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줄 요약 필요한 사람은 그냥 맨 밑에 총평 보셈


1. 개인적인 평가

일단 개인적인 감상에 대해서 말하자면, 솔직하게 말해서 (진짜로 그냥 개인적인 느낌) 정도전이나 용의 눈물 같은 흡인력은 아직까지 부족함. 정치물과 전쟁물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나오는 부분이겠지만 솔직히 나는 정도전은 방영 당시에 볼 때는 중간에 내 숨소리 때문에 효과음 하나가 묻히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확 빨려들어서 중간에 오줌 지린 적도 있을 정도로 집중해서 봤는데, 고려거란전쟁은 중간중간 음료수 가지러 나가고 하면서도 "이 음료수를 따르는 찰나에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조차도 아쉽다"는 느낌까지는 못 받았음.


다만 일단 태종 이방원 때보다 낫다는 건 분명함. 여말선초의 내용은 시청층이 대부분 알고 있지만 여요전쟁은 그보다 훨씬 부족한 인지도의 내용인데도 불구하고(이것 때문에 역사를 다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1~2회차를 너무 무의미하게 소비해 버림. 캐릭터 설명에 대부분의 시간이 할애되어 있음) 흡인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임.


2. 전쟁 장면

일단 KBS라는 이름값은 분명히 했고, 넷플릭스와 중간광고까지 동원해야 했던 티가 남. 그래픽은 호화롭고 세트는 화려하며, 병사들의 무장 또한 고증 수준이 상당히 높고,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도 적은 회차라는 한계 속에서 수준급으로 묘사함.


근데 징비록이라는 전례 때문에 그런 것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불안함. 1화 처음에 등장했던 귀주대첩이야 한국사를 통틀어 거의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규모의 대회전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흥화진 전투의 배경인 흥화진은 사실 소규모의 보루(堡樓)였고 12,600척 규모의 제대로 된 토성이 축조된 건 1030년대 영주로 승격된 이후인데,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묘사된 흥화진의 크기는 거의 드라마 [광개토대왕] 시절의 요동성이나 안시성에 필적하는 거대한 석성임.


그렇게 묘사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제작비가 270억이라 하나 인건비와 물가는 올랐는데 실제로는 별로 크지도 않았던 규모의 요새를 이렇게 거대하게 묘사하면 이후에 있을 대회전에서 쓸 예산은 어떡할 생각이지? 라는 의구심부터 들었음. 특히 [징비록]에서 실제로는 거의 보루 수준이었던 부산진성을 [불멸의 이순신]에서 쓰인 진주성 세트장에서 찍어 부산진성 전투를 엄청난 대전투로 묘사해 버리는 바람에 그 뒤의 전투는 갈수록 예산 부족으로 줄어들어 버린 전례가 있어서 더 불안함.


다시 말해서 "전투씬 퀄리티는 괜찮은데 대체 이 퀄리티를 어떻게 유지할 작정이냐?" 라는 느낌


3. 스토리

솔직히 스토리는 별로 흠잡을 만한 부분도 없고 별로 호평하고 싶은 부분도 없음. 역사적 사실관계를 틀리게 묘사한 것은 없지만, 등장인물들 배후에서 작동하는 각색이 거의 없고(너무 정도전 얘기만 하는 것 같긴 한데, 정도전에서는 공민왕을 이인임이 죽인 것으로 과감하게 각색하여 공민왕의 죽음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이인임의 캐릭터성을 단숨에 완성시키면서도, 이인임 본인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홍륜을 통해 차도살인하는 것으로 묘사해 역사적 사실관계를 어기는 것은 피함) 그냥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연출만 멋있게 함.


일단 억지로 자기들이 짜낸 스토리 욱여넣느라 고증을 말아먹는 일은 없었으니 이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캐릭터 해석에 있어서 과감했던 이전의 사극들과 비하면 스토리의 창의성 자체는 떨어짐. 그냥 역사서를 어기지 않은 걸로 만족해야 하는 10년대 이후의 사극 상태 자체가 아쉬울 따름.


4. 연출

나는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는 연출 하나만으로 시간을 투자해서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특히 이번 화에서 고려 대신이 거란 사신에게 술을 따르려고 할 때 거란 사신이 고려 대신의 손을 잡거나 잔을 치우는 게 아니라 잔 위를 손으로 덮어버리는 장면이라던지, 현종이 강조에게 부월을 하사할 때의 모습이라던지(이건 직접 보셈. 개쩖), 야율문수노가 제장들과 모닥불을 피워 놓고 회의할 때 오른편에 있는 요 문관들은 완연한 관복인데 왼편에 있는 요 무관들은 노매드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어 요의 정치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라던지(사실 고증에는 안 맞고 문관들이라도 전장에 같이 나설 때는 군장을 하거나 최소한 관모가 아니라 두건 혹은 패랭이를 쓰는 게 일반적임)


어쨌던 최소한 연출만큼은 단순히 두 사람 앉혀놓고 대화하는 거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는 고전적인 기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함. 물론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1~2화 천추태후 연기가 힘이 없다는 점이 나는 이 드라마가 둔 최대의 악수였다고 생각함. 천추태후 배우 이민영 분이 절대 부족한 배우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 배역을 "사극을 처음 맡아보는" 사람이 할 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음. 개인적으로는 태종 이방원에서 신덕왕후를 분했던 예지원 정도가 되었으면 박수가 나왔을 것 같은데, 솔직히 좀 아쉬웠음. 천추태후가 별로 괴물같이 묘사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김치양이 [정도전]의 이인임이나 [뿌리깊은 나무]의 태종 수준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그나마 존재감 뿜뿜한 건 목종인데 이쪽은 좀 다른 의미로 굉장한 존재감이었지 드라마의 축을 붙들고 하드캐리할 수준의 인물은 아니었음


그래서인지 상술한 저 세 사람이 깨끗이 퇴장한 이번 5화부터는 드라마 축이 강조, 현종, 양규 세 사람으로 확실히 압축됐고, 강조가 이끌어 나가고 현종과 강감찬을 비춰 후반 스토리를 책임질 사람들을 강조하고 양규로 전쟁 전선의 묘사를 채우면서 인물을 영리하게 배치하여 나름대로 스토리의 축을 꽉 잡은 느낌이 듦. 그리고 강조가 2차 여요전에서 죽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부분인데 강조에게 스토리를 몰아줌으로서 오히려 강조가 죽고 난 뒤의 스토리를 철저히 예비했다는, 영악하다는 느낌까지 들 수준의 묘사를 보였음.


5. 총평


1. 일단 결단코 대한민국 사극 중 걸작의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함.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무인시대]를 위시한 기라성같은 고전들에 비하면 솔직히 크게 뒤떨어짐. 내가 정도전 팬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2014년작인 정도전보다도 훨씬 후퇴함.


2. 다만 순수하게 전쟁물로서의 드라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됨. 흥화진 전투가 막 시작된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얘기임. [징비록]도 딱 부산진성 전투까지는 대단했음.


3. 그리고 연출, 연기, 스토리 구성 등에서는 확실히 2020년대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세련되게 진화함. 고전적인 촬영 기법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음. 그래픽과 고증도 상당히 신경썼고, 전투씬만큼은 확실히 (다시 강조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단함.


최종평: 아직까지 한 편도 안 봤다면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은 찾아서 보라는 말을 할 만한 수준은 아님(솔직히 정도전은 이 정도였고, 용의 눈물이나 태조왕건은 내가 본방사수한 세대가 아니라서 말하기 힘듦). 다만 이왕 방영하고 있는 거 챙겨보라는 수준의 말은 꼭 하고 싶은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