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제국군의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군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기동하고 분단시켜 임시 수적 우위로 적을 각개격파한다'라는 나폴레옹의 방식은, 기동을 통한 적 주력 섬멸과 이를 통한 적 전쟁 수행 의지의 종결이 곧 전쟁 승리를 위한 정석적 방식이 되리라는 점을 프로이센인들에게 시사하였다. 즉 프로이센/독일식 기동전이란 초기적 근현대 기동전을 이미 선보였던 나폴레옹의 프랑스1제국군에게 수도인 베를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당하는 비싼 대가 이후로 도출시킨 결론이었고 이후 프로이센/독일 군부는 '기동하고 돌파하고 분단시켜 섬멸한다'라는 프로이센/독일식 기동전 이론을 철저히 신봉하였다. 나폴레옹 전쟁기 종식에서 보불전쟁 발발 직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기간 동안 다른 유럽 국가 군부들이 '전쟁은 과학이다'라는 군사 철학을 발전시킬 때에도 유독 프로이센 왕국 군부만은 '전쟁은 예술이다'라는 군사 철학을 발전시키는 차이 역시 나폴레옹 전쟁을 통한 프로이센 측의 전훈 분석에 기반한 것이다.





2. 나폴레옹 전쟁에서 보불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 흐름 속에서 프랑스 왕국/2제국/공화국 군부는 종래의 공세 교리인 '퓌리 드 프랑세즈'를 폐기하였고 새로이 '푸 드 바타용'이라는 교리를 확보하였다. 즉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이를 통해 화기의 위력과 사거리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비해서 훨씬 압도적인 수준으로 진보하였으므로, 프랑스 군부 인사들은 '사거리의 증대와 정밀성의 향상을 통해 막강한 살상력을 확보한 최신 화기의 대량 확보 및 이를 통한 사전 계획의 수립을 통하여 전선 단위에서의 우세성을 확보함으로써 이를 통해 총체적인 우세를 점하면 승리한다.'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군사 철학 : '전쟁은 과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 공화국의 푸 드 바타용 관점 및 군사 철학은, 보불전쟁에서 '기동하고 돌파하고 분단하여 섬멸한다'를 구현해낸 프로이센식 기동전과 프로이센 군사 철학에 철저히 분쇄되었으며 프랑스인들은 파리에서의 프로이센군의 행진과 독일 제국의 건립이라는 큰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3. '엘랑'은 인터넷의 떠도는 대중 낭설들과는 달리, 프랑스에서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교리 개념같은 것이 아니다. 근현대 프랑스 공화국군의 '엘랑' 내지 '엘랑 비탈'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프로이센/독일식 보병 정신론을 수입한 프랑스가 그 정신을 프랑스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독일 제국군, 그리고 그 전신인 프로이센 왕국군은 보병의 전투 의지, 정신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기동전을 위해서는 의지를 가지고 대담하게 나아가는 보병들의 광신적인 전투 의지, 공세 의지, 기동 의지가 그야말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총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관점의 푸 드 바타용('보병은 사전에 계획된 선상에서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이 보불전쟁에서 분쇄당한 프랑스 공화국 군부는 프로이센/독일식의 '나 없이는 총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정신론과 이를 통한 프로이센/독일식 기동전이 다가올 현대전의 정답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자존심 상 이를 프로이센/독일 군부로부터 수입한 것이라는 말은 안했지만 어쨌건 프로이센/독일로부터 이를 그대로 직수입한 것이다.





4. 위의 대목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1차대전 시기의 프랑스 공화국군과 독일 제국군은 모두 기동전을 통한 승리를 추구하였다. 두 국가의 군부 모두 '기동하고 돌파하여 분단시켜 섬멸한다'라는 개념에 기반한 공세를 감행하였으며, 고속 기동과 시간 엄수를 승리의 필수 요소라고 간주하였다. 다만 보불전쟁 시기와는 달리 적어도 1차대전 중엽까지는 이러한 기동전은 빠른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1차대전기는 보불전쟁기 시절에 비해 참호 및 진지 구축 기술과 기관총의 수준이 월등히 발전한 시점이었으나 이를 돌파케할 기술력은 그에 상응할 정도로 따라오진 못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모두 보병들에게 공세 의지를 강조하고 기동전을 위한 첫 시점인 '기동과 돌파'를 감행하였지만 참호와 기관총을 동원한 필사적인 방어에 서로 돈좌되었다. 양 측은 서로 참호를 파며 방어와 함께 끊임없는 공세를 반복하였으나, '분단과 섬멸' 페이즈로 넘어가게 해줄 돌파를 성공시키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2차대전기에서야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고 신뢰성과 성능이 모두 출중한 전차들이 돌파를 성공케해줄 수 있었지만 1차대전기 중엽까지는 돌파를 위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상대보다 더 강력한 화력의 대포 포대들을 통한 집중된, 그리고 효율적으로 구사된 효력사' 뿐이었다.





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세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 '공세는 방어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행해야하는 선제 조건'이 되었다. 왜냐하면 독일 쪽이건 프랑스 쪽이건 영국 쪽이건 방자가 참호를 파고 공세 의지를 저버린 채로 방어로만 일관해봤자 이는 공자 측이 반복된 효력사와 항공 정찰을 동원한 공세 끝에 해당 전술 구역에서의 완전한 주도권을 가지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도권을 온전히 쥔 공자 측은 방자 측의 최대 약점 지점을 파악하여 이 최대 약점 지점에 최적화된 공세 시간과 공세 방향을 설정하고 결정적인 공세를 가하게 되며 그러한 전술 상황에서 방자는 반드시 공자에게 압도당하였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서부전선에서의 공세 행위는 무의미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지키기만 하면 되었는데 쓸데없이 '엘랑'했다고 떠드는 이들은 무지에서 기인하여 당시 상황을 완벽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건데, '제대로 된 방어를 하려면 먼저 우세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공격을 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있었던 것이 바로 1차대전이다.





6. 다만 1차대전 초기 프랑스 군부 인사들은 비록 제반 교리는 독일에서 베껴오기는 했어도 독일 군부와는 달리, 작전술 단위와 전술 단위를 세분화하여 구분한다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즉 프랑스 군부는 온전하게 프로이센/독일 군부의 퀄리티를 처음부터 따라잡고 시작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당시의 프랑스 군부 정도라면 독일과 영국에 비해 이런 관점에서 미흡하고 모자랐다는 것이지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그리고 아직은 유럽 주요 열강 육군 군부들에 비하기에는 미흡한 수준이었던 미국 군부에 비해서는 훨씬 고도로 숙련된 집단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군의 상대는 러시아, 오헝, 미국이 아니라 당시 세계 최강(양적 질적 모두)의 육군 수준을 자랑하던 독일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1차대전 초기 프랑스 군부 인사들 대다수가 전술 단위의 관점을 그대로 작전술 단위의 관점에 대입하여 작전을 설계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채로 독일군과 맞섰고 이는 1차대전 초중기 많은 프랑스 군인들의 불운한, 그리고 불필요한 희생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등 프랑스 군부 측의 명장들은 이러한 실책을 깨닫고 점차 작전술과 전술을 분리하여 설계하기 시작하였고 1차대전 후반부에 이르면 프랑스 군부의 작전술 수준은 충분히 훌륭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간주되지만 어쨌건 전쟁 초반부에는 그 자신들의 미흡함을 독일군에게 찔려 불필요한 출혈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다만 이 전쟁 초반부의 프랑스군의 출혈 문제는 그 원인이 작전술/전술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포병 전력이 열세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술 차원에서의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그 제반교리 기조에 따른 방식의 차이가 거의 없으며 따라서 단지, 1916년 전까지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대포 수량이건 탄약 수량이건 간에 열세였기에 이러한 화력적 열세가 1914~1915년의 인명손실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력 열세의 문제는 프랑스 군수산업 생산력이 1916년에 궤도에 오르고, 또한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프랑스군을 대거 지원하면서 해소되었다고 여겨진다.)





7. 보불전쟁 때 패한 프랑스 측이 프로이센/독일식 기동전, 정신론을 베껴오기는 했지만 1차대전이 시작하면서부터는 양 측의 교리 발전상이란 상호 간에 베끼고 자시고 할 것이 없이 계속 치고 받으면서 알아서 제각기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돌파가 쉽지 않자 프랑스와 독일 군부는 제각기 기동침투와 종심 개념의 교리를 가다듬었고 그 시기는 비슷하다. 프랑스 측의 느뚜아외흐 드 트랑셰, 독일 측의 후티어는 모두 기동침투에 관련된 군사교리이다. 둘 모두 기동전에 기반한 침투 전술을 개발하고 구사하였지만 세부적으로는 차이도 존재한다. 프랑스 군부는 초기의 실수를 만회하는 방향성 하에서 최대한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짜여진 작전술과 전술에 기반한 '체계적 공세'를 주장하였고 독일 군부는 그보다는 현장 재량권에 기반한 '신속한 임기응변'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을 보였다.(독일 군부의 이러한 현장 판단 재량 및 임기응변에 대한 강조는 나폴레옹 전쟁 직후부터 프로이센 왕국 군부를 관통하는 '전쟁은 예술이다'라는 군사 철학에서부터 기반하는 것이다.)





8.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방식에 대해 모두 비판적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1차대전 발발 직후의 독일과 프랑스의 제반 교리는 사실상 거의 같은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군 군부가 추구하던 관점은, 보불전쟁 시절 프랑스군의 '푸 드 바타용'에 차라리 더 가깝다면 가까울 것이다.(온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다. 1차대전기 영국군은 프랑스군, 독일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점진적 접근을 추구한 것 뿐이지 결국 결정적 승리를 쥐려면 공세와 돌파는 필요할 때에는 해야한다고 믿었다.) 영국군은 전 전선 단위에서의 화력 우세를 통한 점진적 전진 및 재구축에 강력한 중점을 두었다. 다만 영국에서도 J.F.C 풀러(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 일명 보니 풀러)나 리델 하트처럼 기동전을 주장하던 군인/군사학자 역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풀러/리델 하트가 주장했던 '영국식 기동전'은 독일군, 프랑스군의 기동전과는 관점이 다르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추구하던 기동전이 말하자면, '전선 연속전투 상황에서 기동하여 돌파와 분단을 성공시키고 이를 통해 적 주력을 섬멸할 때에 적의 전쟁 수행 의지에 총체적 타격을 준다.'고 보았다면 영국군의 풀러, 하트 등은 '프랑스나 독일이 시도하는 기동전이란 어디까지나 작전술, 전술 단위 내로 기동하여 적 전선 병력을 섬멸하는 것 뿐이며 이는 국가체의 전쟁 수행 의지를 온전히 끊어낼 수 없는 행위이다. 오직 일시적인 효과만을 줄 뿐이다. 기동전을 감행하여 주공이 타격하는 것은 적 수뇌 또는 핵심 거점 등의 중추신경계에 해당하는 부분이어야하며 이를 통해 적은 총체적인 마비 현상을 겪게 되고 따라서 마비되고 경직된 전선의 적 주력은 고스란히 전선의 아군 병력에게 무력화된다.'는 '간접접근론'을 주장하였다.





9. 대중매체 등 세간에서의 인식(2차대전에서의 이미지 때문에)과는 달리 참호를 가장 열심히, 가장 정교하게, 가장 광대하게 구축한 것은 독일이었고, 그 다음이 영국, 제일 낮은 수준이 프랑스였다.(물론 서부전선에서의 얘기이고 프랑스의 참호 구축 퀄리티는 오헝, 러시아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동부전선은 애초에 서부전선과는 전장 양상 자체가 다르기는 했다.) 그 이유라자면 프랑스 군부의 경우, 프랑스군 교리 관념에 있어서 참호는 어디까지나 시간벌이용이자 기동을 위한 보병들의 발판대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의 경우, 독일 군부 측은 1차대전기 초엽을 넘기고 중엽에 들어서면서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전쟁이 극도로 지지부진해지고(독일 제국/오헝 제국 군부들의 초기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개전 직후 아무리 길게 걸려도 3달 내로 프랑스군을 완파하고 있어야 했다. 영국군이 전격 참전한 이후부터는 상황이 골치 아파지므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돕기 전에 프랑스군을 부수고 영국군이 우물쭈물하는 와중에 러시아군을 밀어버려야 시간적으로 순회 격파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세한 영국 해군에게 제해권에서 밀리는 등 전쟁 지속 역량에의 심각한 과부하를 떠앉자 독일 자체의 우수한 공업, 산업력을 기반으로 일단 참호를 매우 정교하고도 광범위하게 구축하여 영불 군세의 대공세를 돈좌시킬 가능성을 최대화시킨 다음 그들의 대공세가 돈좌될 때에 준비시킨 병력으로 최대한 빠른 속도의 '역습 기동'을 펼치려는 사고를 한 것이다.





10. 일반적인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화력 우세에 기반한 점진적 전진을 꾀하던 영국군의 독일 제국군을 상대로 하는 각 전투 당 교환비는 딱히 프랑스에 비해 뛰어나지 않았다. 각 전투 단위의 교환비로 미루어 볼 때에 영국군의 점진적 전진 및 화력우세는 프랑스군의 기동전 개념에 비해 교환비적 안정성을 더 우월하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다만 1차대전 전체 사상률을 놓고 보는 교환비 면에서는 여전히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독일군을 상대로 더 좋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프랑스군의 초기(1914~1915) 병력 손실이 컸고 반면 서부전선에서 영국 주력군의 배치(1916)가 프랑스 주력군의 배치에 비해 늦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중후기 이후부터 프랑스군의 전투 당 교환비 및 전술 단위의 성과는 협상국 소속 군세들 중에서도 가장 준수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와 독일이 1:1로 싸웠다면 전력적으로 훨씬 열세에 있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종국에는 패하거나 혹은 다소 불리한 평화 협정을 강요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것에 영국군의 도움이 컸다는 것은 부정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도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커버할 수가 없는 전선들(제해권, 아프리카-중동 식민지 방면 전선 등)을 다방면으로 커버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통해 프랑스군이 서부전선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영국이 1차대전에서 프랑스와 함께 협상국 승리의 양대산맥으로써 입지를 가진다고 평가받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11. 영국군은 그레이트 브리튼 왕립포병대의 압도적인 화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세계 최고 수준으로 광대하고도 정교한 참호를 전선 단위에서 광범위하게 돌파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이에 '전차'를 개발하여 전차와 함께 나아가 보병 사상률을 최소화하면서 독일 제국군 참호를 하나하나 장악하는 개념을 고안하였다. 영국의 동맹인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광대한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페르디낭 포슈를 중심으로 항공단과 육군의 합동기동전, 즉 공지전투/제병합동 개념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12. 영국군이 만들어낸 MK 시리즈들의 시속은 보병들의 평균 보행 속도와 유사하였기에(1차대전 영국 MK 시리즈 중 가장 많이 양산된 MK.IV의 최대 시속은 6.4km이다. 성인 남성 평균 보행 속도는 시속 4.8km이다. 걸음 빠르다하는 사람들은 시속 5.5km~6km 가량은 된다. 여담이지만 세계구 프로 경보 선수들의 평균 보행 시속은 15km이다.) 기동전을 추구하던 프랑스군이나 독일군으로써는 지나치게 느린 전쟁 병기였다. 물론 총알을 튕겨내는 강철 장갑의 괴수였기에 보병 사상률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이었으므로 프랑스와 독일 모두 영국군의 전차를 보고 자신들도 곧장 연구에 착수하여 시제품을 1917년도에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모두 기동전을 추구하는 그들의 교리 관점 상 영국군과는 달리 느려터진데다 신뢰성마저 처참한 수준이던 1차대전 전차들을 곧장 양산해서 쓰려고 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공세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것은 곧 공세 상황 중에 오히려 적의 측면 역습을 유도할 위험성을 증대시킨다는 의미와도 같았기에 독일 군부건 프랑스 군부건 단순히 강철 장갑을 통한 보병 사상률 감소라는 탁상 위에서의 이론만을 보고 느려터진 시제품 전차들을 곧장 양산해 투입할 수는 없었다.





13. 독일 제국 군부의 지휘관 중 한 사람이자 고위 인사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전차를 만들 시간에 항공기와 차량 생산에나 더 집중하라'라는 식으로 전차에 시큰둥해했던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1차대전 독일군은 A7V 등의 그 자신들만의 전차들을 연구해 만들어 보기는 했어도 딱히 전차에 대해 많은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독일 군부의 기동전 교리에 맞추기에는 1차대전기 기술에 기반한 전차들은 지나치게 느리고 신뢰성이 좋지 않았다.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투입했던 첫 MK 시리즈 전차 50대 중 무려 절반이 독일군 참호에 미처 닿기도 전에 고장이 나며 퍼져버린 것은 대표적인 예시이다. 한편 독일과 마찬가지로 기동전 교리를 신봉하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을 상대로 일대일 상황에서는 산업력과 인력이 밀리는 입장이던 프랑스 측의 경우에는 독일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단서는 기술적 우위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독일과는 달리 자체 전차 연구에 대량의 재원을 지속적으로 투자하였으며 1917년 5월에 자체 개발한 생샤몽 전차 16대를 투입하는 실험전을 펼치기도 하였다.(물론 이 역시 독일군 참호에 걸려 허우적거리다 15대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로 격파되면서 독일 군부의 '전차는 아직은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라는 믿음을 더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전차가 최소한의 신뢰성을 담보해주며 퍼지지 않고 참호를 돌파하고 제 때에 보병을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은 1918년 프랑스 측이 마침내 르노 FT 시리즈를 발명하여 양산 및 투입시킨 뒤의 얘기이다.





14. 미군이 와서야 간신히 협상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이 승리하게 된 것이라는 세간 대중들의 잘못된 인식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1918년에 이르러서 영국군과 함께 독일 제국군의 최후의 발악이었던 춘계공세를 4차례까지 알아서 막아내었고 사실상 미군이 오기도 전에 독일군의 패색은 대단히 짙어진 상황이었다.(물론 이는 전쟁 다 끝난 뒤 전황을 재검토하면서 나오는 결과론적인 얘기이고 당시 독일 군부는 영불에게 절실히 필요하던 '인력'을 미국이 충분히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 오기 전에 어떻게든 영불 때려잡고 전쟁 끝내야한다는 식으로, 미군이 언제 오느냐에 초점을 잡고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다. 즉 미국의 존재감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영불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이며 독일은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당시 프랑스는 국가 산업의 상당 비중을 군수산업으로 전환하여(그러나 프랑스라는 국가 체급에 맞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확대된 군수산업과 이를 다시 민간경제로 재전환해야했던 전후 프랑스의 상황은 전간기 시기 그들의 경제, 사회에 치명적인 악영향과 혼란을 끼쳤다.) 1918년에는 거의 독일 제국에 근접한 수준으로 군수 산업 규모가 확대된 상태였던데다, 프랑스는 독일과는 달리 영국이라는, 제해권을 담보해주는 동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자원 수급에 큰 문제가 없었기에 프랑스의 실질적인 군수 생산 능력은 1918년에는 독일을 초과했다는 평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군은 루마니아군 잔당, 세르비아군 잔당, 그리스군, 이탈리아군에다 심지어 춘계공세의 마지막인 5차 공세 때에 도착한 미군까지도 자국 병기로 무장시키고도 남는 수준으로 군수물자를 뽑아내고 있었다. 동시에 영국군은 이미 중동전선을 거의 정리하고 유럽 전선에 병력을 더 투입할 기세였으며, 이탈리아 왕국군은 프랑스, 영국의 물자 및 지원병이라는 도움에 힘 입어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비토리오 베네토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이미 전황은 미군이 없었더라도 협상국 측의 승기로 기울어있었다. 따라서 미군이 오지 않았더라도 아마도 이탈리아/발칸 방면 영국군, 이탈리아군, 세르비아-루마니아-그리스 잔당군의 북진과 프랑스군의 합동 역습을 받으면서 이미 사실상 너덜거리는 판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독일도 결국 그대로 밀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면 동맹국 측이 패하더라도 어쨌건 전쟁 기간은 1919년까지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어찌 되었건 실제 미군이 기동 공세를 감행하는 선봉 역할의 프랑스군 뒤를 받쳐주는, 인력 확충 및 전선 강화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으므로 이러한 미군이 없었다면 영불의 반격과 공세가 더뎌졌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15. 1918년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공화국군은 각 전투 당 평균 교환비에서 드디어 독일 제국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한다. 그리고 1차대전 통틀어서 세계 최강이던 그 독일 제국군을 상대로 평균 교환비 우세를 일시적으로라도 점한 국가는 프랑스군 밖에 없었다. 이는 페르디낭 포슈가 계속해서 연구했던 공지전투/제병합동에 기반한 공세 교리가 완전히 완성된 시점이었으며, 동시에 르노 FT 시리즈 등, 프랑스가 추구하던 기동전에 걸맞는 속도와 신뢰성을 갖춘 최초의 회전포탑 전차들이 전선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부터 프랑스군은 독일군보다 상대적으로 수적 열세에 있었고 또한 독일 측의 참호 수준이 프랑스 측의 참호 수준보다 훨씬 우월했음에도 비교적 우세한 교환비를 내면서 독일군을 분쇄하며 진격할 수 있었다.(백일전투) 1차대전 종전 후, 훗날 2차대전 나치독일군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하인츠 구데리안은 이 시기의 프랑스군 제병합동 공세 교리를 분석하였으며 '기갑을 독일식 기동전에 추가하는 방안'과 관련된 논문을 작성 및 제출하였다.





16. 아이러니하게도 1차대전 종전 후, 전간기와 2차대전 직전 시점에 이르는 동안 '군사 교리를 바꾼 국가'는 세간의 인식과는 정반대로 바로 프랑스였다. 독일 군부는 비록 1차대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프로이센/독일식 기동전이 틀렸다고는 생각치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들이 세운 여러 용전의 전과들과 숙적 프랑스의 분전 및 발전상을 고려할 때에 기동전은 현대전의 효시로써 여전히 신뢰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독일 군부는 구데리안 등 소장파들의 의견까지 겸하여 1차대전 막바지 프랑스군이 선보였던 기갑을 첨부한 기동전 개념을 전간기/2차대전기의 독일 국방군 체제 내에 최대한 극대화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프랑스 군부는 기동전을 자체 폐기하였고 그 유명한 '마지노선'으로 대변되는 강력한 요새선 확보 및 이에 의존하는 진지전 교리를 수립하였다. 즉 막강한 요새에 의존하여 적의 공세를 일단 요새를 통해 방어하고 이후 역습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반대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군부에 대한 독일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인식 차이가 큰 역할을 끼친다. 징고이즘/군국주의적 정서가 팽배했던 독일 사회에서는 수백만 젊은이들이 갈려나가기는 했어도 여전히 군부의 장성들은 '국가의 훌륭한 어르신들'이자 '용맹한 독일인의 표상'으로 대체로 인식되었으므로 젊은이들이 갈려나간 것에 대해 군부 장성들을 비난하려는 민중의 사회적 여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과거 나폴레옹 1세~3세 시절의 광기어린 내셔널리즘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는 사회적 양상 하에서 군국주의와도 거리가 다소 멀던 사회 분위기를 가진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이 프랑스 군사 교리의 실제 효과가 얼마나 출중했건 간에 상관없이 일단 외견적으로 볼 때에 '장군들의 명령으로 갈려나갔다'는 점에 있어서 민중은 군부를 '꼰대'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즉 민중의 프랑스 군부에 대한 분노는 그것이 제아무리 비합리적일지라도 심각하게 발현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정치권과 민중의 기존 프랑스 군부와 그들의 교리에 대한 무분별한 맹비난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몰려버린 상황에서 프랑스 군부 인사들은 프랑스 민중의 의지를 따를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요구에 입각해 '피해가 덜 나올 수도 있는' 새로운 교리를 짜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바로 마지노선으로 대표되는 요새방어전, 바로 2차대전기 프랑스군의 '새로운' 군사 교리였다.



* " [교리를 합리적인 양상으로 바꾸어낸] 프랑스군이 [옛 교리에 비합리적으로 매달리는]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할 것이다. - 영국 군사학자 리델 하트의 1939년 발언





여담 1) 1차대전기의 능동적인 교리를 완전히 폐기하고 전간기를 거치며 2차대전에서 수동적인 요새전 교리를 '군사 비전문가들인 민중의 요구에 의해' 설립한 프랑스군의 당시 상황은, 러시아의 정권을 전위사회주의자들이 확보한 직후 적백내전이 발발하던 당시 여러 사회주의자 당원들과 노동자 민중들이 소련 군대를 '지휘관은 당원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마르크스 사회주의 이론에 기반한 완전히 새로운 군사 교리에 기반하여' 총체적으로 재구성해야한다는 헛소리들을 주장해대던 상황과 대단히 유사해보인다. 다만 전간기 프랑스와 소련의 차이라자면, 소련의 경우에는 레프 트로츠키가 "닥쳐! 전쟁은 검증된 방식에 기반해야해!"라고 일갈하며 비전문가들의 그런 헛소리들을 일축시켰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물론 프랑스 군부의 요새전 교리로의 선회는 프랑스 대중 및 정치권의 압박 및 주장에서 기인한 요소가 크긴 했어도, 최소한 '당원 투표로 지휘관을 선출하자,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완전히 새로운 군사 교리를 만들자'라는 사회주의 대중 집단의 헛소리들에 비하자면 훨씬 합리적인 것이기는 하였다. 따라서 1차대전 종전 이후의 프랑스 대중들이 러시아 사회주의자 대중들처럼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군사관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2차대전의 프랑스 군부는 1차대전에서의 능동성을 버리고 스스로 수동적인 교리의 군대가 되어버렸지만 최소한 그 요새전 교리가 가져다주는 효력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2차대전 직전의 프랑스 군부는 강력한 요새를 피해 우회하는 적 주공에 대한 예비대 투입을 통한 돈좌 및 반격 내지 섬멸이라는 적절한 사전 계획안까지는 만들어두고 있었기에 2차대전 프랑스 군부의 요새전으로의 교리 선회가 1차대전기의 기동전에 비교해서 무조건적으로 비판받아야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전 계획에 걸맞지 않는 부실한 2차대전기 프랑스 측의 정보력과 통신 기술이, 안 그래도 기동전을 버리고 요새전으로 선회함으로써 수동적인 형태로 변모해버린 프랑스군의 능동적 기동, 신속한 방어를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요새전 교리로의 선회가 결과론적으로 비판받는 부분은 있다.





여담 2) 1차대전기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졸전 이미지로 악명이 높기는 하지만 사실 1차대전기 이탈리아 왕국군 군인들의 전투 의지는 왕성했고 나름대로 용맹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산악병들의 산악전 숙련도는 개개별 병사로써는 상당했다고 여겨지며 베르살리에리 등으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특수군들 역시 그 군사사적 의의를 준수하게 평가받고있다. 다만 이탈리아 왕국군이, 러시아 제국군은 커녕 세르비아 왕국군한테조차 고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교환비 열세를 보이며 여러 전투에서 고전했던 것은 이탈리아군 전투 의지의 부족이라기보다는 '포병의 부족'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차대전에서의 공세 행위와 방어 행위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결국 포병이었다. 돌파를 위한 집중 효력사, 침투를 위한 교란 사격, 방어를 위한 화력지원에 이르기까지 포병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러한 포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은 사실 문자 그대로 고깃덩이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이러한 포병 전력에 있어서 시작 시점에서는 그다지 준비되지 못한 군대였던 것이다. 일례로 고작 10~20여문의 대포로 수개 보병 사단이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맞서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1차 이손초 전투, 카도르나 공세에서의 일부 상황들 중에서). 당연히 이탈리아군의 피해는 끔찍하게 누적될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왕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으로부터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이 프랑스와 영국이 대포를 비롯한 온갖 전쟁 병기들과 군수물자들을 퍼주기 시작한 이후부터라는 것도 이탈리아의 포병 문제를 잘 시사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선에 산악지대가 많고 이것이 이탈리아의 포병 화력을 상당히 경감시킨 가장 궁극적인 문제였지 이탈리아 자체의 포병 규모가 부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의 경우에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포병 배치의 체계성, 정교함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여담 3) 1차대전 프랑스군 원수의 위치에 오르고 후반기에는 아예 영불미 삼국원수로써 협상국군 총사령관 노릇을 했던 프랑스군의 지휘관 페르디낭 포슈는 그가 1911년에 했던 발언인 "비행기는 참 재미있는 물건이지만, 군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을 것이다."라는 발언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는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머물러있던 한심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매도당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페르디낭 포슈야말로 1차대전에서 거의 가장 먼저 항공 전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한 장성들 중 하나였다. 포슈는 이미 1914년 1차 마른 전투 때부터 항공 정찰을 통한 정보력 선제 입수가 전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정찰기를 활용하였으며 이후 1915년부터는 근접항공지원 개념, 병참선 폭격 개념, 항공관측반-포병의 상호연락 개념, 대공포 운용법을 모조리 개발 및 개량해내었다.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과 함께 유이하게 공지제병합동을 통한 기동 공세를 고안해낸 것 역시 전적으로 포슈의 공헌에 기반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페르디낭 포슈는 1911년 정도에는 당시 부실하던 항공 기술 때문에 항공기에 별 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1914년에는 급격히 발전한 항공 기술에 감명을 받고 이를 적극적으로 군사에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포슈는 그의 항공기에 대한 유명한 폄하 발언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1차대전에서 가장 공군에 심혈을 기울인 지휘관이었다.





여담 4) 프로이센/독일식 군사 철학이던 '전쟁은 예술이다'라는 관점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장은 화가의 화폭과 같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질을 해야하며 그 전에 예술 이론에 따라 대략적인 계획을 행한다. 장교단 역시 승리를 위해 기동과 공세를 해야하며 그 전에 전쟁 계획 및 작전술 단위 계획, 전술 단위 전투 계획을 수립해야한다. 그러나 화가가 막상 화폭에 손을 대고 그림을 그리는 중에는 반드시 화가 그 자신만이, 화가의 손 끝만이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미묘한 문제들, 사건들이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전쟁 또한 이와 동일하다. 화가가 인간이듯이 전쟁을 수행하는 장교들과 병사들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절대이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며 이는 적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과학과 수치를 통한 사전 계획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장에서만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미묘한 문제들, 사건들은 수시로 발생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판단에 기반한 임기응변에 숙달되어야하며(화가의 손 끝 감각, 현장 장교들의 현장 판단 및 재량 - 임무형 지휘체계) 또한 그러면서도 승리를 위한 기동과 공세의 자세를 잊지 않을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세부적으로는 사전 계획과 다를지라도 큰 틀의 초기 구상에서 벗어나지는 않기 위한 화가의 정신 자세, 승리라는 궁극 목적을 위해 기동과 공세를 도외시하지 않을 정신력 유지)', '전쟁은 과학이다'라는 군사 철학과 실전주의에 입각하여 보불전쟁에 돌입하였다가 프로이센군에게 대패한 프랑스군 측은 이후 페르디낭 포슈를 중심으로 기존 철학과 실전론을 비판하며 적극적으로 프로이센-독일식 교리(기동전, 기동전에 필요한 정신론)를 수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1차대전의 전장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1차대전이 끝나고 또한 포슈 세대가 은퇴하면서 프랑스 군부의 이러한 기동전 교리가 자체 폐기되었다는 것 역시 주지의 흐름이라 하겠다.






- The Kaiser's Army : The German Army in WWI, David Stone


- Stormtroop Tactics : Innovation in the German Army 1914-1918, Bruge Gudmundsson


- The French Army's Tank Force and Armoured Warfare in the Great War, Tim Gale


- French Tanks of the Great War : developments, tactics and operations, Tim Gale


- The French Army and the First World War, Elizabeth Greenhalgh


- Hundred Days : The Campaign that ended World War I, Nick Lloyd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