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동원한 고려의 여진 정벌은 처음에는 한 달여만에 작전 목표를 완수할 정도로 성공적인 영토의 확장을 이루었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


그러나 고려군은 큰 오판을 한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새로 확장한 영토의 길목이 사전에 입수했던 정보와는 달리 여러 개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초 고려군은 동북 9성 지역에는 길주 지역의 길목 하나뿐이라 들어 길주를 시작으로 함주까지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막상 9성을 개척한 후엔 길주성 쪽 길목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려 정부의 예상과 달리,  9성을 따라서도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어 여진인들이 동시다발적인 파상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나라에서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기근, 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다. (중략) 적이 (동북 9성을 잇는 도로마다)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


9성 전역에서 전투가 일어나니, 고려 정부의 예상보다도 방어에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이 상당히 소모되어 재정에 부담이 되었고, 민심 또한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벌 2년차인 1109년 5월, 상원수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군 수만이 사묘아리의 여진군에게 대패하고, 9성 중 2개 성이 여진족에게 함락당하기까지 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어 더 이상 9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 정부가 슬슬 한계에 다다를 즈음, 마찬가지로 한계에 다다르던 여진족이 화친을 청하고 이전의 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청하자, 고려 정부는 결국 9성을 반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