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가 무도, 검도를 가르쳐 준 아이들이 팀을 짜가지고 일제 때 경관이었던 사람 집을 찾아다니며 장독을 깨고, 소를 끌어가고, 집에 불을 질렀어. 그래서 내가 우리 나이 또래고 너희들 이렇게 할 수 없는 거 아니냐, 우리 동족끼리 왜 그 러나 그러지 말라. 그런 식으로 타이르고 그랬지.

근데 나중에는 얘들한테는 자기들을 배척하는 태도로 보여 가지고, 뭐 날더러 반동분자라고 말이야, 너는 뭔데, 네가 우리보고 해라마라 그러냐 아 이러면서 너도 뭐야 친일파 반동분자인지 모르겠다고 말이지 하면서 덤볐지.

또 그와 동시에 학교에 공산주의 그 평양서부터 그런 그 지령이 내려와 가지고 학교에서도 이러이런 건 못하고 이렇게 하라 하는 이런 제도가 자꾸 번지고 그래서 점점 싫증이 났어요.
-1945년 12월에 월남한 학교 교사 정모씨의 증언(황해 봉산 출신)


2. 군 인민위원회에 가니까 그게 또 무슨 직업을 쓰라고 해요. 쓰는데 직업이 너 부모님 직업이 뭐냐, 부모의 직업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소시민이라고 하죠, 소시민, 소시민, 농민, 노동자 뭐 이런 거 쓰는데 이게 소시민이라는 게 제일 싫어하는, 그 공산당이 제일 싫어하는 거 아녜요. 소시민. 너 소시민인데 뭐야, 글쎄, 저야 뭐 뭐라고 그럴까요. 어물어물하면서,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니까 나는 언제든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데서 어떻게 삽니까.
-1946년 11월에 월남한 일본어 통역관 이모씨의 증언(평남 안주 출생)


3. 3학년 때 월남을 했는데 월남한 그 역사는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농민, 노동자들을 선동을 해서 북한은 공산주의가 이렇게 좋은 거다 하는 것을 선동할 목적으로 토지개혁을 했습니다.

우리는 땅은 얼마 안 되지만 다 뺏기고 집안에 전부 빨간 딱지 다 붙였어요, 나가라 이거예요. 그래서 신의주에 우리 그 인척 되는 분이 계셨는데, 할머니 인척 되는 분이 계셨는데, 거기에 약방을 하셨어요. 거기 가서 조금 지냈는데, 약방 그 할아버지께서 자금을 좀 더 주셔가지고 성냥공장을 했어요.

성냥공장을 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거기에 사장이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이제 그 말하자면 인민위원회에서 사장이 하나 부임해 왔어요. 그러고 우리 아버지께서는 거기 전무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봉급쟁이가 된 거죠. 그래서 도저히 이젠 가정을 먹여 살릴 수도 없게 되었지요.
-1947년 7월 월남한 장모씨의 증언(평북 용천 출생)


4. 소련 아이들이 그 뭐 아주 야만인들이예요. 특히 그 시베리아에 있는 죄수들 갖다가 군대 동원해 왔기 때 문에 그래서 이제 북한에 들어왔던 맨 처음 들어왔던 소련군은 아주 야만적인 행동 많이 했죠.

그래서 저는 이제 그때 나이가 18이라, 우리가 암만 그래도 이남에 내려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해서 그해 12월 10일날에 거 이제 고향 떠나가지고 그렇 게 했지 돈 300엔 돈 이제 가지고서 나 하고 사촌형님뻘 되는 분 허고 둘이 이제 기차 타구서 떠났어요.
-1946년 8월에 월남한 서모씨의 증언(평남 덕천 출생)


5. 나는 아주 열성적인 공산당 청소년이었어요. 근데 하루아침에 학교 갔다 오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민청 대원들에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는 거에요.

나는 몰랐는데, 그 어른들이 아버지 저 안에 있다고 말이야.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나고 그냥 난리가 나고 뭐 이래서, 아니 그 이상하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더라구요. 그래 내가 좀 당찼어. 옛날부터 좀.

그래가지고 문을 활짝 재끼고 들어갔더니 이 나쁜 놈들이 빤스만 입히고 까꾸로 대들보다 매달아놓고, 그 일본 군대 혁대 두꺼운 걸로 물칠 해가지고 때리더라고. 그래서 내가 막 그냥 우리 아버지는 노동자 출신이고, 저 김일성장군께서도 절대 이런 걸 이러지 않고 노동자 농민한테 왜, 왜 그러냐고, 뭐를 잘못해서, 니들 나쁜 놈들이라고 해서 겨우 풀어주었어요.
근데 이 이후에 우리 공장은 그 민청 애들이 관리, 운영했고 우리 아버지는 노동자로 취직이 되었어요.
-1949년 8월에 월남한 최모씨의 증언(강원 평강 출신)


6. 고 넘어오는 과정이, 사십칠(47)년도, 그 46년도, 46년도 추석에, 그 우리 어머니가 보안대에 가서 일주일간 그 구류를 당했다고.

그 이유인즉, 그 남하한 아들들을 북으로 들어오게 하라고 회유, 회유를 하기 위해서 그 일주일을 가뒀었어. 그러다 인제 풀려났어요. 큰 죄가 없으니까. 그러다가 1946(7)년도 그 명절을 앞두고 보름을 우리 어머니를 또 그 보안대에서 붙들어다가 가둬놨다고. 감옥살이지, 감옥살이.

(중략) 우리집에 그 머슴이 바로 아랫집에 살았어요. 하루 는 그 머슴이 이제 우리 어머니를 찾아와서, 그 "마님, 서방님, 도련님들 계신 남쪽으로 가시죠. 제가 그 남쪽으로 갈 수 있게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조건은 뭐냐면, 집안에 있는 것들 뭐 귀중품들 있으면 달라고.

귀중품이 뭐 있어. 그거 뭐 지난번에 조금 언급했지만, 일제 말기에 하다못해 제기까지 놋그릇을 다 공출한다고 해서 압수 해갔다고. 그 해방되면서 반동분자 집안 재산이라고 또 몰수를 해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뭐가 소중해서 가져갔는지 나 지금 기억이 잘 안나요.
-1947년에 월남한 조모씨의 증언(경기 장단 출신)


위의 사례들처럼 북한을 버리고 월남을 선택한 요인은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단순히 서울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였던 사람도 있고,

지주였는데 땅을 순식간에 빼앗겨버려서 살 곳이 없어진 사람도 있고,

북한 공산 체제에서 대놓고 가족들이 박해당하고 고문당해서 넘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반공' 하나로 퉁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북한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곤경을 겪은 사람들이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기 직전 월남을 많이 선택했죠. 어찌보면 분단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인 셈입니다.


출처: 정용욱 외, '구술로 본 한국현대사와 군', 선인, 2020.

윤택림, '구술로 쓰는 역사: 미수복경기도민의 분단과 이산의 삶', 아르케, 2016.



블로그 출처: 네이버 블로그 무수천.

https://m.blog.naver.com/minjune98/222349376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