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이전부터 평소 교육훈련, 진지공사 등을 철저히 하여 전투에 대비하였으며, 귀순한 북한병(자주포병)으로 부터 북한이 조만간 전면 남침을 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그외 여러가지 좋지 않은 정황을 포착하여 육군본부에 보고하지만 육군본부가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하자 6사단 지휘관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개전 직후 국군의 사단들이 연달아 패전하며 북한군의 공격에 패주를 거듭할 때도 6사단만은 김종오 사단장의 직권으로 사단의 외출, 외박을 제한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덕분에 춘천-홍천 전투에서 소양강과 말고개 등 험준한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3일간 북한군 제2군단의 2사단과 7사단, 106 전차연대의 공격을 저지하며, 오히려 역습을 노릴 정도로 훌륭하게 방어전에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15사단과 603모터찌크(싸이클)연대를 추가 배치하며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닷새 동안이나 발목을 잡혀있어야만 했다. 그 결과 북한군 2사단은 40%에 달하는 인력과 장비를 잃으며 전멸하였고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 2사단장 이청송, 7사단장 전우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북한 7사단은 12사단으로 서수가 바뀌었다. 6사단의 사상자는 407명이었고 인민군 제2군단의 사상자는 6,900여명이었으며, 다수의 전차와 자주포가 격파되었다.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6사단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6사단은 제자리를 훌륭하게 지켜내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유일하게 6사단만이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후방 북한군 전력에 의해 포위당할 우려도 있었고, 전선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6사단도 후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던 것이다. 6사단의 초기 활약은 북한군의 전략에 큰 차질을 불러왔다. 북한군은 춘천 점령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전 전선에서 남하가 지체되었으며 이로인해 단시간에 서울을 포위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은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국군의 재편성을 통해 저지선을 확보할 시간 벌 수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의 재정비를 허용함으로서 UN군이 참전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바로 한국전쟁 당시의 6사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