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고통받는 단테

13-14세기에 활약한 이탈리아의 시인,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줄여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지옥(Inferno)” 편에서 등장한다고들 주장을 한다. 자칭 “보수”들은 다소 중립적이거나 온건한 우파들을 까대는 데 이 문구를 사용하고, 자칭 “진보”들은 과격한 행동이나 발언, 혹은 발상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지칭하면서 이 문구를 남발한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옛 선인의 문구를 등장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반대되는 입장의 사람들을 “처단해야 할 대상”, 즉 적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유치한 이분법적 논리에 불과한 셈. 뭐, 사람들은 자기 편을 두고 싶어 하고 또 그 안에서 안주하길 원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 전략은 잘 먹히긴 한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 눈치채셨겠지만, 단테의 지옥에선 저런 문구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근접한 문구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3:35 ~ 42에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가 읊는 한 구절인데, 원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Ed elli a me: Questo misero modo , tegnon l’anime triste di coloroche visser sanza ‘nfamia e sanza lodo, angeli che non furon rebelli ne’ fur fedeli a Dio.

영어로 먼저 번역을 해보도록 하자.

And he (said) to me: “This miserable corridor is taken by the poor souls of those who lived with infamy and without praise, and the angels who were neither rebellious nor loyal to God.”

대충 감이 오지? 자 다시 한글로 번역을 해보자.

그(베르길리우스)가 나에게 말하길: “이 처참한 곳은 오명을 안고 살아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예를 지니지도 않고 살아온,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하지도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 반항을 하지도 않았던, 불쌍한 영혼들과 천사들이 갇혀있는 곳입니다.”

두꺼워 읽지를 않으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부분을 설명함에 있어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이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곳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인 연옥일 뿐이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조차 중립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저 Grey Zone으로 취급했을 뿐(물론 신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쌍한 영혼이라는 취급을 받긴 했지만),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럼, 문제의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는 문구는 도대체 어디서 갑툭튀한 것일까? 혹은 자칭 진보, 혹은 자칭 보수들 중에서 얇은 지식을 가진 인간이 신곡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왜곡한 것일까?

사실은 갑툭튀한 것도, 혹은 얇은 지식으로 각색을 한 것도 아니라, 바로 존 F. 케네디가 1963년, 독일의 행정수도인 본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창설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활동에 대해 선전하고 서유럽 각국의 참여를 호소한 연설의 일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시작은 케네디로부터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단테가 언젠가 말하길,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습니다.”

케네디 때문에 영원히 고통받는 단테

물론, 단테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케네디는 자신의 정치 퍼포먼스를 위하여 단테의 작품을 왜곡했을 뿐이다. 평화봉사단의 활동을 지지해달라는 그의 연설 자체는 상당히 멋진 문구들로 가득차 있지만, 게다가 그의 연설에는 소비에트 진영의 동참은 철저히 배제되어있었으니, 진부한 진영논리를 펼친 셈이다.

어찌 됐든 그의 이 발언은 지금도 케네디 라이브러리에서 쪽쪽 빨아대는 인기 문구로 쓰이고 있고,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인간들이 자주 써먹는 문구가 되기도 했다.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세력을 까대는 데에도 많이 쓰이기도 했고, 매카시즘을 부활시키고 학생운동을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했던 레이건도 자주 써먹었던 문구이기도 하다. 그 반대선상에 있는 진보주의자들과 노동운동가들 역시, 정경유착을 일삼는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을 까대는 데 이 문구를 즐겨 인용했다.

심지어는 성윤리를 논하는 종교인들이나 LGBT 커뮤니티에서도 이 문구를 즐겨 인용하는 것을 좋아라하는데, 인간이란 참. 옛 선인들이 남긴 시나 소설의 한 문구를 인요하는거, 다 좋다. 좋은데, 제발이지 입맛에 맞게 변경하거나 왜곡하지 말아라. 쪽팔린다. 쪽팔린다고!!



p.s.

케네디는 사실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인디애나 주에서 유세를 벌이던 중에도 단테의 신곡에서 발췌했다며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발언을 자신들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인 중립적인 입장을 표방하던 사람들의 표가 죄다 리차드 닉슨에게 몰리는 바람에 케네디는 인디애나 주에서 22만표나 뒤지며 13명의 선거인단 획득에 실패하고 닉슨에게 참패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될 위기에까지 몰린다.

어째저째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케네디의 이 발언은 사실 그가 암살당할때까지 그의 반대파들에 의해 두고 두고 까였다. 그 자신은 자신이 “창조”한 이 문구가 꽤나 맘에 들었는지, 60년의 대통령 선거 뿐만 아니라 63년 평화봉사단 연설, 그리고 그의 수 많은 정치 유세 속에서 자주 인용하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