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획의 시작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미 군사고문단은 토벌지구에서 벌어지는 학살극을 모두 이범석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다. 고문단장 로버츠는 10월 26일 하우스만과 윤치영, 그리고 이범석에게 서한을 전달해 순천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경관을 공개처형하고 현지 사령관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학살을 막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잘 이루어지지 못하자 로버츠는 11월 1일 다시한번 편지를 보내 군 장교의 학살극을 지적하고 나아가 이를 막을 방침 4가지를 제시하였다. 당시 제시된 방침은 이러했다.


'1. 먼저 한국 정부 고위 관리들은 여단 지휘관과 연대 및 대대 지휘관들에게 이러한 행위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한 방법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 예하 군인들은 민간인에 대해 모범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군인들은 당국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는 이상, 민간인에 대한 권력은 없다. 만약 해당 지침을 어긴 장교나 사병이 있다면 이들은 엄격한 처벌과 죄질에 따른 알맞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2. 위와 같은 내용을 대도시와 마을 경찰서장에게 전달해야 한다.


3. 경찰과 경비대는 상층부 뿐만 아니라 하급부대까지 협력하도록 알려야 한다.


4. 관련 회담이 열릴 경우 지휘관과 정부 고위 관리들은 이 회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때 신속한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문서 작성을 다시 경찰과 경비대에게 맡겨야 한다.'


로버츠는 매우 상세하게 민간인 학살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 지휘관에게 알려야 한다고 명시했고 민간인에 대한 이탈적인 행위를 저지른 군인은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또한 그는 경찰과 경비대 간의 협력을 중시하며 양측 간의 협력을 통해 민간인 학살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어느정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순천경찰서 사찰형사 주임인 안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서장으로부터 계엄령 지침이 내려왔는데 그 지침 내용은 민간인을 절대 보호하라는 내용이였으며 해당 지침은 사령관인 전남경찰국장이 하달했고 경찰서장이 이 지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의 경우는 그러한 지침이 하달됐다는 증언이나 정황이 전혀 없다. 오히려 지침 없이 토벌에 임했다는 증언이 대다수이다. 


게다가 로버츠의 요구 중 하나인 법원의 재건 역시 군법회의로 인해 사실상 무력화됐다. 군법회의 진행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복잡한 절차 없이 그저 현장재판식으로 진행됐고 단순한 손가락질 하나만으로 재판이 되는 형식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결국 11월 중순 로버츠는 다음과 같은 서한을 이범석에게 전달해 법이 군과 경찰에게 장악됐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즉결처분을 막아야 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나는 사법이 경비대(장교,사병)와 경찰에 의해 장악됐다는 소문과 이에 관한 불확실한 보고를 가지고 있다. 특히 좌익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위에 언급한 집단에 의해 재판 없이 즉결처분됐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같은 무차별적인 학살극으로 인해 상당한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 당했다.


이러한 즉결처분은 빠르고 또 지휘관에게 드는 비용과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겠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용납 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민주적인 방법이다.


이에 따라 군의 모든 장교에게 적절하고 민주적인 방법을 알려줌으로서 이러한 사건을 해결할 것을 권고한다. 경찰에게도 이와 유사한 구절을 전해줘야 한다. 그리고 민간인들은 군대와 경찰을 보호자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려 3차례 걸친 서한으로 인해 군의 학살은 줄어들었을까? 아니면 이범석이 이를 끝내 무시하고 대학살이 계속됐던 것일까? 당시 군사고문단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범석이 이를 쉽사리 무시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가 군사고문단의 요구를 무시한 적은 많아도 민간인 학살 같이 매우 진중한 문제는 군사고문단의 영향이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범석 역시 미 군사고문단의 요구를 들어준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때까지 제대로 된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0월 26일 로버츠가 보낸 서한을 다시 보도록 하자


'10월 25일 10시 40분, 당신이 보낸 NR 2 문서는 송호성이 해당 지역의 계엄사령관인 것을 전하고 있다. 그는 처형 집행을 막고 경찰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하고 긍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1p


현재 순천으로 출동한 경찰은 심문을 받으려고 모인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보복하기 위하여 재판할 여지 없이 처형하고 있다. 이미 몇몇 친정부 성향의 민간인들이 처형당했고 사람들은 진압군과 반군이 모두 똑같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처형을 막기 위해서는 인력을 더 파견하고 법원을 만들어야 한다. 2p'

'1. 민사 재판 재건

대도시가 군의 작전으로 인해 탈환됨에 따라 질서와 법을 재건하기 위하여 관련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 또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 그리고 경찰의 보복 행위도 중지되어야 한다. 이 행위가 끝날 때까지 현지 군 사령관에게 전 부대에 대한 권한을 반드시 부여해야 한다.


2. 보복하는 경찰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

경찰이 복수심에 불타 순천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의혹에 관하여: 만약 경찰이 법을 어기고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해당 사례는 대대적으로 알려야 한다. 이들 책임자들은 순천에서 공개처형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이것은 대중으로부터 법이 대중을 보호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아가 대중의 충성심을 유지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그는 우선 현지 군 사령관인 송호성에게 전 부대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고 그로 하여금 학살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1월에 보낸 서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지 군 사령관에게 학살을 막아야 할 것을 지시하고 지시를 받은 사령부는 하급부대에게 같은 지시를 내려 학살 행위를 막고자 하는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압군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한국군은 10월 23일 반군토벌사령부를 편성하여 사령관직에 송호성을 임명하고 5여단과 2여단으로써 토벌작전에 임했다. 그러나 초기 토벌 과정에서 진압군은 매우 큰 결점을 보였다. 바로 상급부대와 하급부대와의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인데 1948년 10월 23일 G-3 보고에 의하면 당시 사령관 송호성은 자신의 부대들이 어떤 작전을 펼치는지,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고 오직 연락기를 이용하여 부대의 행방을 간신히 파악하는 수준이었다.(로버츠 준장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는 예하 부대들이 상급자인 송호성에게 보고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진압군은 상급부대와 하급부대와의 소통이 전혀 안되는 상황이었다. 현지 사령관 송호성은 예하 부대들의 행방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송호성에게 권한을 부여한다 해도 하급부대와의 통신이 전혀 안되는 상황이기에 하급부대의 이탈행위를 저지할 수 없었다. 즉 로버츠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현지 사령부의 건재와 하급부대와의 원활한 소통이 전제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결국 여순사건에서 이루어진 대대적인 학살극은 현지 사령부의 부재와 통제없는 하급부대의 이탈행위가 겹친 참극이었기에 군사고문단의 요구가 설령 받아들여진다 한들 그 효과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12월에 접어들면서 점차 해결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기존 강압적인 한국 사회를 완화하기 위해 사면 프로그램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본 사면 프로그램은 미국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고문단의 감독 하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사면 프로그램의 첫 시행 지점은 바로 호남이었다. 지리산 토벌이 계속되던 호남 지역에서 갑작스레 사면 프로그램이 시행되자 군은 강경토벌에서 온건토벌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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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27일 지리산 전역에 "친애 하는 제4·14연대의 사병 제군”이라는 문구가 적힌 삐라가 뿌려졌다. 이 전단에서는 “동족살상 의 무기를 버리고”, “정의의 사도 대한 육군에 가담하라”며 반군의 귀순을 촉구하였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 항공기로 2만장의 삐라가 뿌려졌으나 단 2명의 반군만이 항복했기에 반군의 귀순을 유도하는데 실패했다고 논평했다. 앞서 토벌대는 반군 포로를 즉결처분한 것을 언론에 공표한 적 있었고 군의 작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즉결처분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도 선포한 적 있었기 때문에 반군의 입장에서는 토벌대를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때 사면 프로그램은 극동군 사령부에서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는 평가도 들을만큼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대로 된 여견조차 충족되지 못했고 군의 이탈행위를 저지할 기관마저 없었다. 따라서 1949년 신년이 돼서도 군의 민간인 학살은 여전히 높은 빈도로 발생했다. 1949년 1월 제3연대 소속 군인들이 약 100여명의 민간인들을 누에고치 판매소에 감금한 다음 산동면 이평리 윤씨 선상 횟골로 끌고가 전부 처형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호남 각 마을에 붙여진 포고령의 내용, 마을에 태극기를 세우지 않으면 총살 당했다.


2. 사면계획의 본격적인 전개



다만 이런 어두운 상황과 달리 1949년 1월부터 사면 프로그램은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월 1일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은 “전과를 자각하고 자수하여 귀순하는 반도는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 적극 선무책을 쓰겠으나 끝까지 반항하는 자는 추호의 용서가 없을 것”이라고 사면작전의 방향을 제시했고 제8관구경찰청장 김병완 역시 “잘못을 느끼고 자수하는 자는 절대로 포옹”하겠다며 사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이어 1월 8일에는 군-경-관 합동 조직인 반도귀순촉진위원회 특별선무공작대가 편성됐고 공작대장에 육군소령 이영규를 임명하였다 


선무공작대는 귀순문을 통해 귀순자를 가려 받았으며 1월 15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제5여단장 김백일은 계엄과 대민작전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여 "군 자체가 일반 국민의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군경의용단의 불법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이를 시정하고 숙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계엄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던 여행증명제 또한 폐지할거란 방침과 더불어 귀순공작이 완료되면 계엄령도 해제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어 제5여단 제20연대장 위대선 중령은 투항하는 어떠한 공산주의자라도 사면위원회로 보내질 것이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m-1 소총을 가지고 투항한 자는 한 자루당 1만원을, 일본제 소총이나 카빈총을 가지고 온 자는 한 자루당 5천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 위대선이 말한 사면위원회는 반군포로, 민간인 포로 등을 상대로 정부에 충성한다거나 생명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서류에 사인을 하도록 한 뒤 이들을 곧장 사면하는 조직이었다. 위원회는 제5여단장 김백일, 경찰서장, 도지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투항한 민간인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1월 25일 기준 투항한 민간인의 수는 635명으로 이전 성과에 비하면 매우 놀라운 결과였다. 이들은 모두 사면위원회에 회부된 후 일부는 석방되었다. 하지만 투항한 반군의 수는 매우 적었다. 1월 15일부터 25일까지 토벌대에게 항복한 반군의 수는 고작 10명이었고 25일 기준으로도 31명만이 항복하였다. 이처럼 사면 프로그램은 민간인을 상대로 효과적인 성과를 볼 수 있었지만 반군에게 있어서는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는 앞서 군사고문단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전의 군경토벌대가 매우 강압적인 토벌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반군이 토벌대를 도저히 신뢰하지 못하여 투항 대신 저항을 택한 것이었다. 당시 진압군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의 명의로 포고문을 내려 토벌대에게 항복 한다면 살려줄테니 귀순의 의(意)를 표하라는 등 반군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지켜지지 못했다.


진압군은 붙잡은 포로들을 현지에서 즉결처분해 이를 언론에 알렸고 포로를 보호한다는 포고마저 이범석의 포고문 말고는 전혀 없었다. 특히 11월 1일 북지구전투사령관 원용덕이 내린 포고령은 오히려 즉결처분의 권한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결국 진압군이 급히 온건토벌로 바꾼다고 해서 단기간에 많은 성과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 사면 프로그램은 완전한 실패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주 목적이었던 민간인 보호는 겉으로나마 이루어졌을 뿐 여전히 높은 빈도로 학살이 지속됐고 반군의 전향을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에 따른 포로 확보도 저조하였다. 이전의 강경토벌과 이에 따른 시행착오로 빚어진 실패였던 셈이다.


같은 기간 토벌대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반군토벌 피해 통계

구분장교사병
전사20186206
부상14349363
실종6482488
탈영 혹은 행방불명9568577
합계491,5851,634


1949년 1월 6일 육군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토벌기간(1948.10.01~1948.12.05) 동안 총 1,057명의 피해를 입었고 557명의 무단결근자, 탈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토벌대는 선무공작과 토벌전을 병행하여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반군의 기습과 잦은 충돌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한편 토벌이 한참 전개 중이던 제주도에서는 사면 프로그램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는 사면프로그램을 진행시킬 지휘관이 부재하고 육지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면프로그램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에 주둔한 9연대와 2연대는 섬주민들을 모두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여 대대적인 학살극을 자행하였다. 특히 9연대는 11월 13일 원동 마을에서 최소 6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이를 무장대 사살전과로 둔갑하여 보고했고 제2연대는 북촌리 학살사건을 일으켜 600여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하였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초기 9연대의 화려한 전과를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당장 로버츠는 여순사건에 있어서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되는 것을 막고자 국방부장관 이범석에게 항의했고 이후 사면 프로그램을 통해 민간인 학살을 막으려 하였다. 


즉 그런 그가 9연대의 초토화 작전에 극찬을 했다는 점은 그가 현지상황을 잘 몰랐다는 것 외에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는 주로 미 군사 군사고문단의 전반적인 문제였는데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본부에 있어도 현지 시찰을 거의 나가지 않으며 한국군이 무엇을 하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라산 부근에서 작전 중인 9연대 병사들


9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9연대의 부고문단을 역임했던 피쉬그룬드 중위는 주마다 한 번씩 송요찬과 함께 지프차로 현지시찰을 나갔지만 9연대의 전투를 거의 본적이 없었다고 증언했으며 그 어떤 전투활동에도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다만 그는 9연대의 계획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9연대는 한라산 중심으로 섬의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고 9연대는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이주하도록 알렸다고 한다.


'제9연대의 임무는 제주도 주변의 도로를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임무를 수행했어요. 한라산 중심으로 섬의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누구든지는 아니겠지만 적으로 간주됐어요. 확실히 그들은 주민들로 하여금 해안마을로 이주하도록 알렸습니다.'


당시 9연대장 송요찬은 1948년 10월17일 자신의 명의로 “10월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군사 고문단 증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피쉬그룬드 중위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실상 묵인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역시 9연대의 전과가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며 9연대의 과장보고를 지적하였다.


'오전 회의에서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얼마나 많은 무기가 노획됐는지 말하곤 했습니다. 항상 무기보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기를 보자고 요청하기도 했고, 때로는 무기를 볼 때도 있었지만 보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보고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들은 나에게 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증언대로 당시 9연대의 전과는 적 사살에 비해 노획무기의 수가 매우 적었다. 1948년 12월 12일부터 14일까지 9연대의 전과를 보면 제3대대가 사살 105명을 기록한데 반해 노획무기는 99식 소총 10정, 칼 1자루가 전부였다.(9연대 전투일지 12.12~14일 참조) 이에 대해 주한미군 사령부에서는 '한국 육군은 자신들의 작전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의해 집계된 수치가 한국 육군 작전참모부 작전보고가 제출한 수치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고 논평하였다. 이처럼 제9연대의 과장보고는 매우 심했다. 게다가 그 속에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민간인을 죽인 숫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의 과장보고를 인식했다는 점과 민간인 소개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현지 고문단 역시 민간인 학살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9연대 군사고문단의 보고를 살펴보면 9연대의 민간인 학살을 지적하는 내용은 한 건도 없으며 오직 전과에 대한 보고 뿐이다. 즉 군사고문단이 대량학살을 유도한 것이 아닌 의도치 않은 묵인을 한 것이다. 


따라서 고문단장 로버츠는 관련 학살 보고 없이 전과에 대한 보고만을 계속 받았다는 뜻이 되며 이외 기타 상황에 대한 보고 역시 거의 받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로버츠는 9연대의 작전의 실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9연대가 높은 전과를 올리니 그들을 극찬한 것이었다.


이후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로 교체되자 2연대 고문단은 곧바로 2연대의 학살행위 등을 지적하였다. 제주에 도착한 제2연대는 기존의 초토화 작전을 계속 이어나갔다. 2연대는 서청단원이 포함된 서북대대를 통해 제주도민에게 세금을 걷어 이를 독식했고 마을주민들의 목숨과 가축을 강탈하였다. 


결국 2연대는 북촌리 학살사건을 일으켜 수백명의 주민들을 집단학살하는 행위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2연대 보급 고문관 우스터(P. C. Wooters) 중령은 2월 10일 로버츠 준장에게 다음과 같은 시찰보고를 올렸다.


보급 고문관의 제주도 제2연대 시찰보고 수신: 

미군사고문단장 관찰사항에 대한 논평: 

보급이외의 활동에 대한 관찰보고: 

(1) 연락 담당 비행기가 선동 전단을 뿌리고,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무차별로 떨어뜨리고 있다. 

(2) 한국군 병사들과 지역경찰의 지역주민에 대한 우월적인 태도는 불필요하게 평화스러운 시민들을 자극하여 폭도활동에 가담하게 하는 요인인 것으로 사료된다. 

(3) 인원 부족, 통신장비 부족, 안전을 전적으로 한국군에 의탁, 열악한 시설, 분명히 드러난 것으로 지속적으로 재판 없이 지역주민들의 처형에 따른 주민들의 자극, 그리고 군기강 문란 및 통제받지 못한 병사들의 시민권 침해로 인하여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요원들이 불필요하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군사고문단 보급고문관 우스터(P. C. Wooters) 중령


시찰보고를 받은 뒤 로버츠는 행동에 나섰다. 1949년 2월 중순 로버츠는 이범석 국방부장관에게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학살극을 지적하며 제주도에서의 학살 조사를 할 것과 서청대대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군사 고문단은 나에게 약 500명의 서북청년단원들이 군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국군 고위장교는 그들이 다양한 대대에 통합되어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년단은 해체되지 않았다. 게다가 보고에 의하면 그 건방진 외지인들이 그곳에서 소와 기타 물자들을 갈취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나는 당신네 군대가 사로잡은 소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법적인 근거 없이 처형함으로서 법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나의 군사 고문단은 나에게 처형된지 얼마안된 사람들의 머리가 제주도 거리에서 작은 행진을 통해 운반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나는 이 모든 사실과 더 많은 사실들이 민간 조사단과 당신네 군 감찰관들의 조사를 공정한 조사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내 장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도울 수 있다면 부디 나를 찾아와라.


나는 나에게 보고된 정보들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또한 나의 군사 고문단은 당신이 요구한다면 제공할 증거들도 있다.1) 이 증거는 당신이 받았을 여러 정보들과 같이 당신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군사 고문단은 나에게 약 500명의 서북청년단원들이 군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국군 고위장교는 그들이 다양한 대대에 통합되어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년단은 해체되지 않았다. 게다가 보고에 의하면 그 건방진 외지인들이 그곳에서 소와 기타 물자들을 갈취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나는 당신네 군대가 사로잡은 소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법적인 근거 없이 처형함으로서 법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나의 군사 고문단은 나에게 처형된지 얼마안된 사람들의 머리가 제주도 거리에서 작은 행진을 통해 운반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나는 이 모든 사실과 더 많은 사실들이 민간 조사단과 당신네 군 감찰관들의 조사를 공정한 조사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내 장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도울 수 있다면 부디 나를 찾아와라.


나는 나에게 보고된 정보들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또한 나의 군사 고문단은 당신이 요구한다면 제공할 증거들도 있다.1) 이 증거는 당신이 받았을 여러 정보들과 같이 당신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1) 이후 이범석은 미군장교로부터 민간인 학살 사진을 전달 받았다.


2연대 군사고문단은 2연대의 학살보고를 여러차례 상부에 보고했고 로버츠 또한 그때서야 제주도의 실태가 어떤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학살 보고가 올라오자 한국 정부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과 신성모에게 제주도로 갈 것을 지시하고 주민들의 실정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제주도로 도착한 이범석과 신성모는 주민들을 위로하는 말을 건냄과 동시에 군의 민간인 학살을 자인하는 발언도 하였다. 


이 가운데 신성모는 서북청년단원들 앞에서 '서북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등이 되어 제주도에와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폭동이 난줄 안다. 동정해 마지않으며 앞으로는 치안회복을 위해 도민이 단결, 정부시책에 협조해주기 바란다'고 발언했다가 서청단원에게 죽을 뻔했고 이범석은 ‘미군장교가 주민들이 집단총살 당한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줬는데 이 정도로 비참한 줄은 몰랐다’며 당시 학살의 실태를 주민들 앞에서 언급하였다.


제주도 시찰이 끝나고 국회로 돌아온 이범석과 신성모는 제주도 사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제주도를 복구하기 위해 식량지원을 하고 대민지원을 통해 무너진 집들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농림부 장관과 상공부장관은 생필품을 담은 선박을 제주도로 보내 제주도의 재건을 추진하였다.


이후 이범석은 국회에서 제주도의 토벌작전을 총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고했는데 제2연대는 먼저 제1단계에서 지방 지리와 실정을 익히면서 비민분리를 목표로 활동했고 제2단계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부락지대를 재소탕하였으며 제3단계에서 한라산으로 도주한 “무장폭도를 포위하고 추격”하여 압박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전개했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선무 공작을 중점으로 둔 작전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무장폭도와 민간폭도를 구별해야 한다. 무장폭도는 화기를 휴대한 자를, 민간폭도는 죽창을 든 자를 지칭한다. 민간폭도의 대부분은 악질분자의 ‘프로파간다’에 속아넘어간 자들이다. 무장폭도는 대외선전이나 식량운반, 정보수집, 경찰서 습격 등을 위해서 민간폭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지만, 민간폭도는 무장폭도의 거짓선전에 염증을 느껴 하나둘씩 떨어져 나오고 있다. 


○ 제주도에서 도당국과 군경당국이 합작해서 선무공작에 중점을 두고 군대에서 주체가 되어 극단을 구성했다. 극의 내용은 공산당의 음모, 해방 이후 남로당 계열의 죄악,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한민국 정부, 북쪽 괴뢰정권의 민중에 대한 압박, 과거 제주도의 편안하던 역사, 현재의 비참한 실정 등으로 구성하며, 군경은 귀순할 경우 언제든지 포섭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극을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하고 있다. 


○ 비행기로 삐라를 살포하고 한라산 꼭대기의 비무장폭도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과거에 비교적 폭력적이었던 경찰의 태도를 시정하였다. 이것이 효과가 있어 한 달에 250-260명, 300명에 가까운 민간폭도들이 귀순하였다. 그 숫자는 나날이 증가하고 나중에는 500-600명이 하루에 두서너 번에 걸쳐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에 군경은 너무도 포악해서 선무공작을 등한히 했고, 강압적으로 총으로써 총을 진압하면 무사하리라고 보았는데 이것이 역효과를 발휘해 반동의 應擊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 시민대회를 열어 어떠한 죄상을 막론하고 무장폭도의 위협과 모략에 속아서 추종했다면 정부에서는 용서할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경찰로 하여금 부락을 조직하게 하고, 부락 내부에 改悛하지 못한 악질분자를 숙청하고 부락민을 선도,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선무공작과 무력토벌을 배합한다면 3월 말일까지 대체로 안정될 것으로 확신한다. 


○ 군대에 특별히 언명하여 총 가진 자, 화기를 발사하는 자에 한하여 실탄을 발사할 것이며, 죽창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생포하라고 언명하였다. 


○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경의 질이 부족하여 지도하는 데에 착오를 범하였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자백한다. 정부가 조직된 지 2개월 만에 일어났기 때문에 달리 조종할 도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이범석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에 군경은 너무도 포악해서 선무공작을 등한히 했고 이 때문에 역효과가 발휘해 반동의 응격(應擊)이 되었다고 발언하였다. 게다가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이범석은 '군경의 질이 부족하여 지도하는 데에 착오를 범하였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자백한다'며 스스로 자아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제주도 토벌 계획을 무력토벌과 선무공작이 병행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이와 같이 제주도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면 프로그램은 이때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마땅한 현지 지휘관을 찾아야 했다. 앞서 여순사건은 현지 사령부의 부재와 하급부대의 소통 두절로 통제가 전혀 안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사면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다. 이는 사면프로그램이 시작된 1949년 1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미 군사고문단은 고문단에서 가장 평가가 좋은 지휘관 2명을 선발해 전투 사령관직에 추전하였다. 바로 정일권유재흥이다.


왼쪽부터 정일권과 유재흥의 모습, 둘은 각각 지리산과 제주도에서 사면계획을 실행했고 군의 민간인 학살을 저지하였다.



3. 사면 작전의 결과와 한계


당시 선무공작대의 모습


이 둘은 미군의 평가가 가장 좋은 군인들로 사면 프로그램을 이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재들이었다. 미군의 요구를 잘 들어주고 그것을 원활히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을 미군으로부터 입증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1949년 3월 1일 육군본부는 정일권을 사령관으로 둔 지리산 전투사령부를 편성하고 다음 날에는 유재흥을 사령관으로 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이 두 개의 사령부는 모두 공통적인 지침사항을 전 부대에 하달한 후 토벌작전에 임했는데 지리산 전투사령부의 경우 산간 지역에 있는 민간인 중 95%가 불만을 품고 있고 정부에 대해 무지하며 반군의 압력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사령관 정일권은 선무공작대를 통해 이들을 계몽시키도록 하고 이와 함께 군인이 민간인 거주구역에 침입하여 약탈, 학살하는 것을 금지함과 동시에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하겠다고 선포했다. 


제주도 전투 사령부 역시 동일하게 학살 금지령을 내리고 산속으로 올라간 주민들에게 하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과거 로버츠가 말했던 학살 방지 지침과 거의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군사고문단의 요구가 완벽히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어 지리산 전투사령부는 선무공작과 토벌전을 병행해 반군을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지리산 전투사령부는 반군의 수를 대략 150명 정도로 파악하고 하산한 반군의 수는 400명으로 추산했는데 (당시 하산한 반군은 나중에 반군이 필요할 때 소집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하산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령관 정일권은 숫자가 적은 반군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기 위해서는 야산 일대로 포진한 반군을 토벌대를 투입시켜 지리산 안으로 몰아넣은 뒤 격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비정규전사, 82p


이와 더불어 정일권은 군이 없을 때 마을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마을마다 민방위를 조직하게 했고 반군이 부락민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통행증 발급과 민통선 설치 그리고 신원증명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토벌대는 매 작전마다 쉴틈 없이 탐색전을 벌였고 반군을 계속해서 쫓는 추격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반군이 의도적으로 후퇴하여 뒤를 쫓은 토벌대를 매복공격을 가해 격퇴하는 일도 있던만큼 피해 역시 클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지리산 전투사령부는 위천전투를 통해 반군의 지도자 김지회와 홍순석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으며 덕유산 포위전, 개관산 전투를 거쳐 1949년 4월 9일 마침내 홍순석과 김지회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작전이 완료되자 사령관 정일권은 4월 18일을 기일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복귀했고 후임으로 제3연대장 함준호를 임명하였다. 이때 지리산 전투 사령부에 배속된 각 대대들은 각각 원대복귀하여 3개 대대만이 잔존했는데 5월 12일 사령부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대대 또한 원대복귀하였다. 이후 본부로 복귀한 대대는 대대가 주둔한 장소의 이름을 따 전투사령부 혹은 계엄사령부라고 지칭한 뒤 공비토벌작전을 지속하였다. 


작전이 끝날 무렵 지리산,호남 지구 전투사령부의 전과와 피해는 다음과 같이 집계됐다.


전과
피해
사살
536
전사52
부상
25
부상52
실종
-
실종8
포로
156
포로-
717
112


이 과정에서 지리산 전투 사령부는 추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부 부대가 합류하지 않는 등 지휘권 문제도 있었지만 추격전을 전개하며 토벌부대를 민간인과 분리시키도록 했기 때문에 이전처럼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면 프로그램도 이때를 기점으로 더더욱 확대되고 성과 또한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1949년 1월 1일부터 3월 21일까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는 남로당원 5,765명, 반군 52명, 게릴라 1,664명 등 총 7,481명의 사람들이 투항을 했다고 밝혔고 지리산 전투사령부는 약 2만명의 민간인들이 군과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는 서류를 전투 사령부 본부에서 사인했다고 밝혔다. 이외 경상남도 일대에는 10,064명의 민간인들이 집단 자수하여 투항하였다.


한편 제주도 전투사령관 유재흥은 지리산 전투사령부와 동일하게 부대를 산속으로 집중투입시켜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전투사령부는 산속으로 올라간 2만명의 피난민들에게 하산할 것을 촉구했으며 그들에게 생명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투 사령관 유재흥은 되도록이면 잡힌 포로들을 직접 심문했고 그 중 무장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라면 음식과 담배룰 주며 즉시 석방시켰다. 


이윤영 사회부장관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요즘 귀순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내가 갔다온 1주일간만 하더라도 898명이나 귀순자가 있었고 4월 13일 현재 합계 3,500명이 돌아왔었다. 제주도 5개 수용소에 있는 자가 3,174명이 있다”며 귀순자가 대폭 늘어났다고 말하였다. 또 유재흥 전투사령관은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귀순자가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아직 제주도에 남아있는 서북대대와 서청경찰을 해체하기 위하여 1949년 4월 하순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서북대대와 경찰에 소속된 서청단원들을 모두 본토로 복귀시키고 분산배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신성모는 제주도로 방문해 당시 도지사인 김용하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때 김용하는 신성모에게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가 지역민들에 대해 매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며 이를 시정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신성모는 2연대가 지역민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자신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서청의 해체가 본격화되자 유재흥 사령관의 토벌작전도 완료되기 시작하였다.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용관이 4월 20일 2연대에 의해 사살됐고 이덕구 또한 4월 하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하루아침에 조직력을 잃은 무장대는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졌고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는 이로써 부여받은 임무를 거의 완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전투 사령부는 1949년 5월 15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이때 신성모는 제2연대 서청대대를 본토로 복귀시켰고 기타 서청단원들도 함께 육지로 보냈다. 유재흥의 성공적인 작전으로 마침내 제주도 상황을 평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로버츠 준장은 이러한 사면 프로그램의 성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보고했는데 보고 내용을 살펴보면 이승만 역시 사면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승만은 호남과 제주도에서 이루어지는 사면 프로그램의 결과를 로버츠에게 알려줄 것을 요청했고 로버츠는 1949년 3월 19일 편지를 보내 사면 프로그램의 결과를 이승만에게 통보하였다. 편지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매일마다 300~800명의 피난민들이 2연대에 항복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항복한 피난민의 수는 약 2,200명으로 밝혔다. 


이처럼 사면 프로그램은 대통령 이승만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굉장히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면 프로그램은 양면성이 존재했다. 겉으로는 그 어떠한 죄도 따지지 않고 살려주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뒷모습에는 귀순자를 사면해주지 않고 군법회의에 회부해 그들을 무참히 처형하거나 형무소에 수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토벌하는 지역 곳곳에 세워진 팻말, 이곳에 모르고 들어갔다고 해도 모두 즉결로 다스려졌다. 


초기 사면프로그램이 진행됐을 시기인 1949년 1월 27일 군은 군법회의를 통해 67명의 반군 포로를 처형시켰고 아울러 귀순하는 민간인 중 일부를 현지에서 즉결처분하였다. 이때 호남지구 전투 사령관 원용덕은 “귀순자를 사살한다고 악선전되는 수가 있는데 한 사람을 죽이면 10명이 생긴다는 이러한 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가난하고 교육 정도가 낮은 농민의 자제들이 많이 들어오고 지식수준이 높은 지도자층이나 국회의원들의 자제는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혼란한 이 때에 있어서 옥석(玉石)이 혼돈되고 민심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여러 가지 과오가 국부적으로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장폭도가 20여 명이 나타나면 민간 폭도들도 이와 합세하여 고함을 치면서 몽둥이를 들고 기세를 올리며 악악 소리를 지를 때 자연적으로 그들에게 총부리를 안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마디가 썩을 때 그 마디를 잘라야만 의학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여 생기는 불상사를 인정하면서도 '무장폭도가 20여 명이 나타나면 민간 폭도들도 이와 합세하여 고함을 치면서 몽둥이를 들고 기세를 올리며 악악 소리를 지를 때 자연적으로 그들에게 총부리를 안 돌릴 수 없을 것이다'며 토벌대의 학살행위를 부득이했다는 어조로 답하였다. 초기 사면프로그램의 기만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군의 이같은 관행은 지리산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귀순자에 대한 추가 처벌은 계속됐다. 1949년 10월 5일 정광호 의원은 국회에서 “귀화한 사람 가운데에도 역시 귀화를 시켜가지고 그 전죄를 추궁해서 형을 집행"하고 있다고 발언했는데 이는 귀순한다고 해도 '무조건 석방'이라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 중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이후 사형을 선고 받거나 형무소에 수감됐다. 


제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주군법회의는 사면프로그램과 관계없이 진행됐고 6월 21일부터 7월 7일까지 총 345명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가운데 249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에 의해 1949년 10월 2일 정뜨르 비행장 북쪽 해안가에서 처형집행됐고 나머지 수형인들은 모두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은 추후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부 처형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면 프로그램의 어두운 면이다. 투항하면 목숨을 보장해준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단순히 반군에게 식량을 제공해줬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단심제였기 때문에 항소조차 할 겨를 없이 곧바로 총살장으로 보내졌다.


물론 토벌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지리산 토벌대는 신속한 토벌을 위해 마을을 소개하고 집단부락을 설치하여 주민들을 그곳으로 강제이주했는데 이때까지는 별다른 대량 학살은 없었지만 워낙 단기간에 이루어진 터라 주민들에 대한 지원은 부재했다. 심지어 마을 전체를 통비부락으로 낙인찍어 마을 자체를 소각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재민이 대량으로 발생했고 별다른 지원 없이 밖으로 내몰린 민간인들은 아사하거나 병사하는 등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당시 사면 프로그램은 비록 1월에 실시되어 3월에 대대적으로 확대됐지만 그 이후부터는 계속 축소되어 나중에는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다시 부활했다는 것이다. 특히 제3연대 2대대장 조재미는 주둔지에서 계엄사령관으로 지내며 주민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또한 3연대 1대대 3중대는 신병소대로써 주둔지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당시 신병소대는 담력강화라는 명분으로 100여명의 민간인을 붙잡고 야산으로 끌고 가 신병들을 통해 총검으로 척살한 부대였다. 


이때 소대원의 증언에 의하면 학살명령은 신병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고 신병 1인 당 민간인 한 명을 죽이도록 했으며 시체 수습은 고참이 했고 신병은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외에 문경 석달 마을 학살사건도 있었는데 석달 마을 학살의 경우 마을주민들이 토벌대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토벌대가 마을 자체를 파괴하였다.


이처럼 사면 프로그램은 그 과정에서 있어서도 결코 순탄치 못했다. 살려준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나마 내세우던 학살 방지조차 시간흐를수록 퇴색되어 결국 민간인 학살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사면 프로그램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강압적인 토벌을 선무공작을 병행한 토벌로 선회하고 군에 의한 대량학살을 잠재웠다는 점 그리고 토벌전과 함께 파괴된 민간사회를 복구하려 했다는 점 등 사면 프로그램이 가지는 의의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사면 프로그램은 무너진 민간 사회를 복구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강경 토벌을 잠재우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지만 지리산, 제주도 전투 사령부 철수 직후 귀순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처벌했다는 것과 집단부락으로 인해 주민들의 피해도 커졌고 아울러 시간이 흐르면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다시 늘어났기에 그 한계 역시 명확했다. 


결국 사면 프로그램은 초기에 온건적인 모습을 연출하여 기존의 강압적인 토벌작전에서 탈피하고자 했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시도는 점차 퇴색되어 사라졌고 군에 의한 강경 토벌과 민간인 학살이 다시금 부활하게 되어 더 이상 작동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사면프로그램은 1949년 11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