 할 시기가 온 것으로 안다. 목숨을 걸고 서울을 사수하자!'


7사단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유언. 직후 1연대의 철수 도중 북한군의 총격으로 전사하였음. 그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연대장이 되었으며 수많은 1연대 소속 장병들이 며칠 사이에 그의 뒤를 따르며 서울에서 전몰함.


#3. - '우리가 38선 넘어올 때 후퇴하려고 넘어온 줄 아느냐?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미아리 방어선 붕괴 직후 철수 명령에 항의하던 제1연대 잔존 병력들. 이들은 대부분이 서북에서 내려온 월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그런만큼 가장 지독하게 저항하기를 선택함. 직후 연대원 대부분이 서울에서 전사함.


#4. - 별안간에 모두 모이라 하여 마당으로 나가니 봉투를 주며 유서를 써 넣으라는것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쓸줄 아는 사람에게 대신 써달라 하고 그길로 도락구 (트럭)을 타고 문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처음 땡크를 보았다. 대가리가 휙휙 돌아가면서 포를 쏘는데 우리 기관수가 (기관총 사수) 붕 날아갔다가 떨어져 죽었다. 화염병을 만들어 언덕밑에 온 땡크에 던지라고 하지만 다가갈 수가 없어 근처에 던졌다. 


이후 행주나루에서 후퇴를 하려는데 다리가 끊어져 모두 헤엄쳐서 강을 건너라고 했다. 총이랑 가방이 무거워서 철모랑 같이 버리고 왔다. 나는 고참을 붙잡고 형형 거리며 수영을 못하니 데려가 달라고 매달렸다. 결국 큰 나무를 붙잡고 그대로 떠내려가다시피해서 건너왔지만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철모를 그대로 쓰고 수영하려다가 죽은 사람, 군화가 무거워 죽은사람, (해석 불가) 많았다. 제대로 전투도 못해보고 죽은거다.-


김응섭 옹, 50년 4월 입대, 당시 1사단 소속. 철수 당시를 증언하며. 이후 낙동강 전선과 1.4 후퇴를 거쳐 6사단에 편입되어 이등중사로 제대함.


#5. - '장관 앉으십시오. 내가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철수하느니 백만 학도를 동원해서 서울을 사수해야 합니다. 시민들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습니다!


27일 새벽 5시 국방수뇌부 회의 도중 철수에 절대 반대하던 이선근 정훈국장(당시 대령)의 외침. 직후 채병덕 총장은 정부는 수원으로 가지만 군은 더 버티자고 결의.


#6. - 적은 저항을 했으며 또한 전투가 진행되면서 남조선 영토 종심 방향으로 퇴각했지만 남조선 군대가 대거 항복을 한다거나 포로가 되는 상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 조선인민군의 전투행동 준비와 실행 중. 예상 외로 한국군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시가지에서 거세게 저항하자 북한군의 피해도 늘어나고 있었음.


#7. - 오늘 밤 군대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한국군은 한강 남쪽 제방을 고수하고 있고, 서울 북방의 사정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사기는 회복되고 있다. 포를 가진 소규모 한국군이 남산을 지키고 있다. 서울에 진입한 적의 정황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나 한국군 측에서는 30 내지는 40대의 탱크로 추정한다.


50년 6월 28일, 무초 대사의 전황 보고 중. 여전히 한국군은 서울에서 버티고 있었음.


#8. - '이승만 대통령은 어느 누구에게도 현 상황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고, 본인은 오랫동안 이런 상황에 대해서 국민에게 경고하면서 필요하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 막대기와 돌로 싸우라고 호소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50년 6월 25일, 무초 대사와 이승만 대통령 대화록 원문 중. 실제로 옹진반도 전투에서 한국 정부는 17만 도민을 총동원하여 북한군과 맞설 계획을 하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 실제로 500만 여명의 청장년 중 248만에 대한 동원을 시도하기도 함.


#9. - '...우리가 취하는 조치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치열하게 투쟁해야 하고, 초기에 영웅적인 분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50년 6월 25일, 딘 애치슨 국무부 장관이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에. 이 시각 한국군은 애치슨의 말대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영웅적인 분투를 벌이고 있었음. 그러나 2일 뒤, 이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수백 만명이 죽어나갈 비극의 시작이 되었음.


#10. - '제7사단은 절망적인 지휘를 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는 7사단에 대한 KMAG 고문단의 평가. 7사단은 2개 연대에 불과한 병력으로 북한군 주공에 맞서 부대가 궤멸될 때까지 격전을 벌임. 이들은 6,000여 명의 병력이 1,500명으로 줄어들때까지 싸웠으며 대부분이 포천과 동두천, 의정부 그리고 서울에서 목숨을 잃었음.


#11. - '주력부대와 대부분의 차량보급품 및 중화기는 아직도 한강이북에 있었다. 철수를 강요당한 전투부대는 뗏목이나 나룻배로 제멋대로 도강하였기 때문에 전투서열의 유지가 곤란했다. 당시 한국군은 대대훈련을 마쳤고, 비록 소화기로 무장돼 있으나 전투요원들의 개인투지는 충천 왕성했다.


그러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한국군 각 사단은 개전 3일만에 막심한 타격을 받고 반격능력을 상실했다. 초기 작전에서 살기등등한 괴뢰군에 대항하여 한국군은 오직 그들의 선천적인 투쟁심과 애국애족심만이 지연방어전의 전력이었다.'


한강교 폭파에 대한 1970년대 민족의 증언에서 평론한 글. 대부분의 한국군과 경찰 병력들은 서울 사수를 외치며 죽어감.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헌신은 한강교 폭파라는 대가를 치르게 됨.


#12. - '한국군 보병대의 저항이 너무 극렬하여 북한군 보병 단독 전투는 금지하였고, 전차를 앞세워 한국군 보병대를 격파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서울 공방전 중 포로로 잡힌 이의 증언. 실제 서울 시가전에서 한국군은 창동과 미아리가 돌파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개개별 저항을 멈추지 않으며 가능한한 북한군에 피해를 입히고 있었음. 도시 곳곳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및 경찰이 격돌했고 부서진 차량과 장갑차, 심지어 전차들도 버려진 채 서로 피를 흘리고 있었음.


#13. -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국군 병사들은 고성능폭발물을 안고 적 탱크 밑에 뛰어들어가 이 강철의 괴물을 저지하려했다. 적 탱크를 향해 육탄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어떤 병사들은 진격해 오는 적 탱크를 향해 폭약 주머니를 들고 뛰어갔고 어떤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탱크 위에 뛰어 올라가 망치와 도끼로 뚜껑을 부수고, 그 안에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평지에서 그렇게 하여 탱크를 파괴하려는 전술은 사실상 자살 행위였다.


이런 용감한 한국군의 행동으로 몇 대의 적 탱크는 파괴됐지만, 그 대신 숱한 한국군이 죽어 갔다. 그들은 적 탱크의 기관총에 맞아 쓰러지고, 괴뢰군보병의 지원사격에도 쓰러졌다. 약 백여명이 이런 방법으로 죽었을 때, 맨손으로 탱크와 싸울 욕망은 살아남은 병사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1사단은 그 지역에 남아 끝까지 싸워 버티었다. 동쪽에서 참패하여 부득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버티었다.'


T.R. 페런바크의 이런 전쟁 중, 1사단 역시 7사단 못지 않게 격렬하게 북한군에 맞섰다. 이들은 28일 아침까지 문산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는데 성공함. 이들은 약 5,000여 명이 살아남아 한강을 건넘.



-----------------------------------------------------------------


이번에 연재한 수도에 남은 자들 쓰면서 기억에 남았던 증언이나 기록들을 남겨봄. 사실 이거보다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이승만이 말한 '내가 왜 사과하느냐, 당신들이나 사과해라.' 라는 것이지만 서울 방어전의 치열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남기고 싶었기에 따로 적지는 않았음.


묵묵히 전장에 남아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특정인에 대한 옹호로 넘어가는 듯 하여 따로 번외로 다뤄봄.


P.S. 자료를 제공해주신 늑대님과 #4.의 김응섭 옹 증언 자료를 흔쾌히 제공해준 돌도리아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블로그 출처: 네이버 블로그 오로라의 공상.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2239813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