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당의 개헌론 논의

김성수와 이승만의 모습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의 여당 역할을 해오던 한민당은 내각에서 밀려남으로서 이승만에게 버림 받았다. 한민당은 즉각 야당적인 행동을 취하는 이승만을 맹비난하고 이승만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그러나 한민당이 곧장 야당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한민당은 아직 야당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중간파 부동층까지 흡수해 야당으로서 강화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당 중진들은 현 국무원과의 제휴를 통해 여당으로 자처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렇게 당 중진들은 9월 2일, 중앙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추후 9월 25~26일 열릴 전당대회에서 내각 개조를 결의하기로 결정했다. 전당대회에서 얻은 결론은  바로 “내각침투를 통한 여당화” 전략이었다.  주요 교체 대상은 이범석, 윤치영, 임영신, 등 제1그룹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때 한민당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당시 의회 내에서 조성되고 있는 정부 비판론과 개헌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조각 결과가 발표되자 국회에서는 ‘약체 내각’이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는 곧 개헌론으로 비화되었다. 즉, 내각이 ‘거국’ 내지 ‘강력’ 내각이 되지 못한 이유가 모호한 헌법체계에 있으므로 이를 시정해 내각책임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헌과정에서 내각책임제를 주장했던 무소속구락부와 한민당 그리고 조각에서 소외된 독촉 계열도 가세했고 그 결과 8월 12일, 백여 명 가까이가 개헌론에 찬성의사를 보였다.


다시말해 한민당도 이에 편승하여 내각보강론과 정당내각이라는 명분으로서 자신들의 집권 전략을 연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론을 이승만 정부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채택했고 1949년 상반기까지 내각 개헌론 공세를 지속해 나아갔다.


제1차 개각 단행과 민국당으로의 개편

첫 국무회의 사진


한민당의 내각침투 공세가 승기를 잡은 시기는 바로 반민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여순사건의 발발이었다. 이를 계기로 의회 내에 내각개조론과 개헌론이 급부상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반민법에 대해서 한민당은 대체적으로 친일청산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한민당이 창당시절부터 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 때문이었다. 친일파가 당 내에 다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친일청산을 한다는 것은 당의 입장에선 매우 곤란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민법 제정과 실시 문제로 의회와 정부가 충돌하고 특히 윤치영이 의회 공격의 초점이 되면서 한민당은 이를 내각 개조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윤치영이 국회로부터 비판 받았던 점은 그가 내무부장관으로 등용된 직후, 사찰 계통의 친일 경찰들을 대거 간부직에 재등용했다는 점과 내무부가 반민법 저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회의 비판은 9월 23일에 열린 ‘반공구국총궐기대회'를 계기로 절정에 치달았다. 


당시 반공구국총궐기대회는 윤치영의 허가를 받고 거행한 시위로 친일청산을 부르짖는 국회의 입장을 반하는 시위였다. 즉, 친일청산보단 반공을 내걸어 친일청산의 요구를 희석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국회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날 국회는 윤치영을 소환해 친일경찰 등용에 대한 질의전을 했고 9월 27일에는 그를 다시 소환시켜 대회 지원 여부를 집중 추궁했다.


이처럼 친일청산 공세가 거세지자 정계 안팎에서는 윤치영 사임설과 내각 개조론이 유포되었다. 의회 공세를 피하고 개헌론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 장관들을 ‘의회 쪽’ 인물들로 교체할지도 모른다는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9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소문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럼에도 의회에서는  여전히 개헌 주장이 계속 힘을 얻고 있었다. 9월 30일 한국에 방문한 올리버는 이승만에게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 후 거사하려는 틀림 없는 반란계획”이 의회 안에 있다며 바로 “대통령의 권력을 제거하려는 헌법 개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내각개조를 권고했다. 그러던 도중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11월 8일 의회는 “거국적 강력내각” 구성을 포함하는 시국수습대책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당시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한민당의 조헌영 의원은 정부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로 약체성을 지적하고 국회에 지반과 배경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쉽게 말하면 정부 내각을 한민당 계열로 다시 구성하라는 요구였다


국회 결의가 있은 직후, 이승만은 11월 9일 이를 도각(倒閣)이라 지칭하며 국회를 맹비난했다. 하지만 곧 입장을 바꿔 11월 12일, 유엔총회 후 내각 개조 방침을 기자회견에서 시사했다. 이승만의 입장이 번복되자 한민당과 소장파는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여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되 세부 조건은 양측에서 적당한 수의 찬성자를 규합한 뒤 다시 논의 및 결정하기로 했다. 목표는 1949년 1월에 재개되는 정기국회 제출이었다. 이때 한민당은 개헌 논의가 구체화된 현 상황을 이용하여 자당 의원들을 입각에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한민당원들은 은밀히 이승만과 접촉해 한민당원을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에 임명시킨다면 개헌운동을 즉각 철회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어 이들은 임영신도 내각에서 제외할 줄 것을 이승만에게 제의했다. 그러던 도중 한민당은 윤치영과 연관된 두가지 음모를 국회에서 폭로했는데 하나는 조헌영, 노일환, 윤재욱 등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인 의원들에 대한 암살 모의고 다른 하나는 한민당과 청년운동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이하 정부 요인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음모였다. 결국 국회는 12월 22일 윤치영에 대한 사퇴권고한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상황이 이승만에게 매우 안좋게 흘러가면서 대통령은 개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12월 24일 제1차 개각이 단행됐고 윤치영은 장택상, 전진한과 함께 내각에서 제외됐으며 그 후임은 신성모로 임명되었다. 이때 한민당 이윤영도 내각에 입각하는데 성공했지만 국방부장관직은 교체되지 않았다. 물론 이승만은 이범석 국방장관에게 찾아가 두 가지(국무총리,국방장관)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으니 하나는 물러 나가라며 국방부 장관을 그만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이 완강히 거부함에 따라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각 언론에서는 제1차 개각 결과를 한민당의 패배라고 보도했다. 왜냐하면 한민당이 요구했던 이범석, 임영신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내무부장관 신성모는 한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어 언론은 곧 한민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보도를 냈다. 

대구를 사수하자고 결의하는 신성모의 모습, 1950.08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해석과는 달리 한민당은 개각 결과를 매우 만족스럽게 평했다. 애초에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신성모는 당시 한민당계로 이루어진 이승만 측근 단체인 '안국동구락부'의 조언에 따라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한민당의 지도자였던 김성수는 신성모에 대해 “잘 아는 동지로서 적임자로 생각한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상과 같이 한민당은 1차 개각에서 이승만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이후 한민당은 성급히 개헌론을 표면화시키기 보다는  1차 개각의 여세를 몰아 내각 개조를 더욱 압박하고자 했다. 이는 1차 개각 직후, 임명된 후속 인사를 보면 더더욱 뚜렷해진다. 1949년 1월 3일 한민당원이었던 김효석이 내무부장관 신성모의 비호 하에 내무부차관으로 발탁됐는데 당시 신성모는 국내사정에 대해 잘 몰랐던 관계로 김효석이 신성모를 대신하여 내무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사실상 한민당계 김효석이 내무 행정을 장악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실제로 신성모는 김효석에게 내무부의 인사권을 일임했다. 즉, 한민당은 이로써 잃어버렸던 경찰력을 신성모와 김효석을 통해 되찾았다.


이후 한민당은 개헌운동에서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상임위의 결정으로 개헌추진을 중단하고 1949년 2월 10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이청천 세력을 통합해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재발족했다. 이때 한민당은 일민주의를 당시(黨是)로 채택했는데 이는 민국당이 대한국민당을 대신하여 스스로 여당이 되겠다는 표시였다. 즉, 헌법을 개정한다는 방침을 버리고 내각 장악을 통한 여당화에 주력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던 한편, 민국당은 공세 방향을 이범석 국방부장관과 임영신 상공부장관 및 조봉암 농림부장관으로 돌렸다. 먼저 이범석은 1차 개각 당시 교체가 가장 유력시되던 인물이었다. 그는 족청해산과 관련된 문제로 이승만과 잦은 충돌을 빚었으며 나중에는 이승만이 직접 그에게 찾아가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범석은 총리직 사임을 거론하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이승만은 국회 인준을 고려해 개각 대상에서 이범석을 제외했다.


그러나 1949년 2월달에 되면서 이범석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를 동시에 겸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국회에서는 1949년 2월 5일 여순사건의 사후수습 조치로 ‘전임(專任) 국방부장관’ 조항이 포함된 시국수습대책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임영신에 대해서는 1월 13일 실시된 국회의원보궐선거를 문제 삼았는데 바로 한민당이 선거법 위반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1월 17일 국회본회의에서 서우석은 국무위원으로서 입후보하는 것의 법적 타당성 여부와 장관직을 이용한 선거운동 등을 지적하며 임영신의 선거법 위반 문제로 쟁점화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중앙선거위원장 노진설이 국무위원의 선거출마는 정당하다는 요지로 발표하면서 논란의 쟁점화는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다.


제2차 개각 단행과 6월 공세

1958년 재판장으로 향하는 조봉암


반면 조봉암은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바로 조봉암이 추진하던 농지개혁이 한민당의 경제적 지반을 심각하게 타격했기 때문이다. 한민당은 서둘러 그를 끌어내리고자 각종 의혹들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감찰위원회가 깊숙이 개입했다. 1월 31일 감찰위원회는 '농립장관 조봉암의 비행건'을 국회에 통보했는데 주 내용은 양곡매입을 원할하기 위하여 설치된 양곡매입촉진위원회의 예산에서 농림장관이 관사수리비, 응접실, 비품대, 요식대, 출장여비 등등의 명목으로 모두 5백만원치의 돈을 지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찰위원회의 조치는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와 언론에 공개했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소장파 의원들은 즉각 반발하여 이를 정치적인 모략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정부의 농림정책에 대한 파괴공작이자 조봉암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감찰위원회가 성급하게 조봉암을 친 것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2월 4일, 국회본회의에 참석한 박순석 의원은 상공부를 치려다가 농림부를 쳤다는 한 감찰위원의 발언을 폭로했는데 그 전부터 감찰위원회는 중요 사건을 7:3으로 의결한다는 등 정치적 편향성이 계속 지적돼고 있었다. 이는 감찰위원장 정인보가 김성수 사랑방에서 조봉암,임영신의 제거를 주동했다는 최태영 교수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민당과 감찰위원회의는 서로 결탁하여 조봉암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한편, 조봉암은 이승만과 계속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로 미곡 수집 문제과 관련된 문제에서 조봉암이 이승만의 강권 발동 요구를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즉각 특명을 내려 조봉암을 공격했는데 바로 감찰위원회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즉, 감찰위원회가 조봉암을 공격했던 것은 이승만의 특명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조봉암은 1949년 2월 21일 농림부장관직에서 사임했다.


조봉암이 물러나가자 세간에서는 이범석 교체 여부를 포함해 내각 개조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장파 의원들은 조봉암 후임에 민국당원을 임명하면 야당 입장에서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면 민국당 측에서는 농림부장관에 홍성하와 윤보선을 추천하고 내무부장관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에 임명하는 개각을 추진했다. 


이에 이승만은 2월 23일 독촉 총무부장을 지낸 이종현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시켰다. 이는 민국당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3월 21일 단행한 개각은 민국당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장관직에서 해임됐고 그 후임으로 신성모가 임명됐으며 내무부장관직에는 김효석이 임명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내각에 포진된 민국당계 인사는 김도연 재무, 허정 교통, 신성모 국방, 김효석 내무 등 총 4명에 달했다. 이제 민국당에게 남은 것은 상공부 즉, 임영신 뿐이었다.


민국당은 임영신을 제거하고자 조봉암 때와 동일하게 감찰위원회를 통해 임영신을 공격했다. 1949년 4월 4일, 감찰위원회는 임영신의 상공부장관직 파면결정통고문을 국회에 제출했다. 제시된 이유는 귀속사업체를 이용한 선거자금 조달과 금품․향응 수수, 보광인(保鑛人) 선정 과정에서의 부정 등 총 10개 항에 달했다. 그리고 감찰위원회의 통고가 있자 민국당 대변지인 동아일보는 “정당세력을 반영”한 내각 개조를 주문했다. 이는 곧 임영신의 교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민국당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임영신이 감찰위원장 정인보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여러 방송을 통해 감찰위원회를 맹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감찰위원회는 국무위원에 대한 파면결의권이없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민국당의 요구를 일축했다.  이미 조봉암 사건 때부터 정부는 감찰위원회에 국무위원의 징계를 직접 의결하지 못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리고 이를 감찰위원장에게 전달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감찰위원회가 임영신에 대한 파면을 내렸던 것이다.


국회에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소장파 의원들은 이를 정치적인 모략이라고 임영신을 변호했고 반면에 민국당 의원들은 임영신을 맹비난했다. 그러던 도중 검찰의 조사가 실시됐다. 사건 초기 법무부장관 이인은 감찰위원회의의 수사기록을 검토해봤으나 증거가 불충분해 검찰총장 권승렬을 불러 재수사 할 것을 지시했다. 며칠 후, 권승렬이 이인에게 찾아와 증거보완이 다 되었고 임영신의 기소가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임영신의 자진퇴진으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기소 보류를 지시한 다음 임영신에게 찾아가 그를 설득하려 했는데 설득 도중인 5월 28일 검찰이 이승만의 지시를 어기고 임영신을 기소해버렸다. 이에 법무부장관 이인은 사표를 냈고 임영신 또한 6월 3일 사임했다. 이로부터 3일 후, 개각이 단행되었다. 이인 법무부장관 후임에 검찰총장이었던 권승렬이 임명됐고 상공장관에는 서울시장이던 윤보선을, 그 후임은 이기붕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6월 14일에는 윤석구 채신부장관을 해임하고 장기영을 발탁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개각 대상자들 중 권승렬을 제외한다면 모두 민국당 계 의원이었다는 점과 각료들 모두 안동구락부원들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측 기록을 살피면 1949년 9월 이승만의 최고 자문그룹은 모두 세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신성모-허정-윤보선-이기붕 등으로 구성되었고 또 하나는 이들과 경쟁하는 이범석-임영신-윤치영 그룹이며 마지막 하나는 신익희와 김성수로 구성된 그룹이다. 이 중 첫 번째 그룹은 내각을 장악한 민국당계, 나아가선 안국동구락부 소속이고  두 번째 그룹은 이들에 의해 밀려난 초대 내각 각료진들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어째서 민국당 계 인사를, 그리고 유독 안동구락부원들을 내각에 등용시켰을까? 먼저 민국당 계 인사를 등용시킨 이유로는 당시 정치적인 공세를 엿봐야 한다.


1949년 5~6월 시기는 한국 정계에 있어서 가장 격전의 세월이었다.  이승만은 이 시기에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소장파를 제압하고자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발했고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과 김구 암살 등이 연달아 벌어졌다. 바로 6월 공세이다.

1949년 6월 21일 이문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의 구속에 대한 경향신문의 보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정계 밖에서 게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구,김규식 세력과 이들과 교류하는 국회 소장파 의원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특히 김구가 소장파로서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면 이승만 정부 입장에선 엄청난 위기가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소장파 역시 문제였다. 당시 소장파는 진보적인 농지개혁법, 지방자치법, 반민법 등을 추진해 이승만 정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타격이 컸던 것은 반민법이었다. 제1공화국 시기 이승만 정부는 가장 강력한 통치기구로서 경찰을 두고 있었는데 반민법은 경찰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이를 막고자 국회프락치 사건을 일으켰다. 1949년 5월 21일 임시국회가 열렸다. 이미 5일 전부터 중요한 안건이 많다고 8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신익희에게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국회의장 신익희는 국회 개원을 지연시켰다. 신익희는 의원들이 지방에 있어 지연시켰다고 밝혔지만 의원들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시작부터 논란에 흽싸인 채로 국회가 열렸다. 그때는 이미 국회의원 3명이 구속된 상태였다.


이후 국회의원들은 신문기사를 통해 국회의원 3명이 구속됐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리고 검찰총장 권승렬을 불러 체포 경위를 물었다. 이에 권승렬은 이들 국회의원이 3월 하순부터 좌익계열 인사와 내왕하는 것을 탐지하고 내사에 착수했으며, 이들이 남로당 7원칙에 동의하고 이를 남한에 적용하는 것을 협의한 혐의로 구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회의원들은 반발했다. 이때 의원들은 물증 증거가 있냐고 권승렬에게 물었다. 그런데 권승렬은  “이 사건은 물적 증거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소는 있습니다마는 … 없습니다마는 …”  둥 말을 심하게 더듬어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국회의원들을 체포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체포도 엉망이었다.  당국이 발부한 구속영장 4명 중 한명을 체포하지 못한 것이다. 체포하지 못한 의원은 황윤원 의원이었다. 그는 5월 24일 국회에 출석해 울먹이며 무죄를 호소했다. 자신은 그동안 공산당과 열렬히 싸웠으며 그나마 있는 죄라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죄 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국회의원들은 체포된 의원들이 과연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는지 의심했다. 당시 공안사건의 조작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또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대한 공격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파 의원들은 체포된 의원들에 대한 석방 결의안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는 민국당이 다수당을 겸하고 었었기 때문에 재석 184명 중 가 88표, 부 95표, 기권 1표로 부결처리 되었다. 이후 양측의 싸움은 김준연 의원의 제명에 관한 긴급동의안 제기로 옮겨졌다.


반민특위 청사의 모습


한편, 국회 밖에서는 파고다공원에서 세 의원의 석방동의안에 찬성한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다. 민중대회를 개최를 주도한 이들은 모두 반민법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민중대회 참여자 수를 늘리기 위해 동네 반장을 끌어들여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참가시키기까지 했다.  경찰은 이를 방관했다. 시위대는 6월 2일 중앙청으로 행진했고 다음날에는 반민특위로 몰려와 난동을 피웠다.


즉, 시위대는 바로 반민특위였다. 국회는 즉각 조사를 하여 이 시위를 모략한 이들이 누구인지 밝혀냈다.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등이 이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됐다. 그런데 6월 6일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경찰을 인솔하고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들은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무장해제하고 반민특위 직원들을 집단구타했다.


국회는 이를 대응하고자 경찰의 테러로 규정한 다음 국무총리 이하 전 각료의 퇴진, 반민특위 원상복구를 결의안에 담았다. 그러나 장경근 내무차관이 국회에 출석하여 본 사건은 내무부의 책임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고 6월 7일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특경대 해산은 자신이 지시했다고 밝혔다. 국회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반민특위 인사의 쇄신, 경찰관 신분의 보장을 주장했다.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총퇴진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민국당은 즉시 심의 거부를 표명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국회는 폐회를 결정했다. 그런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국회를 폐회한 다음날 6월 21일, 체포되지 않았던 황윤원 의원과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의원들이 헌병대에 의해 줄줄히 체포됐다. 6월 25일에는 국회부의장 김약수마저 체포되었다. 이들은 남로당에 협조했다는 혐의와 정부 파괴공작을 모략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된 것이었다. 이후 다음날인 6월 26일 김구가 포병사령부 소속 장교인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로써 이승만 정부의 6월 공세는 막을 내렸다.


한편, 유엔 한국위원단의 인도 대표인 싱(Dr. Anup Singh)은 이 6월 공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에 따르면 이 정부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이 국가는 사실상 경찰국가(Police state)입니다. ...(중략)...미 당국은 한국 정부에 스며드는 사상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정치고문 중 한 명은 저에게 "현재 한국의 성향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파시즘으로 갈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Dr. Anup Singh, 1949.7.11

 

김구 장례식


이상에서 살펴보듯, 6월 공세에 있어서 민국당의 역할은 지대했다. 정부로서 여당의 기능을 해냈고 국회프락치 사건에서 체포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해야 한다는 결의안에 모조리 반대표를 던져 부결시켰다. 이승만은 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중도파를 타격하기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의회의 저항을 최소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국당을 소장파로부터 분리시켜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의 예상대로 6월 공세에서 국회의 저항은 매우 극심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내각 총퇴진과 반민특위 원상회복, 책임자 처벌 때까지 정부제출 법률안과 예산 심의 거부를 국회에서 결의했고 개헌 논의도 구체화되었다. 동성회가 “발본적 항구책”으로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했으며 신정회 이정회 등이 이에 호응해 개헌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일부 민국당 의원들도 가담했다. 개헌 추진 연판장에 서명한 국회의원 수는 80명을 넘겼다.


그러나 민국당은 각료 총퇴진 결의에 유감을 표하고 개헌 추진에 대해 시기상조론을 폈다. 6월 13일 열린 상임당무위원 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는 민국당의 개헌 반대 주장이 우세했다. 결국 소장파 동성회 등은 개헌을 포기해야만 했다. 더구나 민국당은 국회내 친이승만 세력과 규합해 6월 6일 결의의 전복을 모색했다. 이들은 6월19일 소장파가 제출한 회기 연기에 관한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7월2일 개회한 임시국회에서 정부제출 법률안 및 예산안 심의거부 결의안도 부결시켰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민국당의 개각 요구를 모두 들어줌으로서 앞으로 있을 6월 공세에서 민국당을 국회의 저항을 최대한 막는 방파제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성공했으며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6월 공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시말해 민국당의 요구를 들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소장파를 견제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내각에 안동구락부원 출신이 많은 이유는 이영석에 따르면 우선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해방 후, 안동관이라 불리던 윤보선 자택에 안국동구락부원들이 모여 앉아 '한국국민당' 창당을 추진했다.


이후 이들은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등 ‘원서동 그룹’과 합류해 한민당을 결성했고, 그 뒤에도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실무 면에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주요 멤버는 허정 ,김도연, 신성모, 김효석, 윤보선, 이기붕, 오위영, 장기영 등이었다. 이때 주요 멤버들은 주로 구미 유학파 출신으로 일제시기부터 동지회 등을 통해 이승만과 인연을 맺은 경력이 있었다. 


즉 안동구락부는 한민당 창당 멤버로서 민국당 중진그룹에 속하지만 1920년대부터 이승만과 오랜 친분을 쌓았고 충성심 또한 입증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비록 민국당이지만 이범석,윤치영,장택상,임영신과는 다른 측근 세력인 안동구락부원들을 적극적으로 내각에 등용시켜 자신과 민국당으로 연결되는 안동구락부원들을 통해 민국당의 여당화 전략을 수용한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세력인 안국동구락부원들만으로 내각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는 직계그룹만을 등용시킨 것으로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가 없는 민국당원들은 논의대상이 아니었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국당은 여당화 전략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겉으로는 여당으로 보일 뿐 전체적으로 볼 땐 여당이 되었다고 보기엔 다소 곤란하다. 


오히려 이승만이 민국당을 권력의 테두리 안에 묶어두려 했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것으로 보인다. 즉, 민국당을 반대 진영에 두기 보다는 정부 지지 세력의 범위에 포함시키면서 동시에 이들을 통제 및 억제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당시 의회 상황를 살펴보면 더 뚜렷해진다. 당시 국회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동성회가 몰락한 상황이었다. 이 상태에서 민국당과 일민구락부가 양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때 일민구락부는 대한국민당의 실패 후 여당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 윤치영 임영신 박준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일민구락부는 그 한 계통을 안국동구락부가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이승만의 의지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승만은 3월 2일 국무회의에서 의회 내 여당 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국회의원 출신 국무위원이 중심이 되어 의원 포섭에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이로써 일민구락부는 김효석을 매개로 내각과 연결되었다. 김효석은 “일민구락부의 덕대”라 불리며 그룹 내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일민구락부의 한 축은 안국동구락부가 담당하고 또 한 축은 윤치영,임영신 등이 담당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다면  국회 내 세력 구도는 일민구락부의 안국동구락부, 윤치영, 임영신 세력과 민국당의 형세를 띄게 된다. 이는 이승만이 안국동구락부를 활용함으로서 민국당을 제어한다는 전략이 국회에서도 관찰된다는 뜻이었다. 


민국당은 난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여당적인 정당이었지만 일민구락부로 인해 역할이 서로 겹치게 되므로 이를 독점적으로 고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윤치영과 임영신 그룹은 민국당과 안국동구락부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결국 민국당과 일민구락부는 정부 지지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구도로 정치를 이어 나갔다.


이승만은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충성경쟁을 주도한 이승만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욱 유리한 상황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각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은 채로 국회를 정부 지지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6월 공세 이후 국회에서는 야당이라고 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장파는 6월 공세를 통해 몰락했고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연설한 일민구락부와 사실상 여당과 다를 바 없는 민국당만이 국회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물론 족청계 의원들의 모임인 청구회가 개편한 신정회, 대한노농당 등 몇몇 군소 정파들이 있었지만 정부에 대한 명확한 견제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국회에 의한 대정부 공세는 1949년 하반기에 들어 급속도로 몰락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게 입각추진을 하여 여당적인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정부를 압박하고자 했으나 이승만은 오히려 안국동구락부원 등용을 통해 민국당의 전략을 전면적으로 역이용했다.


이로써 그는 야당 없는 국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핸더슨은 이에 대해 "밖에서는 국민회를 통해, 안에서는 일민구락부를 통해 정당 없는 정부를 만들기 위한 이승만의 시도"라고 논평했으며 동시에 이것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여당이되고자 하는 민국당의 이중적 시도에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결국 민국당의 전략은 이승만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에게만 득이 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내각책임제 개헌 논의

5.10 총선거에서 좌익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창을 든 모습, 옆에 경찰이 감독하고 있다


6월 공세 이후, 일민구락부와 대립하고 있던 민국당은 1949년 가을 들어 친이승만 노선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바로 대한국민당의 원내조직 복원과 원외에서 추진되는 국민운동 강화 때문이었다. 이는 원외정당으로 머물던 대한국민당이 단일정당으로 다시 편성됐다는 점과  남한 최대 조직인 국민회가 행정력과 결합된 반관반민단체로 재강화된다는 점 등, 총 두 가지의 위협이 민국당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대한국민당이 원내정당으로 복원된 것은 1949년 9월 29,30일에 열린 정당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에서였다. 


일민구락부와 통합을 결정한 것인데 이 때문에 윤치영이 대한국민당 최고의원으로 선임됐다. 우덕순, 신흥우도 최고의원으로 선임됐다. 이후 윤치영은 일민구락부와 대한노농당, 신정회, 무소속 등 의회 내 非민국당 계를 상대로 이른바 4파 합동운동을 추진했다.  이때 윤치영의 의도는 이들 4파를 하나로 통일하여 대한국민당으로 발족하려는 것이었다. 예상 인원은 신정회 전원(23명)과 일민구락부 약 30명, 대한노농당 약 20명, 무소속 약 9명 등 90여 명이었다.


그러나 일민구락부 내부에서 이러한 작업에 대해 반대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당시 일민구락부가 윤치영-임영신 그룹은 물론 안국동구락부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고 나아가 민국당원 15명이 9월 교섭단체 등록 때 구락부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4파 합동운동이 일민구락부의 공의(公義)가 아니며 일부 의원들의 독단적행위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4파 합동운동을 주도하는 윤치영과 정준을 제명했다. 그리고 4파 합동대회가 열리던 12월 22일에는 20여 의원들이 모여 일민구락부 잔류를 결의했다.


결국 일민구락부는 대한국민당의 원내조직 재건을 계기로 분열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즉, 민국당 對,非,反민국당’의 대립구도가 전면화된 것이다. 12월 22일 4파 합동대회에서 윤치영은 대한국민당으로 발족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참가인원은 일민구락부 29명, 신정회 전원 23명, 대한노농당 20명, 무소속 9명이며, 성명 발표를 보류한 의원들이 약 십수 명이었다. 이들은 연락위원으로 윤치영, 이재형, 정준 등 7명을 선출하고, 이후 이승만을 방문해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국회 휴회기간 동안 4파 합동운동 측은 의원 포섭공작을 계속하여 국회가 다시 열린 1월 26일 마침내  ‘대한국민당 원내정치위원회'로 정식발족하고 위원장에 윤치영, 부위원장에 오석주∙배헌, 교섭회 대표에 이재형을 선출했다. 이어 다음날에는 52명의 교섭단체 명부를 국회에 제출했다. 출신별로 보면 일민구락부 14, 신정회 23, 대한노농당 11, 무소속 3, 민국당 1명 등이었다. 이로써 원내세력 분포는 민국당 69, 대한국민당 52, 일민구락부 40, 무소속 25명으로 바뀌었다.


이 구성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일민구락부 일부와 신정회가 양대축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신정회 전신이 족청계 중심의 청구회임을 감안한다면 대한국민당 재건은 윤치영,임영신 그룹이 일민구락부 내 안국동구락부와 결별하고 이범석 세력과 민국당의 공세에 의해 밀려난 전직 국무위원들을 규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민국당에 대항해 단일전선을 형성한 것이라  볼 수있다.  물론 다르게 본다면 이승만이 총선을 앞두고 민국당과 연결된 안국동구락부를 배제하면서 초대 내각을 이끌던 그룹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한국민당의 성격은 일민구락부와 민국당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역학지도상 이승만 지지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소속 의원들의 과거 경력을 보면 그리 부르기에는 다소 곤란하다. 대한국민당을 구성했던 이들 중 대부분은 1949년 전반까지 소장파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는 의원들이었다. 


백운선의 연구에 의하면 소장파는 동성회를 주축으로 청구회, 대한노동당, 이정희 일부가 연합해 형성되었고 그 수는 40~80명 선이었다. 이후 소장파가 6월 공세를 거쳐 분해 과정을 겪게 되자 의원들은 신정회와 대한노농당으로 대거 흡수됐으며 추후 4파 합동이 추진됐을 무렵에는 전부 대한국민당으로 집결했다. 이는 실제 구성인원을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대한국민당 전체 의원 52명 중 42명이 이런 경우였고 오히려 제헌의회 초기부터 이승만 계열로 활동해 온 의원은 고작 10명이었다.


다시말해 대한국민당의 원내조직 복원은 소장파 몰락 후, 정계구도가 反민국당으로 변하면서 친이승만 계열 인사와 소장파 인사들이 민국당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대한국민당의 성격을 '이승만 지지세력'이라고 지칭하긴 보단 '反,非 민국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편, 대한국민당 원내정치위원회가 교섭단체 명부를 제출하던 날, 국회에서는 또 하나의 중대 안건이 제출되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었다. 사실 1949년 12월까지 국회에서 개헌론은 그리 대두되지 않았다. 하지만 1월 13일 내무치안위원회의 국정감사 논의 석상에서 개헌 주장이 제기된 것을 계기로 개헌론은 급격히 급격히 대두화됐다. 1월 18일과 20일 원내 각 파가 회합해 이 문제를 협의했다. 민국당은 적극적으로 개헌론을 주장했다. 1월 19일 민국당은 최고간부 및 국회의원, 중앙위원연석의원에서 개헌추진을 공식 결정했다.  당 간판을 내건 채 개헌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시 민국당이 갑자기 개헌론을 들고 온 까닭은 총선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反민국당 현상을 타개하고 나아가 행정수반으로서 계속 군림하기 위해 들고온 것으로 보인다. 즉, 이승만의 독자세력 운동이 본격화되자 민국당은 권력연합 구조를 내각책임제 도입을 통해 이를 제도화시키려던 것이었다. 이승만의 권한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권력 교체 시도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개헌안을 공고한 뒤, 2월 6일 김효석 내무부장관을 경질했다.


이때 내각책임제 문제는 4파 합동운동에도 크게 번졌다. 당시 4파 운동세력은 비록 反민국당이라지만 이승만에 대한 태도나 정치적 지향은 엇갈렸다. 특히 개헌문제는 이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국민당을 구성했던 신정회를 비롯한 소장파는 이승만,행정부 세력의 폭주를 막기 위해 민국당보다 더 격렬히 내각책임제 개헌을 요구한 바 있었다. 


다음으로 일민구락부의 경우 내각책임제 개헌에는 부정적이지만 1949년 9월 이래 총선을 연기하려는 정부 측과 공명하여 국회의원 임기연장 개헌을 추진했다. 그런데 1950년 1월 제출된 개헌안에는 "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의 사유로 총선거가 불가능할 때에는 차기 국회가 개회될 때까지 그 임기는 연장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는 일민구락부 등 임기연장 개헌을 선호하는 의원들을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자 4파 합동측은 개헌 찬반으로 갈렸다. 개헌안에 서명한 의원만 11명이었고 20명 안팎이 공식,비공식으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은 순수독촉계였고 신정회 출신은 모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서로 분열되자 개헌안에 대한 논의는 격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950년 2월 하순에 들어 대한국민당은 개헌 반대를 공식 결의했다. 이는 대한국민당원들이 경무대로 빈번히 내왕한 결과였다. 2월 23일  전체회의에서 개헌반대운동을 결정한 대한국민당은 다음날부터 반대 의원들을 상대로 서약서를 받았다. 또한 선거 후원 등을 조건으로 의원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교섭단체 명부 제출 당시 52명이었던 의원 수가 2월 25일 66명, 26일 73명, 3월 10일에는 77명으로 증가했다. 원내 제1세력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한국민당은 서로 다른 4개의 정파가 섞인데다 개헌반대 공작을 통해 급격히 팽창했기 때문에 응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3월 14일 개헌 표결에서 대한국민당은 백지투표를 실시해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느슨한 정파연합으로서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킨 셈이었다. 


5.30총선과 신당창설 논의

5.30총선의 결과, 출처


개헌안 부결 후 정국은 선거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한때 이승만은 예산안 심의의 촉박성을 들어 선거를 연기하려 했지만, 여론의 반대와 미국의 압력 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4월 19일 정부는 5월 30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이때 선거 과정에서 이승만이 가장 예의주시했던 것은 중간파와 개헌파로 이들의 국회 진출을 최대한 막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에 걸친 남행 유세에서 들르는 곳마다 중간파와 개헌파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특히 개헌파가 당선되어 개헌운동을 일으킬 때는 소환할 것을 주문했는데 이는 차기 국회의 최대 의제가 개헌이 될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였다. 앞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시도한 바 있는 민국당 뿐 아니라 이승만 또한 선거 전 이미 '총선 뒤 직선제,양원제 개헌 추진'을 공식화한 상태였다.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을 처음 언급한 것은 3월 14일 내각책임제 개헌안 부결 뒤 발표한 담화에서였다. 여기서 그는 총선 후 양원제,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이번 경험으로 말미암아 한층 다시 각오한 것은 국회의 일원제가 심히 위태하니 이번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룬 뒤에는 먼저 상의원제도를 만들어 상하의원을 두어, 어떤 단체나 몇몇 개인들이 변동을 일으키기에 어렵게 만들어 보장이 되도록 할 것이고 또 따라서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총선거에 부쳐서 당초 헌법 기초시에 예상 한대로 완성해 놓은 것이 지혜로울 것이니 일반 관민들은 이에 주의해서 속히 도달시키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울신문, 1950.03.15


이승만은 3월 17일  담화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왜 벌써부터 개헌 추진을 들고 나온 것일까 이승만 개인의 주장에 따르면 개헌의 근거는 헌법의 간선제와 단원제 규정이 정부 조직의 지체를 막기 위한 일시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제헌국회 당시 이승만의 발언에서 확인이 되는데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와 직선제, 양원제를 지지했고 다만 현시국에서 전국 단위의 선거 실시가 곤란하므로 우선은 간선제로 하고 의회구성도 정부수립 후 상원을 설치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집권 후 계속 되어온 의회 및 한민–민국당과의 갈등이 개헌 문제의식을 보다 구체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먼저 양원제는 이승만이 국회에서 내각 개조 및 내각책임제 개헌론을 주장할 때 이에 대한 견제 카드로 활용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직후 국회가 시국수습대책결의안을 통과시키자 그는 원로원 창설 의사를 피력했고 12월 18일 정기국회 폐회식에 참석해 상원 설치를 위한 구체적 논의를 촉구했다. 


이때 이승만이 상원 설치를 주장한 것은 국회가 내각 개조의 근거로 지적하는 정부 기반의 협소성 문제를 보완하는 동시에 민의원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간선제 규정은 제헌헌법의 ‘절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였고 국회 심의 과정에서 무소속 계열이 그 모순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승만 역시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이는 1948년 6월 15일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하게 된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책임제로 결의한 모양”이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이 된다. 즉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을 주장한 것은 단순히 대통령 선거방식만을 바꾸는데 것이 아닌 대통령중심제의 권력구조를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정부 신임의 근거를 국회가 아닌 직접 국민에게 둠으로서 행정에 대한 국회의 개입을 차단하고 헌법상 의회 우위의 구도를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애초에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친이승만 세력은 대한국민당과 대중운동 단체들로 분산되어 있었고 그 대한국민당 역시 대부분의 세력이 과거 국회 소장파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또한 개헌부결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국민당은 그저 느슨한 정파 연합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민국당 창당 후 이승만은 정당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며 초당파적인 자세를 고수했기 때문에 특정 세력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에도 쉽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은 반대 세력의 의회 진출을 최소화하고, 선거 이후 이루어질 원내 세력 재정비를 통해 직선제 개헌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친이승만 계열에 의한 민국당에 대한 공세가 실시되었다. 대한정치공작대 사건과 김효석 내무,윤보선 상공, 허정 교통, 권승렬 법무부장관 경질, 그리고 선거 한달 전, 대규모 경찰관 이동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에 대한 김태선의 보고서,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정계 중요인 동정(動靜) 관한 건,'이범석은 소위 신정회를 중심으로 대한국민당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자기 야망을 달성코자 획책한 바, 최근 윤치영 국회부의장 및 백성욱 내무부장관과 결탁하여 소위 '소론파' 득세의 날도 멀지 않았다고 선전하여 표면 이부통령을 지지하는 언동을 고수하고 이부통령에 접근하면서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최근 이부통령 사저에는 과거 김구파가 상당 출입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 민국당 자체를 마비시키고자 하는 공작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이범석, 윤치영, 임영신, 백성욱 등으로 모두 초대 내각 그룹들이었다. 이 때문에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대한정치공작대는 이승만 정부 사설 정보단체였으나 1950년 4월 김성수, 조병옥, 백관수, 김준영 등 민국당계 거물 인사들이 군경에 잠입한 수천 명의 남파간첩과 접촉해 이승만 및 정부 요인을 살해하고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정치적인 모략을 꿰했다. 그러나 오제도,선우종원 검사의 수사로 이 사건은 조작으로 판명났다. 이때 기소문에는 백성욱 내무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신태영, 헌병사령관 최영희, 치안국장 서리 김병원, 경기도경 찰국 사찰과장 박근용, 장석윤, 정운수 등 대한국민당과 연관된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또 김태선이 미 대사관에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의 배후인물은 바로 이범석이며 자신을 차기 대통령으로 올리기 위해 벌인 공작이었다고 한다. 즉, 이범석 세력이 국방부장관 신성모를 제거하고 군과 경찰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교체한 다음 민국당을 파괴하여 총선에서 승리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이 대한정치공작대 사건과 관련된 보고를 받을 때마다 굉장히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여하튼 이러한 일련의 공세를 거쳐 5.30총선이 치뤄졌다. 혼란기 속에 치뤄진 선거의 결과는 이승만 정부, 모든 주요 정당과 입법부 등 제도정치권 전체의 패배였다. 대한국민당과 민국당은 나란히 24명씩을 당선시켜 1/3선으로 줄었고, 각각 선량동지회와 입후보자동지회를 구성해 선거에 참여했던 국민회와 한청에서는 14명, 10명만이 당선되었다. 또한 윤치영을 포함해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이 대거 낙선했으며, 재선된 인물은 31명에 불과했다. 


양대 정당의 의석수는 급감한 반면, 무소속 당선자수는 126명에 달했다. 그리고 주목의 대상이었던 중간파의 진출 역시 기대에 미칠 바가 아니었다는 것이 5.30총선에서 증명되었다.  조소앙, 안재홍, 윤기섭, 원세훈, 장건상, 오하영, 여운홍, 조시원 등 거물급 인사들은 총선에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지만 고작 10여 명 안팎이었고, 결정적으로 조직화가 되어 있지 못해 원내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들이 추후 어떤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총선의 결과는 개헌 추진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그리 크게 불리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절반을 승리를 거뒀고 이에 따라 흩어진 세력들을 다시 규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면 非민국당 계열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작업이 실행되어야 했다.  결국 이승만은 태도를 바꿨다. 6월 2일 이승만은 중간파의 국회 진출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자유분위기 밑에서 실시된 총선 결과 소위 중간파라고 하는 몇몇 유위(有爲)한 분들이 피선되었는데 내가 알기까지는 이 분들이 유달리 중간파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본시 우리는 공산당이라도 민국정부를 지지하고 돌아오면 널리 포용하려는 것이 주장이므로 5∙10 선거를 뽀이콧트한 이들이 총선거에 입후보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정부를 지지하는 태도를 공개로 표명한 것이고 지금 국민의 지지를 받아 몇 분 훌륭한 인재가 당선되었으니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은 다 폐지하고 함께 일하려고 하니 매우 기뿐 마음으로 환영하는 바이다.


백성욱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중간파를 참다운 애국자라고 지칭하며 과거 공산당과 한민당이 자기네 당원이 아닌 사람을 무조건 중간파로 규정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승만은 정당에 대한 태도도 바꿨는데 당시 이승만은 정당 발달에 주력할 의사가 없느냐는 기자 질문을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정당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둘 또는 셋의 정당이 주의주장을 내세워 국민대중을 조직 훈련해 간다면 퍽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파쟁을 일삼기 때문에 도리어 국사를 위해서 해가 되고 있다. 公黨을 만들어보려고 무척 애썼으나 모여드는 사람들이 당의 당강의 실천을 위해 싸우지 않고 세력 싸움에만 열 중하여 결국 徒黨化하고 말았기 때문에 아직은 정당의 필요가 없다고 단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가 출현해서 공정한 정당을 만들려면 나는 솔선해서 입당할 생각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주장해오던 정당무용론을 버렸다. 이승만은 정당 조직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대한국민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선거 전에 국민당이라는 것이 있어 外論에 내가 배후에서 여당으로 조성하고자 후원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며 '이 허위사실을 선거 전에 설명하려 했으나 국민당 측의 손해가 되겠으므로 중지하였다'고 밝혔다.


이는 명백히 대한국민당을 버림으로서 중간파를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6월 1일부터 2일까지 조소앙,여운홍 등 중간파 지도자를 연이어 만났다. 사실 이승만은 전부터 대한국민당의 신당 창설 계획안인 ‘평민당 공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했던. 조소앙, 안재홍 등 중간파 일부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국민당이 총선에서 실패하면서 그는 대한국민당을 버리고 중간파로 눈을 돌린 것이었다. 대한국민당의 패배가 자신의 패배로 인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한편, 선거결과에 따라 정치세력 재편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대거 일어났다.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정당은 대한국민당과 중간파 계열이었다. 대한국민당은 6월 2일 부차장회의에서 무소 속 및 중간파 포섭 문제를 협의하고, 조소앙,안재홍 등과의 합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6월 3일 우덕순과 배은희가 안재홍을 방문했고, 조소앙에 대한 교섭은 윤치영이 맡았다.



안재홍


이승만 또한 6월 1일 경무대에서 조소앙과 장시간 요담하고, 다음날에는 중앙청에서 안재홍을, 경무대에서 여운홍을 각각 만났다  이승만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로 맞이해 주었다. 중간파 인사들의 행동은 신중하면서도 동시에 적극적이었다. 안재홍은 “대한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은 신중히 생각할 문제”지만, “공동보조를 취하여 우호적으로 협조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때 평민당 공작이 재개되었다. 무소속 중간파 인사들 중 일부를 대한국민당으로 입당시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6월 7일 중간파 인사들이 모여 과거 합의 내용을 검토했으며 나아가  대한국민당에서는 사회당과의 통합논의도 진행되었다.  조소앙은 6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국민당을 막론하고 어느 당이든지 민족진영 대동단결 원칙하에 당을 초월해서 백지로써 임해야만 점차 합동공작이 전개될 것'이라며 '합동공작을 위해 일관 노력하겠다'고 발언했다.


이를 통해 중간파 인사들은 주로 대한국민당으로 입당하는 것보단 합당을 통한 신당 결성을 원했다. 그러나 국민당에서는 당 합당파와 당 고수파 등으로 나뉘어 갈등이 일어났다. 당 고수파를 대표하는 이는 윤치영이었다. 그는 6월 6일 기자회견에서 중간파 인사들과의 입당교섭을 전면 부인하며, “포섭하려고 들지 않으나 자진해서 입당하리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와 반대로 신정회 및 대한노농당 계열은 당명을 바꿔서라도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등을 포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6월 12일 대한국민당 임시의원대회는 중간파 포섭 문제를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남북협상의 犯道 아래 침묵을 지켜오던 소위 중간세력이 불우의 동정을 입어 다시 정계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우리 당은 여기서 우리나라의 안정세력으로써 중심적 지위를 견지하면서 보수세력에서 이탈되는 부분을 흡수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세력에 대하여 이것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될 것이다


결의안에서 보듯이 당 고수파의 승리였다. 이는 곧 평민당 공작이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합당을 추진했던 이들은 중간파 포섭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이에 중간파 인사들은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해 무소속구락부를 조직하여 대한국민당과는 원내에서 보조를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정계는 6월 19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과 교섭단체 등록을 앞두고 각자 세 규합에 나섰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무소속의 동향이었다. 126명에 달하는 무소속 의원은 국민회 20, 한청 10, 대한국민당 10, 민국당 15, 중간파 20명 정도가 포섭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약 50명만이 순수무소속이었다. 


이는 중간파 계열의 포섭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먼저 친이승만 계열이었던 국민회는 6월 7일 각도지부장-중앙간부 연석회의를 열어 ‘국민동지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이승만의 승인을 얻어 활동을 개시했다. 이어 6월 17일 39명의 의원이 모여 제1차 발기준비위원회를 열었다.  


다음으로 한청은 20여 명의 당선자들을 모아 ‘청년구락부’라는 명칭으로 교섭단체 등록을 준비했다. 한때 국민회 측과의 합동설이 전해지기도 했으나 별개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대한국민당으로 당선된 남송학이 의원 포섭에 나서 6월 24일 모두 22명으로 민정동지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반면에 중간파는 '무소속구락부'란 이름의 교섭단체를 발족시켰는데  6월 24일 46명의 의원들이 모여져 만들어진 무소속구락부에는 이 중간파 인사들이 없었다. 김동성, 조헌영, 곽상훈, 김광준, 윤길중 등 대체로 非민국, 非이승만 계열에 있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훗날 공화구락부로 활동하여 내각책임제 개헌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교섭이 거의 완료됐을 무렵, 명부 제출 마감일 하루를 앞두고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서울은 단 3일만에 함락됐고 서울에서 피신하지 못한 중간파 인사들은 그대로 납북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정치도 이와 함께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