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20세기 말 일본에서 제작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파격적인 설정과 줄거리 전개, 또 난해한 내용으로 화제를 얻으며 말 그대로 세계를 휘어잡았다. 특히 그 내용과 은유가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에반게리온은 만화 팬덤을 자극했고,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히 ‘에반게리온학’이라고 부를 만큼의 전문적인 해석들이 쏟아져나오며 많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겼다. 특히 에반게리온의 서사는 주인공 ‘이카리 신지’와 주변인물들의 ‘사이코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애니메이션이기에 그 해석에 철학적, 심리학적 방법론이 자주 동원되는데, 이 에반게리온학(?) 보고서에서 역시 여러 철학적 개념과 사조를 통하여 에반게리온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정신의 운동-

사르트르가 그의 사상에서 활용하며 또 유명해진 ‘즉자’와 ‘대자’, 그리고 ‘즉자-대자’의 개념은, 사실 헤겔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헤겔은 정신의 운동을 ‘즉자’에서 ‘대자’를 거쳐 ‘즉자-대자’의 상태가 되는, 정-반-합의 구조를 띤 변증법적인 운동으로 설명하였다.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즉자(Ansich)’, 곧 ‘그 자신’이 되고자 한다. 또 그 즉자는 최초의 정신이자 모든 운동의 출발점이며 목표가 된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즉자는 자신의 본성을 꼭 들어맞게 갖추고 있다. 자신에게 밀착된(Ans ich) 상태인 것이다. 정신이 즉자로 정의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최초의 정신인 ‘즉자’는 타자와의 관계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추상적이고 공허한 상태이다. 그래서 즉자는 자신의 본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무자각성). 이때 이 정신은  자신을 타자화하고 부정하며, 그 타자와 관계를 맺어 ‘대자(Fürsich)’가 된다.


이렇게 자기관련을 깨뜨리고 벗어나 ‘대자’로 정립함으로써, 정신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으로 ‘구분’을 동반한다. 자신과 자신의 구분, 그리고 자신과 타자의 구분이다. 스스로가 성립하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타자를 배제하는 모순적인 운동을 통하여 대자는 ‘자신’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된다. 대자의 상태가 됨으로써 정신은 실제로 운동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자는 정신의 실질적인 운동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즉자’가 결여된 ‘대자’의 운동에는 실체가 없다. 역시 공허한 상태인 것이다. 타자화와 모순적 관계를 통하여 대자는 스스로를 규정하고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조차 타자화하고 부정함으로써 실체를 잃게 된다. 따라서 대자는 이 한계를 극복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대자’ 상태인 정신이 또 다시 자기부정을 거치며 ‘즉자-대자’의 상태가 된다. 즉자와 대자를 모두 정신적인 계기로 받아들인 즉자-대자로서의 정신은, 외화되고 타자화된 자신을 동일한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한다. 타자와의 통일, 타자 속 자신과의 자기동일성을 갖게 되며 자기의식적인 ‘주체’가 된다. 


-‘에반게리온’ 속 신지의 대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초호기에 탑승한 채 희생양으로서 서드 임팩트를 사실상 실행하게 된 이카리 신지와 아야나미 레이의 영혼이 깃든 ‘릴리스’의 대화에서 이 ‘변증법적 정신의 발전’이 드러난다. 사실상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할 법하다.


신지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다. 어머니가 에반게리온 초호기에 탑승한 채 실험을 진행하다 흡수되어 버리고, 자기를 버렸던 아버지에게 불려가 에반게리온에 타며 정신적인 타격을 입고, 사도와의 전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심지어는 명령 때문에 친구를 죽이기까지 하며 신지의 마음은 병적으로 피폐해지고 이는 ‘서드 임팩트’ 시점에서 극에 달한다.


내면에서마저 주변인에게 거부당하는 신지는 패닉에 빠지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죽어 버렸다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내놓는다. 그의 말대로 서드 임팩트를 일으켜 온 인류를 ‘LCL’로 환원시킬 수 있는 레이는 신지를 회유하려고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느냐”라는 신지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며 그를 절망시킨다. 


서드 임팩트가 실행된 세계, 신지는 LCL의 바다 속에서 레이와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눈다. 

모든 인류의 형태가 붕괴해, 근원인 LCL로 환원된 세상. ‘나’는 분명 존재하지만, 무엇이 ‘나’인지 알지 못하는 세상. 모두가 하나이지만 또한 고립된 세상. 신지가 바라던 ‘즉자’의 세상이다. 그러나 신지는 만족하지 못한다. 타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기에 타인이 사라지기를 원했지만, 타인의 존재 없이는 나의 존재 역시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는 애인(?)이었던 레이, 그리고 그의 친구였던 카오루와의 교감을 통해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즉자-대자 존재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TV판의 마지막 화에서도 등장한다. ‘나만이 있는 세계’에 누워서, 신지는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느낌’을, ‘자신이 사라져 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즉자’이다. 곧 이어서 신지는 타인이 없으면 나의 형태 역시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인과의 다름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의 형태를 짓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없는 즉자 존재는 어떤 대상을 타자화하여야만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이 ‘대자’이다. 그러나 ‘나’ 그 자체로서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단지, 타인에 의해서 그것이 형성되고, 또 그 형태를 깨닫고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자-대자 존재’로의 변화다. 


-고슴도치 딜레마-


“칼바람이 쌩쌩 부는 눈밭에서 추위를 피하려는 두 고슴도치가 만났다. 서로의 온기를 확인한 고슴도치 두 마리는 몸을 맞대고 추위를 피하고자 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날카로운 가시가 서로의 살갗을 파고들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픔 때문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추위는 더 강해졌고, 이도저도 못하던 두 고슴도치는 추위에 떨면서도 아픔이 무서워서 선뜻 답을 내지 못하다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지어낸 우화이다. 현대에 와서는 소위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는, 에반게리온의 유명한 사운드트랙의 제목이자, 역시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기도 하다.


만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대학 시절의 미사토는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갈망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으로 방황하다 애인인 카지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다. 신지는 동료 파일럿이자 로맨스의 대상인 아스카와 서로 수많은 상처를 입힌다. 신지의 아버지인 겐도는, ‘인류보완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는 아들을 에바에 태우고, 아들이 자신에게 다가와 아들에게 고통을 줄까봐 두려워 매몰찬 태도로 신지를 대한다. 카오루는 ‘사도’라는 정체를 숨기고 신지에게 접근했고, 씁쓸한 인연과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 


특히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두 인물은 이카리 부자이다. 

결혼 후 아내의 성을 따를 정도의 애처가였던 겐도는 비극적인 실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내의 죽음 이후 만사에 냉소적이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 신지에게도 이는 다르지 않은데, 유이가 죽고 난 뒤 신지를 선생님에게 맡긴 채로 거의 방치해버리고, 처음 등장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는 아들에게  “에바에 타든가, 아니면 꺼져 버려라!”라는 통보를 남기는가 하면 부모 동반 상담에 참석해달라는 아들의 전화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사도에게 침식당한 에바와의 전투를 ‘사람이 타고 있다’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죽으려는 신지의 에바 조종 권한을 뺏어버리고는 강제로 전투에 돌입하게 한다. 나중에 에바에 탄 파일럿이 신지의 친구 ‘토우지’였음이 드러난 다음에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이는 신지가 네르프를 떠나게 만든다.


언뜻 보면 ‘막장 부모’의 전형으로 보이는 겐도의 냉소적인 태도의 계기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드러나는데, 서드 임팩트가 벌어지고 죽기 전 아내 유이의 환영을 본 겐도는 그녀에게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아이에게는 고통이 될 것이 뻔하다. 차라리 다가가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들이 탄 초호기에 잡아먹히기 전에는 체념한 듯 초호기 안의 아들에게 사과한다. 


한편 신지 역시 ‘고슴도치’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신지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에바 파일럿이라는 이유로 ‘토우지’에게 구타를 당해도, 미사토의 부탁으로 집안일을 전부 떠맡게 되어도 쉽사리 불평을 하지 못하고, 이런 성격은 주변인들의 걱정을 사며 아스카에게는 ‘바보’라고 멸시당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인물상과는 별개로, 신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에바에 탄 채로 전투를 벌이다 토우지의 동생을 다치게 해 구타를 당하거나, 인정욕구와 자존감이 극도로 높은 아스카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으로 인한 상처를 입히거나, 친한 친구가 된 토우지를 다치게 하거나, 친구 이상의 관계였던 카오루를 자기 손으로 죽인다거나 말이다. 특히 아르미사엘과의 전투에서 정신공격을 당해 정신병자와 같은 상태가 된 아스카에게 “무사해서 다행이다.”라는, 자기 나름의 위로의 말을 건네 오히려 아스카의 정신적 붕괴를 조장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아스카 팬들에게 안타까운 장면으로 회자된다.


이렇게, 이카리 부자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상처를 받으면서 스스로의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그것이 겐도에게 있어서는 ‘인류보완계획’을 통해 신지와 함께 초호기에 흡수된 유이와 재회하고자 하는 강렬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신지에게 있어서는 ‘무기력함’으로 대표되는 신지의 캐릭터성으로 나타나며, 이는 이후 진행되는 서드 임팩트 상황에서 ‘정신적 성숙’과 ‘세계의 재건’이라는 결말로 나아가는 하나의 매개가 된다.


겐도의 유이에 대한 집착은 결국 서드 임팩트라는 사건을 불러일으키고, 겐도 자신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다. 겐도는 하반신만 남기고 초호기에게 잡아먹히며 인류보완계획에서 탈락된 채 죽음을 맞는다. 이를 작품 내적으로는 ‘초호기에 깃든 유이의 분노’ 내지는 ‘신지의 복수 욕구 분출’로 보기도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강조되는 ‘즉자-대자 존재로의 성장’, ‘타인과의 공존을 통한 자아 형성’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살펴볼 때 끝까지 마음을 열지 못한 겐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법하다. 그렇게 타인과의 접촉을 끝끝내 거부한 겐도의 내면은 마지막까지 성숙을 이루지 못한 채 ‘무자각’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인류보완계획과 인간의 실존-


‘인류보완계획’. 에반게리온 내에서 질리도록 들리는 단어이다. 인류는 침입자이자 방탕한 사도인 릴리스의 피에서 태어난, 그 자체로 하나의 사도이다. 지구의 정당하지 못한 주인이다. 침입자이다. 따라서 릴리스를 살해하고 인류가 LCL로 돌아가는, 한마디로 ‘자살’을 통해 그 죄를 속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최초의 입안자였던 ‘이카리 유이’의 계획은 조금 다른데, 이는 “인류는 태어난 이상 행복할 권리가 있고, 살아있다면 어디서든 행복을 찾을 수 있다.”라는 그녀의 사상에 기반한다.  그러나 릴리스가 직접 낳은 것도 아니고, 그녀의 피에서 태어났을 뿐인 인간은 기본적으로 너무도 불완전하기에, 필멸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었고, 바로 그것을 해결하고자 인류의 혼이 깃들게 될 그릇인 초호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살아야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영생불멸의 그릇’을 만들어 모든 인간을 한 데 합치면, 살아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두가 하나로 합쳐진 세상에는 절망도 갈등도 전쟁도 기아도 없다. 죽음의 공포도 없다. 그러나 그곳에는 ‘인간’도 없다.


‘왜 우리는 사도와 싸워야만 하는가’라는 신지의 질문에 대한 아스카의 답은 간단하다. 


“정체모를 놈들이 우리 인간을 없애려고 하고 있으니, 싸우는 게 당연하잖아? 너 바보니?” 


‘인류구원’이라는, 만들어낸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수십, 수백, 수천만 명의 인류를 희생해야만 한다. 어른들이 만든 대의를 위해서 세 명의 파일럿은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러나 ‘인류보완계획’이라는 대의는 그들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이유를 대며 싸움을 합리화한다. 아스카는 ‘당연한 일'이니까, 신지는 ‘아버지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그리고 레이는 ‘이카리 사령관의 명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그렇다. 미국은 ‘테러’, 그리고 ‘악의 축’을 몰아내고 세계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도처에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수십만 명의 미국인이 죽는다. 북한은 ‘미제 침략자들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그들이 ‘숭고하다’라고 말하는 이 이념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력하게 죽는다. 에반게리온 속 파일럿들과 제3도쿄시의 시민들처럼 말이다. 


결국, 이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개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개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상과 관념이 떠난 자리에는 ‘내’가 남는 것이다. 나의 체험과 선택이야말로 나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s)다.” 이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이다.


실제로, 에반게리온 내에서 ‘실존’에 대한 갈망은 끊임없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명한 대의의 실현 앞에서 공허함과 무기력함에 사로잡힌 신지에게 '선택’을 부르짖는 미사토, 그 가운데서 의미를 찾아가는 신지의 모습에서 특히 뚜렷이 나타난다. 


레이는 기억을 잃고, 미사토는 애인 카지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지고, 아스카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폐인이 된 현실에서 극도의 무력함에 빠진 신지에게 미사토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무슨 어리광을 부리는 거야? 너, 아직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똑바로 살고, 그 다음에 죽어!” 


유명한 ‘어른의 키스’ 장면에서도, 신지에게 ‘실존'을 일깨우려는 미사토가 등장한다. “...지금의 자신이 절대적인 게 아냐. 나중에 잘못한 걸 깨닫고 후회해. 난 그걸 반복해 왔어. 헛된 기쁨과 자기 혐오를 거듭할 뿐이야. 그치만, 그 때마다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 들었어.”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헌 세계의 파괴가 수반된다. 개인 밖의 이상과 관념이 부재한 상태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또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은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오히려 ‘실존’에 대한 강렬한 부르짖음과 갈망을 느꼈다. 


보완계획을 거부하고 ‘살아있기를' 선택한 신지는 정말 세계로 돌아온다. 모든 것이 부수어진 세계, 텅 비어있는 듯한 세계. 그러나 신지는 혼자가 아니다. 그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생, ‘존재'에 대한 갈망이 뚜렷한 아스카가 있다. 그리고 둘 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다시 세상에 돌아왔을 것이다. 안노 감독은 ‘세상에 나아가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실존’에 대한 그의 철학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결론-


내가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사실, 그때는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고찰에 흥미를 느꼈다기보다는 ‘캐릭터가 예뻐서', ‘유명한 만화라서' 흥미가 동했다. 그러나 만화를 볼수록,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 만화는 내가 생각한 만큼 가벼운 만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충격적인 서사들은 어린 나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에반게리온을 본 이후로 나는 만화영화를 전혀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약 5년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의 철학적 지식을 갖게 된 이후 에반게리온을 다시 보며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감독은 그저 ‘오락용’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오락용으로 만든 물건에서 의외의 쓸모를 찾아보는 것도 꽤나 유익하고 재미있는 일인 듯하다.


에반게리온에는 이외에도 자잘한 장면들과 설정들에 많은 철학적 메타포가 숨어 있으나, 이 보고서에서는 우선 굵직한 주제들만 다루었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른 이야기의 전개와,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허무주의’를 적절히 섞은 이야기를 꿰뚫는 주제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밖의 세계를 두려워한다.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버려질까 봐, 상처를 받고, 실망하고, 고슴도치의 가시에 찔려 우리는 몸을 웅크리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러나 헤겔이, 쇼펜하우어가, 사르트르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는, 현실도피를 멈추고 단호한 선택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살 수 없다. 사람이 될 수 없다.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그런 우리에게 위로와 따끔한 충고를 함께 건넨다. 마치 신지를 대하는 미사토처럼 말이다. 세상이 두려울 때, 결정하는 것이 어려울 때, 그런 사람들에게 이 만화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