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왕과, 그를 계승한 왕 사이에서 서열이 바뀔 수 없다


유교에서는 서열을 중요시하고 

한번 맺은 군신관계는 뒤집을 수 없는것으로 봄


이 때문에 노나라에서 문공이 제사를 지낼 때 희공의 신주를 민공의 앞에 놓은 적이 있는데 이걸 공자가 비판했음.


민공이 먼저 왕이 됐고, 나중에 그 형인 희공이 민공을 계승했는데, 희공의 아들인 문공이 ’그래도 희공이 형이잖아‘ 하면서 신주 놓는 서열을 뒤집어 버린 것임.



“그러나 공자는 민공의 신하였던 희공을 민공의 앞에 둔 것은 군신(君臣)의 상하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예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에 관[제사의식의 일부]의 이후는 보고 싶지가 않다고 말한 것이다.”



2. 주자(朱子) 가라사대,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하는 의리는 없다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하는 의리는 없다" 

주자(朱子).

예송논쟁 때 송준길이 “대왕대비[장렬왕후]와 선왕[효종]과는 사실 모자(母子)에다 군신(君臣)의 의리를 겸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서인들은 모두 대비와 그 아들인 왕 사이에 군신의 의리가 있는 것으로 봄.


이 때 윤휴가 ‘대비인 어머니도 왕에게는 신하에 불과하다’라는 설을 주장했고 이걸 신모설(臣母說)이라 부름.


이에 대해 송시열이 주자를 인용해 반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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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열이 또 반박하기를, “내종의 부녀는 모두 신하이다. 따라서 임금에게 대하여 감히 촌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모두 참최복을 입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대왕대비[장렬왕후]는, 우리 선대왕(先大王)[효종]이 신하되어 섬기던 비인데, 본복(本服 기복)을 입지 않고 어찌 도리어 신하인 내종의 다른 부녀같이 할 것이냐.” 하였다.


[윤]휴가 또, ‘무왕(武王)이 자기의 어머니인 문모(文母 문왕의 비)를 신하로 하였다.’는 옛글을 인용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미 유시독(劉侍讀)의 말을 인용하여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하는 의리는 없는 것이니 옛글에 있는 그 말은 문모를 신하로 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의 처인 읍강(邑姜)을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후세의 사람이 어찌 감히 이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3. 실제로 상왕이나 대비에 대한 왕의 공식 자칭은 ‘신’(臣)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왕들이 상왕은 물론이고 대비에게 존호를 바친다든지 하면서 바치는 책문에 보면 상왕이나 대비를 전하(殿下)로 높여 부르고 스스로를 신(臣)으로 낮추어서 자칭함.


세종이 상왕과 대비인 아빠 엄마에게 바치는 책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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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의 책(冊)에는,


"국왕 신(臣) 아무는[國王臣某] 재배하고 삼가 책(冊)을 받들어 말씀을 올립니다.[再拜謹奉冊上言] 성신(聖神)의 신묘(神妙)함은 비록 형언할 수 없사오나, 신자(臣子)의 정리(情理)로서는 반드시 휘호(徽號)를 높이게 됩니다.”


[중략]


대비의 책에는,


"국왕 신(臣) 아무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삼가 책을 받들어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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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출처는 대역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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