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작은 사진 아래로)


옛날 아주 옛날 올해 초에 어떤거 찾아서 번역해볼까? 라고 했던거에 누군가 포병에 대한 대응을 원해서 찾아보다 발견한 보고서임.

본래는 할 생각이 없었지만 말단 보병선에서 포격에 대응할 수 있는것은 예전에 올렸던 레인저 핸드북 부문 정도에 불과한 대응밖에 없었기 떄문에 결국 건드려보게 되었음


한동안 번역이 굉장히 뜸했는데 휴가 보내게 되면서 나태해지고 흥미가 떨어지게 되어 뜸해지게 되었으나 이제 다시 끌어올려보려고 노력해볼게


내 번역이 항상 그렇듯 전문성 없는 그냥 번역 그 자체이기 떄문에 어느정도의 오류 및 현실에 대입할때 용어 등의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음


또한 포병/포격 대응에 대한 부분에 중점을 두느라 포병의 분석/부록 등의 문단은 번역하지 않고 제외하였으므로 읽는데 참고 바람


상당히 오래 걸렸는데 이 외에도 혹시 보고 싶은거나 번역 원하는게 있다면 댓글등으로 부탁할게














CSI (Combat Studies Institute) 보고서

 

NO.13

 

집중 포병에 대한 전술적 대응

 

Combat Studies Institute

USACGSC

Fort Leavenworth, Kansas 66027-6900

 







 CSI 보고서는 공식 조사에 대한 대응으로 작성된 단기 연구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들은 주로 2차 자료를 기반으로하며, 고려 대상 주제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합니다. CSI 보고서에 표현된 견해는 작성자의 것이며, 군부나 국방부의 입장을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Combat Studies Institute

Missions


 전투 연구소 임무 전투 연구소는 미국 육군 지휘부 및 장군 직무 교육원인 포트 리븐워스의 부서  활동으로 1979년 6월 18일에 설립되었습니다. CSI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합니다.

  1. 육군의 교리적 관심사에 관련된 역사 주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결과를 다양한 형식으로 미 육군과 예비 부대들을 위해 발표합니다.
  2. 군사 역사를 교육하기 위해 미 육군 지휘부 및 장군 직무 교육원에 지도를 제공하고 다른 부서들이 교육에 군사 역사를 통합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3. 미 육군 교육 및 교리 지휘부(TRADOC)의 대리기관으로서 통합적이고 점진적인 군사 역사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조정을 위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 임무는 TRADOC 학교 체계에서 군사 역사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조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차

Chapter

  1. Soviet Artillery In Battle: A Historical Perspective

By Lieutenant Colonel James R. Holbrook

전투에서의 소련 포병역사적인 시각

제임스 R. 홀브록 중령 

  1. World War I: Elastic Defense and the U.S. 3d Division at the Marne River

By Lieutenant Colonel Michael E. Dunn

             1 세계 대전탄력적 방어와 마른 강에서의 미국 사단

                           마이클 E. 던 중령

  1. The Impact of Massive Artillery Fires on Command, Control, and Communications in the European and North African Theaters During World War II

By Lieutenant Colonel Roy R. Stephenson

2 세계 대전의 대규모 포격의 지휘통제  통신이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역에 미친 영향

              로이 R. 스테픈슨 중령

  1. German Counterartillery Measures on the Eastern Front in 1944-45: Operation Bagration

By Dr. Samuel J. Lewis

             1944-45 동부 전선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독일 대포병 전략

                           세뮤얼 J. 루이스 박사

  1. Japanese Counterartillery methods on Okinawa, April-June 1945

By Dr. Thomas M. Huber

                     오키나와 전선, 1945 4-5월의 일본 대포병 전략

                                   토마스 M. 후버 박사

  1. The Korean War: The United Nation’s Response to Heavy Bombardment

By Dr. William Glenn Robertson

                     한국전쟁에서의 집중포격에 대한 UN군의 대응

                                   윌리엄 글렌 로버츠슨 박사

  1. The Korean War: Chinese Forces’ Response to Heavy Bombardment

by Dr. Gary J. Bjorge

             한국전쟁에서의 집중포격에 대한 중국군의 대응

                           개리 J. 비요르지 박사

  1. Israeli Defensive Measures Against Arab Artillery

By Dr. George W. Gawrych

                     중동 포병에 대한 이스라엘 방어 전략

                                   조지 W. 가르치 박사

 

 

 

 

 

서문

이 연구의 초점은 다양한 국가의 군대가 대규모 집중 포병 또는 다른 유형의 준비 사격의 위협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아보는데 있습니다. 모든 연구가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으며, 각 군대의 성공 또는 실패의 이유는 현시대 군사 지휘관에게 "전임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이 얻은 귀중한 교훈을 활용할 수 있게 합니다.

 

 

 

 

서론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은 집중된 포병 사격에 대해 군대를 방어함으로써 대응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이것은 최근의 이란-이라크 전쟁만큼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분쟁들까지도 비교되는 기준이다. 요새화, 갑옷, 분산, 지속적인 이동, 속임수, 반격, 총선에서의 지상 공격 등 집중포격에 대응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대전쟁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대전쟁은 포병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였다. 처음에는 서부 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던 군대들은 포병을 보병과 기병 사이의 전투를 보조하는 역활로만 보았다. 초기 전투에서 사용된 포병의 규모는 참여한 포병의 수가 보병의 에서 10할에 근접할 정도로 강대했던 이후 전투들에서의 규모에 비해 작았다. 전쟁 이전의 교리는 개활지에서 전투하는 부대를 지원하거나 측면을 개방시키거나 방어할 수 있으며 기동군의 전진을 유지시킬 수 있는 속사가 가능한 경량 야포에 중점을 두었다. 벨기에의 국경 요새들을 극복해야했던 독일만이 중포에 많은 투자를 했다. 전술 교리는 공격적이였으며 경쟁 국가들을 상대하는데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물론 당연하게도 양측이 1차 세계대전에서 발견한 전투 조건에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전투를 벌이는 군대들은 처음에는 탄창형 소총과 기관총들의 사격에 의해 저지되었다. 1914년 말에는, 군대들은 상대적으로 얕은 참호 시스템에 앉아 알프스부터 영국 해협까지 이르는 무인지대를 중앙에 놓고 마주보고 있었다. 이때가 바로 포병, 특히 중형 밑 대형 구경의 곡사화력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때였다. 포병은 적의 참호를 관통시킴으로써 새로운 측면을 개방시키는 방법이 되었다. 방어자에게는, 포병은 측면을 보호하거나 엄호하는 수단이 되었다. 공자의 포병은 방자의 직사화기 시스템을 제압하고 그들의 참호로써의 접근을 저지하던 철조망을 자르고 방어자의 진지를 파괴하며 그들의 포병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방어자의 화기들을 무력화시키는것은 그들이 공격자의 포병을 타격하는것을 막을 수 있고 공격자의 지휘 및 통제 체계는 물론이고 공격하는 보병과 공격이 시작되었을때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공격자측의 무인지대에 집중될 예비대에 대한 공격도 저지할 수 있었다. 1916년 7월 1일, 영국군은 개시점으로 이동 도중 굉장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16년에 이르러서는, “포병이 정복하고 보병이 점령한다”라는 말에 의미가 부여될정도로 충분한 수의 포, 화기, 그리고 탄약이 보충되었다.

 

적 참호로써의 길을 뚫어낼 수 있는 포병의 엄청난 집중은 방어 전략의 변화를 강요했다. 양측은 모두 더 깊어진 방어 시스템으로 이동하였으며 특히 독일군의 프리츠 본 로스버그 대령은 탄력 방어의 기본 개념이 되는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항상 적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있는 전방 방어체계의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로스버그는 포병이 최대사거리까지 보병을 위해 방어체계에 길을 뚫어낼 수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 최대사거리가 도달되었을때 보병들은 중화기 화력 지원에 관해서 굉장한 열세에 처하게 된다. 만약 공격군의 기동군이 공격군의 사각 밖에서 저지되게 된다면 공격군이 “승리후의 무질서 효과”, 즉 그 어떤 진격에도 동반되는 무질서적이고 혼란스러운 피해로 앓고있을동안 반격에 처할 수 있게된다. 그들의 후퇴는 정적 포격에 의해 저지될수도 있으며 그들의 지원화력의 사거리 밖에서 격멸될 수 있다.

 

개념적으로는, 방어체계는 고지대에서 보안 구역에 대해 시야를 확보하도록 요구되었었다. 독일이 그들의 초기 진격때 프랑스의 1/3에 가깝게 점령했기에 그들은 좋은 방어선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철수 할수 있었으며 전쟁동안 최소 두번에 걸쳐 이를 대규모로 실행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철수는 연합군에게는 더욱 어려웠다. 방어자는 관측 사격과 직사에서로부터 벗어난 역경사 지형에 전방 방어선을 형성하곤 했다. 이 방어선조차 대대적인 공세가 아닌 국지적인 공격만을 받아내도록 설계되었다. 이 방어선 뒤에는 전방 방어선을 지원하고 전방 방어선을 돌파할만큼 강한 공격의 적들을 분리시키기 위한 기관총 진지들과 연속적인 참호로 이루어진 지역이 있었다.이 구역은 공격자를 그들의 포병 지원 거리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정도로 깊었으며 칼 본 클라우슈비츠 (Cael Von Clausewitz) 가 방어적인 형태에서 방어 구역 전체를 다시 수복할 수 있을 방어 형태의 더 강한 힘의 원천인, “빛나는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반격 부대가 대기하고 있는 최후 저항선으로 이어졌다. 탄력 방어에서 반격을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제 2차 세계 대전 내내 독일 방어 전투의 특징이였다. 흥미롭게도 반격을 위해 지정된 예비부대는 반격부대 사령관과 방어구역 사령관의 지휘권 순위에도 불과하고 방어구역 사령관의 지휘 하에 투입되었다. 이것은 공격자가 공세를 멈춘 후 그들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이전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방어구역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들은 그들의 기동군을 더 효과적인 보조 화기들로 무장시켰으며 그들의 전술 실행을 분산화시켰다. 잠입 전술과 제한된 목표물 공격의 조합은 탄력 방어의 효과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으며 방어자의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었지만 전쟁을 끝낼 수 있을정도의 전술적이거나 작전적 성공을 성취할수는 없었다. 항상 결정적인 전투를 승리할 능력의 부재나 협상의 바탕을 마련할 능력의 부재의 결과물이였던 총력전은 지속되었다. 이것은 솜 전투는 물론 오키나와와 한국에서도 다를것이 없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의 문제들중 일부가 수정되었다 작전상 전술 항공지원은 공격군의 포병의 부재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하였다. 소화기 사격과 기관총 사격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무전기로 통제되는 침입작전을 실행하는 기계화부대들은 적의 방어구역을 돌파하고 방어군이 기계화 전투의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예비대를 무전을 사용하여 통제하며 방어 구역을 더 깊게 변경하여 기계화 투입, 혹은 항공으로의 투입에 의한 기동성의 기하학적 증가에 대응하기 전에 전체 방어에 대한 일관성을 방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점을 제외하면 전술적인 문제들은 거의 동일하게 남아있었다; 적의 예비사격을 흡수하고, 공세를 막아내며 공자의 부대를 파괴하기 위해 반격을 하며 방어체계를 복구한다. 결정적인 방어전투가 전구의 흥망성쇠가 달린 전술 예비대에 의해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2차 방어 구역에서의 수비 전투가1차 세계 대전때와 거의 같았기 떄문이다. 현대의 군대는 그들의 후방에서 뻗어지는 생명줄에 의존하므로 제한된 시간동안만 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Immobile Mass” 혹은 고정군은 적 지상군의 개입에 의한 전투 지속력의 위협을 상대로 방어한다. 그것의 존재만으로도 제한된 자원으로의 돌파를 위한 집중을 요구한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적 보병 사단들은 동적 전투에서의 틀을 제공했으며 이것은 현대 방어전에서 어느정도 동일하게 요구되는점이며 미래에도 동일할것이다.

 

기동군에게 가용가능한 대포병 전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포병을 통합군의 맥락에 놓고 그것의 약적과 강점을 이해해야한다. 포병은 파괴적인 효과를 일으킬수 있으며 직사화기 시스템들보다 더 강력하며 멀리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포병 시스템은 그들의 사거리 이내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그들의 사격의 효과를 변화시킬 수 있기 떄문에 유연하다. 그들은 주로 그들의 사거리와 효과의 직접적인 결과인 무겁고 부피가 큰 탄약에 의해 제한받는다.

 

포병 사격은 지역 사격과 정밀 사격으로 구분될 수 있다. 지역사격의 목적은 주로 무력화이다. 이러한 수단으로의 파괴는 주로 시간과 비용의 측면에서 보았을떄 매우 값비싸다. 나름의 단점이 있는 핵무기의 경우를 제외하고 넓은 지역을 제압하기 위한 화력의 농도를 달성하는것은 매우 많은 양의 화기와 많은 탄약을 요구한다. 이것은 보통 많은 수의 탄약 운반수를 필요로 하거나 일종의 보관장소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목적에 대한 증거와 함께 도로의 병목을 불러일으킨다. 표적들이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될때 예측된 사격은 요구되는 탄약량을 상당히 줄여주지만 여전히 적지않은 양이 요구된다. 오늘날 스마트 탄약과 정확한 표적 획득 시스템을 이용하여 요구되는 탄약의 양 (가격과 간계없이) 를 제한단다. 1차 세계 대전에서 가스는 지근탄에도 제압을 위한 좋은 수단으로 쓰였으나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사격이 요구됐다.

 

방어자의 위치에 상당한 포병 화기들을 집중시키는 공격자들 상대로, 세가지 기본적인 방어가 있다. 첫 번째는 보호를 이용하는것이며 파고 들어가거나, 야전 방어시설의 공사, 혹은 장갑을 통한 방어이다. 공사를 통한 방어는 기동력을 제한시키며 부대를 정밀사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공병 활동은 시간에 따른 부대의 약화를 피하기 위해 어느정도의 기동군의 활동과 협동되어야한다. 두번째 방법은 로스버그처럼 부대를 분산시키고 남아있는 인원들을 보호하는것이다. 이것은 돌파하는 적의 임무를 더 쉽게 만들수도 있지만 착탄지점 밖에 있는 부대들은 반격을 실행할 수 있도록 잔존하며 공격하는 적과 붙게 되면 포병 사격을 가하기 어려워진다. 로스버그의 대응은 지형이 지형이 방어의 일부가 아닌 방어의 수단에 불과한 부대 중심적인 방어를 의미한다. 이것의 단점은 이러한 경우 적의 부대의 위치를 그들이 사격을 위해 드러내기 전까지 확보하기 어려울수도 있으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 아군의 부대를 적의 사격, 즉 일종의 구원을 위한 경주에 빠트릴 수 있다는것이다.

 

정밀 포격에 대응하는 몇가지 추가 대응방법이 있다. 속임수는 가장 흔한 방법이다. 적이 표적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면 정밀사격은 불가능하다. 신호 방출기, 사격을 유도하기 위한 가짜 진지, 야간 진지점령, 그리고 위장 등의 다양한 방법들이 쓰인다. 추가적으로 시설의 주기적인 이동은 주기적인 관찰이 없는 상태에서의 적의 조준을 어렵게 만든다. 적의 표적 식별의 거부시킬 수 있다면 적은 지역적 사격을 가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따른 군수적 부담과 짐을 감당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주의사항은 명령에 있다. 간접사격의 많은 양은 조우 교전이 아니라 돌파 작전의 특징이다. 현대의 포격 사거리는 부대의 약 30km 전방으로 연장된다. 이러한 포병의 사거리 안에서 기동군은 집중된 간접사격을 버티며 기동하며 전투하여야한다. 소련군은 접촉에 대한 대응으로 동행하는 포병이 있지만 이들은 30km의 사거리의 포병 구역을 확립하고 전방 기동군의 움직임이 느려질때까지 제대로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포병의 기동은 여전히 시간이 오래 걸리며 조율된 사격 계획을 확립하는것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지역 표적을 대상으로 쓰이는 MLRS와 고정익 CAS는 저고도 및 중고도 대공을 피할 수 있다면 포병 사거리 너머로 중화력을 투사할 수 있다. 두가지 모두 화력의 지속성이라는 점에서의 단점이 있지만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의 1940년 5월의 뮤즈 작전에서의 집중된 항공 포병의 영향력은 알맞은 시간과 때의 전술적 집중의 작전 효과에 대한 증빙이다. 만약 적의 항공지원과 로켓 포병을 위한 표적획득을 거부할 수 있다면 적은 불가피하게 포병의 성향에 의해 제한되게 될것이다. 소련 포병의 지속의 의미는 우리의 것과 같이 도로 기반이며 거부 작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전쟁의 붉은 신” 은 뒤섞인 부대들과 잦은 거부 작전으로 인해 전장에서 움직이는데 상당한 움직임의 제한을 겪을 수 있다.

 

 

Chapter 4

1944-45 동부 전선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독일 대포병 전략

사무엘 J. 루이스 박사

 

독일군이 1944-45년에 소련의 대규모 포병 투사의 효과를 가감시키거나 피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전략적 후퇴를 제외하고) 에 대해 명백히 답하기 위한 정보는 부족하다. 이 후반기에 대해서는 동부전선에서 군단 이하의 제대에 대해 남은 기록이 매우 적으며 대부분의 독일 기록이 파괴되거나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의 보관소에 보관되어있기 떄문이다. 이러한 정보들이 접근 가능했더라도 전역의 크기, 지형의 다양성, 임무와 부대 구성은 세계 1차 대전때 보여졌던것만큼의 전술적 다양성을 보여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떄 독일 보병사단들은 가능한 제한적 범위 내에서 최대한 탄력 방어에 의존했다. 지상 방어군의 부족은 그러한 전략을 급격히 변경시켰으며 해당 지역의 사정에 따라 OP구역과 대부분의 전투구역을 얇은 화기 진지들의 선과 강화진지의 선, 혹은 두 가지의 조합으로 대체했다.

 

개념적 뼈대

 

독일 육군은 세계 1차 대전때 탄력 방어를 개발하였으며 2차 세계 대전이 끝날때까지 유지되었던 1933년 규제에 포함시켰다. Timothy A. Wrayably 중령은 이 탄력 방어를 CSI의 연구 보고서 No.5, Standing Fast; German Defensive Doctrine on the Russian Front During World War II, Prewar to March 1943 에서 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 독트린 [탄력방어] 은 이점을 위해 지형을 보호하는것보다 방어군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는것을 우선으로 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것에 집중했다. 탄력 방어는 연합군의 공세 능력을 깊숙히 설치된 일련의 요새화된 참호들로 소진시키는것을 목표로 했었다. 독일군의 방어구역 내부와 정면에서 방어전투를 치룸으로써 독일군은 세력을 유지하면서 공격군의 한계와 취약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경계병력만이 전방 참호에 노출이 되었고 이에 따라 방어 병력 대부분은 연합군의 맹렬한 포병 사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독일군의 화력은 공격하는 보병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어느 시점에서던지 압도적인 전투력의 적과 마주하게 되면 독일군 부대들은 방어 네트워크 내부에서 이상적인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유로이 기동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공세가 돈좌되면 독일군 부대들 (예비군 포함) 은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이러한 조합으로 이 전략들은 전술적 “탄력성”을 만들었으며 전진할수록 세력을 잃는 연합군과 달리 독일군은 반대로 강해졌다. 결국 독일군의 반격은 약화된 연합군 보병을 돌파하며 방어체계의 상태를 완상복구 시켰다 [1 참조].

1944-45년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들에게는 너무나도 넓은 구역을 충분하지 않은 병력으로 방어해야한다는 점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볼 수 있듯이 탄력적 방어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바그라티온 작전

2차 세계 대전의 특히 강력한 포격중 하나는 1944년 6월 22일에 시작된 소련군의 동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공세의 지원으로 사용되었다. 소련군의 사격계획은 다음 사항들을 포함했다.

  • 3 km 까지의 깊이의 독일군 방어 위치에 대해 가해지는 15분 간의 포격
  • 관측된 표적, 포병 위치, 그리고 중화기 위치에 대한 90분간의 포격
  • 독일군 주방어선과 후방 방어진지들에 대한 20분간의 포격
  • 남은 하루 동안의 관측자들을 통한 요청 포격

690-km 전선을 따라 네 개의 소련군 전선은 24,000여정의 화포와 박격포를 투입하였다. 17,000여개의 박격포가 특정 돌파구역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전선을 따라 소련군은 킬로미터당 35정의 포병 화기를 배치하였으나 돌파 구역에서는 킬로미터당 178정의 화기를 배치하였다.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포격은 지역별로 상이했다. 독일군 제 4 집단군의 전쟁 일기는 그들이 맞이한 3-시간의 포격은 그들이 맞이한 포격중에 가장 격렬한 포격이였다고 서술했다. 

 

 

29개의 독일군 사단이 어떻게 그러한 포격에 배치하고 대응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은 독일군 기록의 비가용성, 특히 여단과 사단 단위에서의 기록의 비가용성 떄문에 답변되지 않는다. 제4 집단군과 제9 집단군의 남아있는 기록들은 독일군이 어떻게 배치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정도의 해답을 내놓았다. 각 사단은 24에서 32 km 길이의 전선을 방어했으며 이는 사단 포병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구역이였다. 사단들은 전선의 킬로미터당 약 50명의 보병을 배치했으며 보병 중화기가 포함될 경우 킬로미터당 약 80명의 보병을 배치했다. 사단들은 가능하면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사용한 3개에서 5개의 참호선이 포함된 5~6 킬로미터 깊이의 방어구역을 형성했다. 독일군들은 충분한 수의 지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포병 탄약의 보급은 부족했다.

 

방어군의 포병탄약의 부족은 소련군을 상대로 대포병 사격을 가할 능력을 제한시켰다. 6월 20일 1944년에, 소련군이 대규모 공격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포격의 양을 눈에 띄게 늘릴때, 독일군 제3 기갑군과 제9 집단군은 대포병 사격을 위해서 고작 2,000여발에서 3,000여발의 105mm 포탄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음 방어선으로 철수하는 해결책은 히틀러의 전선 고수와 최후의 한명까지의 정책에 따라 불가능하였다. 전투 초반 이틀동안의 대규모 소련군 돌파에도 불구하고 집단군 사령관은 후퇴를 금지했었다.

 

독일군 참모부 훈련 및 해외군 동부 부서들은 1945년 소련군과의 전투를 통한 교훈들을 적립해나갔다. 이 1944-45년 기간동안의 교훈들은 소련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때 대규모 포병 사격을 동원하는 여러 성향들을 보여줬다.

  • 평균적인 독일군의 정보 작전조차 전방으로 이동되는 물자들, 가짜 포병 진지들의 구축, 도로와 길의 개선, 소련군 후방에서의 강습군의 세부 예행연습, 그리고 공세적 순찰 (중대 규모까지) 들을 통해 소련군의 사전작업을 탐지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대규모 전차 대형은 집결지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요소였다. 이와 같은 사전작업에 대처하는 방법은 독일군이 공군과 포병을 사용하여 사전준비구역, 특히 포병진지와 집결지를 포격하는것이였다. 
  • 1944년 말까지 소련군의 대규모 포병 준비 (30에서 100분) 은 독일군에게 임박한 공격을 경고하는 “알람시계”로써의 역활을 수행했다. 그 당시 소련군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포격의 타이밍과 패턴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러한 변화를 준 것은  독일군 보병이 포격 도중에 처음, 그리고 두번째 참호선에서 후퇴하는것을 학습하였고 포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첫 참호까지 재점령하였기 떄문이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본 공격의 두세시간 이전에 “가짜 포격”을 투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에 대한 독일의 대응법은 미리 준비한 다른 참호선으로 후퇴한 후 전방 소련군 위치에 대한 포격을 실시하는것이였다. 공격이 시작되면 독일 포병의 이러한 위치에 대한 집중 사격은 소련군이 적 진지의 점령을 기피하게 되기까지 효과적이였다.
  • 1차 포격의 종휴 이후 소련 포격 활동은 큰 폭으로 감소했다. 몇몇 화포들은 독일군 방어지점들을 약화시키는데 집중했지만 대부분의 화포는 사격할 표적이 부족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화기가 있어서 그들이 전진하려할떄마다 교통체증을 악화시켰고 이는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다.
  • 소련군 보병은 공격중에 적 전차에게 공격받거나 전차의 존재를 알아챌 경우 엎드리고 움직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소련의 공격이 중지되면 보병은 기계적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그들을 밀어낼 최고의 기회는 즉각적인 반격임을 알아챘다. 이러한 반격을 위한 최고의 위치는 돌파구의 근거지였다.
  • 이동포격이 독일 전선을 통과하기 10분 전에 소련 보병부대들은 독일군들을 고정시키기 위해 중화기 사격을 개시했다. 공격하는 소련 보병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이 독일 방어군이 아직 엄폐해 있을때 독일군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전략을 맞받아치기 위해 독일군은 관측구와 총안구가 있는 콘크리트 방어막들을 건설했다.
  • 공격 이전에 소련군들은 그들이 이전에 설치했던 장애물들을 철거했기에 이러한 변화들을 관측하는것이 중요했다.

 

12 보병사단, 27소총연대, 1대대

바그라티온 작전을 다루는 독일 육군의 대대 수준 자료는 거의 없다. 대대 사령관에 의해 수집된 다음 기록들은 실질적으로 입증할 방법이 없지만 탄력방어와 일맥상통하는 방식으로 독일군이 어떻게 전투 구역 이내에서 기동을 시도했는지를 반영한다.

 

독일 제4 군 예하의 제39 기갑군단의 제12 보병사단은 1944년 3월 이후 야전 보충대대를 제외한 예비 병력 없이 모글리예프 동쪽의 Pronja Bend를 따르는 32킬로미터 길이의 전선을 방어했다. 제1 대대는 Pronja 강 뒤 4킬로미터의 구역을 방어했는데 이 강은 15에서 25미터의 너비를 가져 일종의 대전차 장애물로써의 역활을 하였다. 5월 내내, 예비대의 도착과 회복기는 대대의 전투력을 약 430명까지 증가시켰다. 6월에 이르러서 예하의 각 4개 중대는 70에서 100여명의 군인을 보유헀다. 대대는 북쪽에 제337 보병사단과 마주보고 사단의 북쪽 측면을 담당했다. 대대는 공격적으로 마주보는 사단과의 1.5킬로미터의 공간을 정찰했으며 주 전선에서 대부분 관측되지 않는 강까지 내려갔다.

 

대대는 강을 방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에서 300에서 500미터 떨어진 첫번째 언덕들에 첫 방어시설을 전개하였다. 방어시설은 일련의 화기진지를 연결하였으며 이들은 서로에게 엄호사격을 가해줄 수 있었다. 적절할때에 보병들은 진지의 선 전면에 지뢰와 철조망을 설치했다. 대대 지휘관은 두번쨰 방어선을 첫 번째 방어선의 400~600미터 뒤에 설치하였으며 주로 역경사에 설치하였다. 엄폐된 통신 참호들은 첫 번째 방어선과 두 번째 방어선을 연결하였다. 대대가 이러한 방어선 다섯 개의 건설을 완료하기까지에는 8주가 소요되었다.

 

소련군의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독일 제4군과 제9군을 상대하였다. 그들은 160킬로미터의 전선을 담당하였으며 킬로미터당 181정의 야포와 박격포의 밀집도를 달성하였다. 전선군의 주력은 위에 서술된 제1 대대의 북쪽에 위치한 독일군 제337 보병 사단을 타격하기 위해 10개의 소총사단을 집중시킨 제49 군과 함께 있었다.

 

6월 22일에 시작된 소련군의 확성기를 이용한 심리 작전 방송, 포병 사격, 그리고 공세적 정찰과 같은 소련군 공격의 공통적인 전조상황들은 독일군 방어자들을 경계시켰다. 22일 오후에 이르러서는 대대는 소련군 전진 부대들을 프룬자 강 너머로 후퇴시켰다. 대대 지휘관은 다음날 본격적인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야간동안 그는 첫 번째 방어선을 후퇴시켜 두 번째 방어선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는 첫 번째 방어선에 몇 명의 전방 관측자들을 위치시켰다. 밤에 전장을 밝히며 소련군은 0400 즈음 모든 구경의 화포를 통한 포격을 시작하였다. 이동 포격은 약 3시간정도 지속되었으며 첫 번째 방어선을 따라 여러번 이동하며 방어선의 거의 모든 진지와 통신 시설을 파괴했다. 두 번째 방어선의 독일군 대대에서는 포격으로 인해 4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시간의 포격을 뒤따르면서 독일군 대대 지휘관은 첫 번째 방어선으로 이동하는 변칙적인 선택을 내렸다. 그는 그의 병력들이 점령할 수 있을정도로 충분한 수의 진지가 잔존해있었음을 발견했다. 첫 번째 소련군 공격은 첫 번째 방어선 전방의 약 200미터 앞에서 돈좌되었다. 뒤따르는 여단급의 공격들 또한 동일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야간동안 독일군 대대는 다시한번 두 번째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소련군 포격을 피하였고 이후 다시 첫 번째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포위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대는 6월 24일 야간에 마침내 퇴각하였다.

 

개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두번째 방어선으로 후퇴하는 전술적 선택은 1944년과 1945년에는 유효환 전략이였으며 독일군 보병에게 가용 가능했던 몇 안되는 전략중 하나였다. 그것은 또한 방어군이 방어구역 이내에서 기동하는 1차 세계 대전의 탄력 방어와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독일 제4군 내에서의 아이디어 교환은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어느형태이던간에 관계없이 직선형태의 방어선을 강화거점의 연계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다는것을 암시한다. 한 지휘관은 거유일하게 잘하는 것을 중포격의 이목을 이끌어내는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적어도 독일 제4군 내에서는 변형된 탄력방어가 납득가능한 관행으로 유지되었다. 추가적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소련 전훈 보고서중 하나의 결론에 따르면 그들의 포병 준비사격이 깊숙히 위치해있는 독일군의 진지들을 충분히 포격하는것을 실패하였으며, 특히 역경사에 위치해있던 독일군 예비대에 대한 타격에 실패했음을 시인했다.

 

독일군 방어전략의 다른 변형은 주저지선으로 일련의 강화거점들을 설치해놓고 반격의 수단으로써 예비대를 후방에 위치시켜놓는 방법이였다. 늦게는 1944년 10월에 이르기까지, 독일 제2산악사단이 확장된 전선과 극지방 지형의 특징에 따라 이러한 전략을 북부 핀란드에서 사용하였다. 같은 달에 압도적인 소련군 전력에 의해 공격당하였을때 이 강화거점들은 중화포의 포격을 집중시켰으며 공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프랑스의 독일군 해변방어시설들 또한 강화거점 시스템에 기반하였다.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에 다수의 강화된 콘크리트 강화거점 (제2산악사단의 강화거점들 대부분과 같은) 들은 집중된 중포 포격을 견뎌냈으며 공격군에 의해서야 결국 소탕되었다. 이러한 강화거점들을 운용하는것은 적에게 피해를 강요했으며 공격군을 묶어둘수 있었지만 반격을 위한 대형 예비대의 부재로 인해 이러한 강화거점들은 방어를 위한 함정정도의 역활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티모시 A. 레이 중장은 독일군의 깊이를 활용한 방어 전략이 방어자를 위해 유효한 전략으로 남아있음을 확인하였으나 이 전략이 유효하게 사용될만큼 충분한 독일 사단들이 보존되고 있지 않음을 관찰하였다. 그는 주로 방대한 전선을 담당했던 독일군 사단들은 탄력방어의 주요 개념을 활용하였으나 적은 예비대로 직선형 방어 개념을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증언했다. 결과적으로, 레이 중장은 독일군 독트린 자료에 설명되어있는것처럼 적용된 깊이를 활용한 탄력방어의 실제 적용 예시를 찾아보기 힘들다는점을 지적했다.

 

위에 언급된 1대대의 행동이 기록 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났을 어느정도의 확률은 있다. 그러므로 위치 전쟁에서의 대형 포병사격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은 미리 준비된 보조 진지로의 퇴각인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방어 독트린이 얼마나 논리적이던지간에 공격군이 너무나 압도적이여서 방어군이 전략과는 상관없이 압도되어 파괴될 수 있는 상황이 일어날수 있다는것을 인식하는것이다. 또한 1대대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그들이 주공의 방어를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일수도 있다는것 또한 명심하여야한다.

 

Chapter 5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 대포병 전략, 1945년 4월 – 6월

토마스 M. 후버 박사

 

1945년 봄에 오키나와의 일본제국군은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섬을 장악하고 있을것을 명령받았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세 가지 요소에게서의 대량 포격 가능성을 마주하고있었다: 미 육군 야전포병, 미 육군 항공대의 공습, 그리고 미 해군의 연안 포격이였다. 일본군은 의존할 포병전력이 매우 적었으며 아군 공군 및 해군의 지원 또한 없었다. 이것은 미국의 배와 비행기들이 일본군의 진지들을 내키는대로 공격할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키나와의 지휘관들은 적의 무제한 포격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포격

오키나와는 60마일의 길이와 2에서 18마일의 너비를 가지고 있다. 일본제국 제32군의 임무는 가능한 오래 섬을 사수하며 미군이 이곳을 장악하여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을 위한 발받침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것이였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제32군은 섬의 약16마일의 길이와 3에서 12마일의 너비를 가지고 있는 최남단 끝자락에서 지하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 제한된 구역 안에서 약 60마일 길이의 동굴과 터널을 공사하였다. 약 80 제곱마일에 이르는 이와같은 구역에 대해 미군은 3월 24일부터 6월 22일까지 24만발의 포탄을 사격하였으며 이중 18만발은 지상군에 의해서 사격되었으며 6만발은 해군에 의해 사격되었다. 이 수치는 공습이나 75mm 혹은 그 이하 구경이 직사 사격을 포함하지 않았다. (예로 들어, 미 육군 16여단은 10만여발의 75mm 사격을 가하였다.)

 

Table 1

1945년 4월 1일 – 6월 30일, 미 육군 제 10 야전포병에 의해 소모된 탄약

종류

소모량

75mm 야포

166,068

105mm 야포

1,104,630

155mm 야포

346,914

155mm 포

129,624

8-인치 야포

19,116

총 소모량: 1,766,352

출처: Roy E. Appleman, et al., Okinawa; The Last Battle, U.S. Army in World War II: The War In The Pacific (Washington, D.C: Historical Division, Department of the Army, 1948), 498.

 

Table 2

1945년 3월 – 6월, 류큐 전투에서 미 해군에 의해 소모된 탄약량

종류

소모량

5-인치 예광탄

66,653

5-인치 고폭탄

432,008

6-인치 고폭탄

46,020

8-인치 고폭탄

32,180

12-인치 고폭탄

2,700

14-인치 고폭탄

16,046

16-인치 고폭탄

4,411

총 소모량: 600,018

출처: Appleman et al., Okinawa, 500

 

미 포병은 주로 유도를 위해 라디오를 휴대하는 전방 관측단에게 의존했다. 일본군이 공군력이 없었으므로 미군은 또한 “Cub” 정찰기를 이용하여 표적들을 식별하는데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들에 추가로 미군들은 포격을 조준하기 위해 신형 GR-6 소음탐지기를 사용하였다.

 

1945년 4월 1일의 강습상륙에 대비하기 위해서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비행기들이 3월 23일, 3월 24일에 오키나와를 공습했으며 미 해군 함선들은 13,000여발의 6-인치와 12-인치 포탄을 발사하여 사전작업을 진행했다. 이 시점 이후로부터 미군은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적에도 포격을 투사할수 있었다.

 

일본군의 대응법

지속적인 포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 제32군은 오키나와에서 10주동안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항전했다. 그들의 100,000 병력 (76,000 육군과 24,000 오키나와 방어군) 은 미 제 10군 (예비대를 포함하여 180,000여명의 병력) 에 비해 수적 열세였다. 일본제국 제 32군은 더 적은 전차와 미 제10군이 대량으로 운용했던 M-4셔먼에 대응할 전차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열세였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일본군은 지하동굴의 건축, 신중하게 위치된 사격진지 동굴들, 역경사 전투, 보급품의 사전배치, 은폐, 속임수용 진지, 그리고 야간작전들과 같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대응하고자 했다. 일본군의 대포병전략의 중요 요점은 제32군의 총 60마일에 이르는 방대한 지하 동굴들이였다. 제32군의 작전목표는 전투가 시작되기 1년 전에 하달되었으며 해당 년도부터 그들의 100,000 병력은 그들의 목숨이 걸린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것처럼, 지하 동굴 시스템의 구축에 매진했다. 그들은 지휘 목적의 동굴, 그리고 전선의 사격진지 (필박스) 동굴들로 두 종류의 동굴을 건축하였다. 제32군의 지휘동굴은 1,300피트의 길이를 자랑했으며 100피트의 지하에 매설되어있었다. 벽들은 보강되어있었으며 책상과 의자들로 꾸며져있었다. 그곳은 또한 전기와 보급된 주방이 설치되어있었다. 관리 인원, 계산원, 통신원, 그리고 지휘인원들까지 약 1,000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수용할 수 있었다. 사격으로부터 안전하고 잘 구축되어있었지만 매우 덥고 습하며 좁았다. 제32군 휘하에는 제24사단과 제62사단, 그리고 제44독립혼성여단이 있었으며 이들 모두 각각 이와 비슷하지만 좀 더 작은 지휘실을 가지고 있었다.

 

지휘실 터널들로부터 복쪽으로 몇마일정도 올라가게되면 일본군은 후가시 해변으로부터의 미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 산맥을 통과하는 총안구용 동굴들의 망을 건축했다. (지도 1) 각 동굴은 필박스로써 건설되었으며 각 총안구는 돔의 바로 아래나 능선의 끝자락 직전에 위치되어있었다. 총안구들은 언덕의 역경사면에 위치하거나 정면에 언덕이 위치하도록 하여 적들이 역경사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포착이 불가능하게 하여 더 멀리있는 포병 관측단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하였다. 기관총들은 이러한 총안구들에 주로 배치되었던 화기였으며 47mm까지 이르는 지사화기들까지도 사용되었다. 총안구 뒤에, 언덕과 능선 아래에, 일본군은 15피트 혹은 그 이상의 좁은 통로를 개설했다. 그들은 이것의 끝을 확장하여 화기를 조작하는 인원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게했으며 탄약과 식량의 보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 통로를 언덕이다 능선 너머로 확장하여 병력들이 총안구로 접근하는 적의 화력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출입할수 있도록 하였다. 각 대대는 그들간의 사각이 잘 통합되도록 그들만의 총안구 동굴들은 개설하고 점령했지만 이것은 오직 대대급까지만이였다. 필박스 동굴의 천재성은 그들이 일본군이 미군 보병과 기관총과 포격을 사용하여 교전하면서도 그들의 동굴의 동료들을 가장 강력한 화포의 사격으로부터 보호했다는점에 있다.

 

 

 

일본군의 대포병 동굴 전략을 유효하게 만들었던 요소중 하나는 화기, 탄약, 식량 및 기타 필수적인 용품들의 동굴의 사전배치였다. 각 대대들은 그들이 6개월 동안 필요할 모든 물자를 지하에 보관하였다. 도쿄의 일본제국군 사령부는 전투 1년전에 이 물자들을 관리하는것을 최우선 사항으로 분류하였고 이 덕분에 전투는 교전 도중 보급품을 이동시킬 필요가 거의 없는 상태로 이루어졌다. 

 

 

일본군의 동굴들이 사격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그들의 위치와 입구를 은폐하는것을 넘어서 트럭, 전차, 대공포, 소형 잠수함, 모터보트, 그리고 동굴 안으로 운반될수 없는 다른 물품들 또한 위장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할애했다. 동굴들로의 수많은 입구들은 작게 유지됬으며 흙과 식물로 덮인 나무 덮개로 덮여있어 이를 발견하는것을 거의 발가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지휘 동굴에서의 취사연기는 특수 통로로 각 동굴에서 멀어지도록 유도되었으며 취사는 오직 야간에만 이루어져 위치가 발각되지 않도록 했다. 트럭, 모터보트 계류지, 그리고 그 외는 위장 그물과 식물들을 이용해 위장되었다. 대공포들 또한 동굴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했기에 외부에 위치되어야만 했다. 그들 또한 위장망과 식물들로 덮였으며 진짜 대공포들처럼 위장되고 위치된 수많은 가짜 대공포들에 의해 보호받았다. 공중에서 관측하게되면 이들을 구별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포병 관측단들은 알본군 진지들이 활성화가 된 상태가 아니라면 그들을 식별하지 못했다.

 

부대가 지상으로 이동해야할때는 제32군은 오직 야간에만 이동함으로써 최대한의 은폐를 꾀했다. 전투의 여러단계에서 제32군은 대규모 반격이나 대규모 후퇴를 명령했었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 부대들과 그들의 보급품들은 야간에 집하되고 이동되었다. 모든 일본군 공격은 야간에 수행되었으며 미 포병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사격을 가할수 없었다.

 

오키나와의 제32군은 지상에서 그들의 화력의 10배는 넘는 화력과 맞섰다. 이러한 점에도 불과하고 그들은 지하 건설, 보급품 보관, 역경사 전술, 은페, 그리고 야간작전등의 정교하고 불규칙적인 전략을 사용하여 미군을 상대로 10주동안 버틸수 있었다.

 

효력: 포병-보병 합동에 대한 취약성

일본군 동굴들은 미군의 거대한 화력우세를 크게 무력화시켰다. 이것은 물론 일본군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지 못했는데 이는 미군 지휘관들이 그들이 잃어버린 화력우세를 일부 되찾기 위해 보병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떄문이였다. 동굴 진지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미군은 전차-보병팀들을 투입하여 그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각 총안구들과 후방 출입구들을 일일이 폭파했다. 일본군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면에 보병을 배치하도록 강요받았다. 이것의 결과는 미군의 전차-보병 팀들과 일본군의 필박스-보병팀의 지면의 동굴 입구의 통제권을 건 대결이였다.

 

이러한 미 보병의 공세적 운영은 포병이 어느정도의 일본군 보병을 제거할 수 있도록 했다는것이다. 공격하기 이전에 미군은 그들이 직면한 일본군 동굴에 대해 포격을 실시하였으며 이후 즉각적으로 보병으로 진격하여 동굴 출입구들을 확보하고 봉쇄하였다. 일본군은 이것을 오로지 포격이 그치자마자 생존한 보병을 배치함으로써만 이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동굴에서 아군이 나와 배치할 수 있을때까지 미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중대당 약 10명의 보병이 포격때 외부에 머물러야했고, 이에따라 수많은 병사들이 포격의 재물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군이 역경사로 진입하고 동굴 출입구 근처에서 일본군과 근접전을 벌이게 되었을때 미군은 아군 오사의 위험때문에 추가적인 포격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격이 멈췄을때도 좁은 통로로 인해 오직 총안구 동굴들의 일본군의 1/3만이 미군이 접근하기 전에 외부로 나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군 병력들이 동굴 출입구를 확보하게 되었을때, 방어군의 2/3과 그들의 주력 화기는 내부에 무기력하게 갇히게 되었다. 즉, 동굴들이 비록 일본군의 포격에 대한 취약성을 줄여주었지만 반대로 지상 기동요소들에 대한 취약성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미군의 공격은 그들이 대규모 포격과 공세적인 보병운용을 연달아 사용했기 떄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미군 포격은 종종 일본군들이 그들이 동굴 밖에 있을때 사살할수 있었으며 또 때에 따라 미군 보병은 그들이 안에 있을때 접근이 가능할 때도 있었다. 동굴들은 제32군이 미군의 대규모 포병에 의해 쉽게 괴멸되는것을 막아주었지만 우월한 보병전력과 포병전력의 합동은 결국 미군이 동굴 진지들을 소모전을 통해 파괴할수 있도록 하였다.

 

결과: C^3 요소들

일본군의 혁신적인 동굴 진지들은 미군의 야전정보체계를 교란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였지만 지휘, 통제, 통신 (C^3)에 상당한 문제들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비록 일본군의 야간 작전이 미 포병관측단과 야전정보체계를 무력화시켰지만 이와 같은 야간작전들은 일본군에게 심각한 지휘와 통제 문제를 일으켰다. 장교들은 특히 대규모로의 병력의 집결과 배치를 통제하기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정비가 해돋이 이전까지 적 인근에서 완료되어야하는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동굴에는 병력 집결이나 집중을 위한 공간이 없었으며 공격을 위한 야간 준비나 후퇴는 지면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미군 포병은 밤새 주요 도로와 다리에 대한 주기적인 포격을 유지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가중시켰다. 일본군 부대들은 소규모로 이러한 구역을 지날수밖에 없었고 이는 일본군 부대들을 지연시키거나 운없을경우 분산시켰다. 일본군은 공격을 위한 준비와 공격을 야간에 감행하였으므로 그들의 공격은 제대로 통합되지 않았으며 분산되어있었으며 비효율적이였다.

 

동굴들은 미 제10군이 작전하는 시기였던 낮에 작전기동을 방해하기 위한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낮에는 일본군은 치명적인 간접화력과 공습에 노출되지 않고서는 반격을 개시할수도, 퇴각할수도 없었다. 이것은 특히 압도되는 동굴들을 사수중이던 일본군들에게 큰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동굴 이내에서 미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었기 떄문에 미군이 그들의 진지를 강습하기 직전에 도망칠수 없었다. 추가적으로 미군이 동굴 출입구를 지나친 이후에는 사살되거나 항복하지 않는 이상 동굴을 떠날수 없었다. 이에 따라 동굴 병력들은 전진은 물론 후퇴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죽는것이 대부분이였다.

 

동굴들은 제32군의 지휘부와 야전부대들 간의 통신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제32군 지휘부는 이 방면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방안을 구축하는데 실패했다. 제32군은 라디오 보유량이 적었고 통신을 위해 야전 전화선 (종종 포병에 의해 끊기는) 을 사용하거나 느린 전령을 사용하였다. 전방 일본군에 의핸 포격 요청은 전령이 후방의 포병 진지까지 이동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소요를 충족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기회 표적들을 타격하는것은 불가능했다.

 

제32군과 사단 사령부는 종종 전령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이는 이 정보들이 적어도 시간 단위로 늦었다는것을 의미했다. 전선부대로의 명령 또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전달되었기에 추가적인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휘부는 전투에 대해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기 이전까지 알 수 없었기에 전투에 대응하는 세부적인 지시사항을 명령할 수 없었다. 어느 한 시점에서는 제32군 사령부는 전선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던때도 있었다. 이것은 제32군이 그들의 기본 명령인 미군 지연에 주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 동굴진지들은 그들을 그들의 야간 작전이 그러했던것처럼 성공적인 은엄폐로 이끌어주었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방법들은 일본군의 C^3을 마비시켰다. 동굴 진지들은 고정된 방어계획에 적합했으나 그들에 대한 의존은 기동성이나 반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론

제32군 사령부는 열세의 포병을 보유하고 압도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도 임무를 수행할 천재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그들이 보유한 보병 자산 또한 열세였기 때문에 그들의 지하 건축과 용맹한 역경사 전술은 제32군에게 승리가 아닌 시간만을 벌어다주었다. 

 

 

Chapter 6

한국전쟁: 집중포격에 대한 UN군의 대응

윌리엄 글렌 로버트슨 박사

 

분석적인 목적을 위하여 한국전쟁은 두가지 단계로 나뉘어질수 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11월 까지의 첫 단계는 마주하는 군대가 한반도를 따라 성공적인 공격과 반격을 통해 기동하던 기동전으로 볼 수 있다. 1951년 11월에 휴전협상을 염두에 두고 UN군은 공세작전을 중지하고 방어작전을 주로 펼쳤다. 이러한 정적인 단계에서 공산당의 집중포격이 작전에서의 상당한 고려요소가 되었다. 정치적인 결정들 때문에 분산/깊이에 따른 방어를 채택하는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UN군은 이러한 집중포격을 강화된 야전강화진지와 대량의 대포병 사격을 통해 대응했다.

 

기동단계

전쟁의 기동단계에서는 북한과 중국 공산당의 포병은 종종 모습을 드러냈지만 전투 활동에서 주목할만한 역활을 수행해내지 못했다. 공산당군은 포병 물자는 물론 숙련된 포병들이 부족했다. 공산당의 대규모의 원칙은 그렇기에 주로 집중된 포병보다는 거의 다수의 보병들로만 나타나고는 했다. 이 시기동안 공산당군은 포병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근접화력지원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며 공격의 사전준비로 포병을 집중사격하지도 않았다. 1951년 10월 1일부로 제8군은 한반도에 공산당에게 오직 530문의 화포만이 가용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에 반해 같은 당일에 UN군은 1,050여문의 화포가 가용가능했다. 이 불균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UN군의 포병이 훨씬 구경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공산당군의 포병은 76.2mm 구경 (13,000m 사거리) 인것에 반해 UN군의 포병은 105mm부터 8-인치까지 다양했기 때문이다.

 

정적 단계에서의 공산당 포병

전쟁이 정적 단계에 진입함에 따라 공산당의 포병 또한 눈에 띄게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제8군의 공산당군의 화포 예상은 1952년 초에는 852문이였으나 동일 년도의 7월 1일에 이 숫자는 1,246문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1952년 9월 이전까지 공산당군에 포병에 의해 가해진 정교한 포병 사전준비사격이나 계획된 포격에 대한 기록이 없다.

 

1952년 9월에 공산당군 포병은 공격 직후의 사전적 집중사격은 물론 UN군의 후방에 대한 대대적인 사격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1952년 가을부터 1953년 7월의 휴전까지 공산당군의 포병으 UN군 계획자들에 의해 고려되어야만 했던 출중한 상대였다. 공산당군의 포병 탄약 소모량은 1952년 2월의 11,900 여발에서 1952 10월에는 220,600여발까지 급증했다. 물론 이 고점 이후 전쟁 이후로 감소 추세를 보이기는 했으나 공산당군의 포병 탄약 소모량은 월당 36,000발 미만으로 감소하지 않았다. 전쟁의 마지막 두달동안, 공산단군의 포병 탄약 소모량은 다시 급증하였다. 예시로, 공산당군 포병들은 1953년 7월에 약 375,400여발을 발사하였다.

 

비록 가용 가능한 포병 자산과 운용인원들의 숙련도의 증가가 공산당군에게 1952년 중반 이후로 더 많은 선택지를 주었지만 공산당군의 포병 전략과 기술은 매우 정체되어있었다. 공세적 작전에서도 화포들은 UN군의 화포들보다 훨씬 후방에 배치되었다. 공산당군 포병은 상대적으로 거의 기동하지 않았으며 부적절한 탄약 운반책들에 의해 방해되었다. 화포들은 진지, 동굴, 터널에 매우 두껍게 위장되었으며 추가적인 사격 진지들 또한 확보되어있었다. 부족한 통신 장비와, 지도의 부족, 그리고 항공 정찰의 부재로 인해 공산당군의 포병은 미리 짜여진 계획에 의해서만 사격되어지는것으로 보였으며 기회표적에 대한 집중포격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하므로 대부분의 공산당군 포병 (그리고 박격포) 사격은 지역적인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매우 작은 지역에 집중적인 포격에만 집중되었다.

 

이와 같은 포병의 사격은 전쟁의 남은 기간동안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화포의 숫자의 증가와 후방지역의 교통량의 증가에 따른 포격량의 점진적 증가; OP에 특히 중점을 두는, 목표지점과 근방의 주력 저항선에 동시다발적으로 투사되는 포격; 그리고 동일하게 폭력적인 보병공세는 종종 포격을 뚫고 감행되기도 하였다. 지형적으로 작은 지역에 대해 사격을 가하게 되면 이 포격들은 비교적으로 짧은 시간동안 한 위치에 대한 많은 양의 포탄을 투사하는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2년 가을에 화살머리 고지 (281번 고지) 에 하루에 6,000여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비슷하게도 고지 Pork Chop 과 그 인근 또한 1953년 여름의 작전도중 20,000여발의 포병과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

 

UN군의 대응

이와 같은 포격에 대한 UN군의 대응은 다양한 형태를 띄었으며 제일 눈에 띄는 변화는 진지들의 강화와 대포병전략 사용의 증가였다. 받아들여질수 없었던 방어형태의 한 종류는 방어선의 깊이를 증가시켜 최전방 방어선을 가볍게 장악하여 영토의 손실을 비록 한시적이더라도 허용하는, 탄력적 방어였다.

 

1951년에 갑작스러운 휴전의 바람에 따라 UN군은 방어에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전선을 붙잡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방어선에 깊이를 주기 위한 노력으로 저항의 주력선의 강화된 방어진지 앞으로 다수의 진지들이 언덕고 고지에 배치되었다. 많은 경우 이 진지 저항선은 방어를 하기에는 매우 안좋은 위치에 위치해있었으나 이미 확보한 영토를 내주는것은 정치적으로 용납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상적인 방어체계가 설립되지 못하자 이 연약한 초소 진지들은 모든 경우에도 어떻게든 방어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초소들은 결국 전쟁의 정적 단계에 이루어진 거의 모든 전투의 배경이 되었다.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탄력방어를 채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공산군의 집중 포격에 대응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강구되어야만 했다. 이것에 대한 다연한 대답은 흙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공산군 포병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림에 따라 대량의 모래주머니, 철로, 그리고 목제들이 전선으로 배달되었다. 벙커공사는 보병을 포탄의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필수 덕목이 되었다. 관측소들과 지휘소들 또한 벙커로 옮겨졌으며 그중 대다수는 매우 단단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공산군 포병 사격이 76.2 mm 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벙커들은 105mm 포탄의 직격을 방호할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UN군 포병 또한 땅을 파고들었는데 그들의 화포를 단단히 고정시키고 화력통제센터를 목제, 철로, 그리고 대지 몇피트의 덮개로 보호했다. 

 

공산군의 포격이 보호되지 않는 통신선들을 격파한다는 사실의 인식은 이러한 생명줄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의 강구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법들은 통신선을 적어도 8인치 깊이 매설하거나, 통신선을 참호의 벽면을 따라 매설하거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수의 통신선을 운용하고 작전의 수행을 라디오만으로 수행하는것을 연습하는것 등이 있었다. 대대적으로 쓰이지 않은 (그리고 전쟁 후반에는 실패한 방법으로 확인된) 방법은 초소들을 초기 제압으로부터 보호해줄 목적이였던, 역사적으로도 검증된 위장이였다.

 

야전 진지의 강화에 대한 증가된 관심과 함께 UN군은 공산군 집중포격에 대한 대응의 초석으로 효과적인 대포병 활동을 놓았다. 이 대포병 프로그램은 대대적이고 정리된 정보수집 활동을 통해 공산군의 대규모 집중포격을 받는 지역을 확인하고 그 지역 이내의 가능한 모든 사격위치들의 확인이였다. 이 임무는 절차의 유연함의 부재와 부적절한 운송 수단, 그리고 화포 진지들을 강화하기 위한 자원의 부족과 같은 공산군 포병 시스템의 전통에 의해 좀 더 쉬워졌다. 정보팀들의 임무는 또한 항공 관측과 사진정찰 임무 (공산군 포병에게는 이용불가능했던 것들) 을 통해 부담이 덜어졌다.

 

공산군의 진지화 프로그램에 의해 UN군 포병은 대포병 프로그램에서 정밀 타격 파괴를 무력화보다 강조하였다. 이 프로그램들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한 사단은 고철 작전을 주기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알려진 공산군 화포진지들 (활동중이거나 비활동중이거나) 중에서 특정 몇개가 선택된 다음 이 위치들에 대해 지상 및 공중 정찰이 집중되었고 그들이 파괴될때까지 정밀사격이 차례로 가해졌다. 상위 제대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실행되었다. 종종 사단급 미만의 여단들의 중형과 중포병 자산들 또한 집중되어 순차적으로 공산군 포병 위치를 파괴하며 사단 구역들을 이동했다. 가끔 제8군의 모든 사단급 미만의 포병자산들은 하나의 여단으로 비슷한 목적으로 집결하기도 하였다. 전쟁의 마지막 6개월동안, UN군 포병의 대포병 임무는 전체 포병임무의 9%를 차지했다. 1953년에 150마일의 전선에서는 대포병전략의 일환으로 일당 약 5,400여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395번 고지

UN군의 대포병 전략의 한 훌룡한 연구 예시는 1952년 10월 6일 - 15일의 395번 고지 (백마고지) 전투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 위치는 9여단 구역의 좌측면의 일련의 언덕들이였으며 국군과 미군 포병들에게 지원받는 국군 보병이 방어하고 있었다. 공산군의 대규모 공격 준비 징후가 조기에 발견되어 9여단 포병들에게 전투 시작 직전 전투를 지원하기 위한 위치로 이동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초기 공격이 개시되었을때 방어군은 그들의 사격계획 설립을 끝마쳤으며 완성된 대포병 사격 계획 또한 완료한 이후였다. 10월 6일에 전투가 시작되었을때 이 대포병사격 계획은 즉각적으로 적용되었으며 교전 도중에 지속적으로 확인되었다. UN군에게 가용가능한 자산은 105-mm 야포 4개 대대, 155-mm 야포 2개 대대, 155-mm 포 1개 대대, 8-인치 야포 2개 포대, 4.5-인치 로켓 1개 포대, 그리고 1개의 4.2-인치 박격포 중대였다.

 

공산군 포병 전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전의 탄약 소모량은 50,000발을 초과했다. 작전 개시 30일 전부터 공산군 포병은 해당 구역에 대해 일당 244여발의 포격을 가했다. 작전 4일차에 공산군 포병은 하루당 12,000여발 이상을 발사하였다. 동일 기간동안 UN군 포병은 31,000발 이상을 발사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으며 이중 대부분은 대포병사격 임무에 사용되었다. 이후 공산군 포병의 효율성이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이러한 전투 양상이 일주일동안 더 지속되었지만 공산군의 포병은 다시는 이와 같은 효력을 내지 못하였다. 효과적인 아군 대포병사격은 UN군이 제 위치를 사수할수 있게 해주는 중요 기여요소중 하나였다.

 

결론 

한국의 UN군에 의해서 집중포격에 대한 대응의 3가지 카테고리중 (깊이를 사용한 분산/방어, 야전 진지강화, 대포병사격) 2개만이 사용되었다. 깊이에 따른 분산/방어가 선택가능하지 않은 상태에서 야전 진지강화와 대대적인 대포병 프로그램이 유일한 옵션이 되었다. 전후 분석에 의하면 비록 야전 진지강화가 공산군 포병에 대한 적절한 방호력을 제공해주었지만, 대포병 전략의 노력이 중요 방어 요소였음으로 보인다.

 

 

Chapter 7

한국전쟁: 집중 포격에 대한 중국군의 대응

개리 J. 비요르지 박사

 

한국전쟁때 한국으로 파병된 중국군은 공중 지원과 기갑이 없이 약간의 포병지원만 있는 사실상의 경보병 사단들이였다. 그들이 마주한 UN군은 전선 전반에 걸쳐 공중우세를 만끽했으며 포병 화력에서 어마무시한 우세를 보였다. 1951년 전반동안 UN군 사령부는 공중자산과 포병자산을 이용하여 중국 공산군 (CCF) 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CCF에게 특별한 방어 방법들을 개발하도록 강요했다. 첫 번째로, 공격 작전들은 규모가 작아졌다. 두 번째로, CCF는 표적의 수를 줄이려고 노력하였으며 가능한 한 많은 양의 군대를 지하에 배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CCF가 한반도에서 작전 및 전략적 동수를 이룰 수 있을만큼의 전력을 보존할 수 있록 해주었다.

 

1951년 4월과 5월

CCF 기동 부대들에 대한 포병사격과 공습의 파멸적인 효과는 1951년 4월과 5월에 CCF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묘사로 설명이 가능한다. 서울 북쪽의 미 제1여단에 대한 4월 공세는 UN군의 방어선을 도시의 북쪽 외곽까지 밀어냈지만 UN군의 공중 및 포병 사격에 의해 일어난 다수의 사상자와 혼란때문에 멈추게 되었다. UN군 폭격기와 장거리 포병에 의한 CCF의 후방구역의 차단은 중공군의 보급 시스템이 무너지도록 만들었고 부대간의 통신 또한 방해했다. 혼란이 가중됨에 따라 CCF 지휘관들은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가라”와 같은 포괄적인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예비대는 발생한 사상자수나 존재하고 있는 혼란의 여부에 대해 전혀 모른채 일선 부대를 추월해 나갔다. 9일 후 공세가 끝났을때, 약 71,712명의 중공군과 북한국이 사살되었다. 

 

이른 5월에 CCF는 그들의 부대를 한반도 중앙으로 이동시켰고 5월 16일에 10여단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이어지는 전투, UN군이 소양강 전투라고 부르는 전투에 따라 한국 작전들에서 지금까지 가해졌던 UN군 포병 발사제한수가 처음으로 해제되었으며 포병부대들은 기록적인 연사속도들을 달성하였다. 예시로, 5월 17일의 한 12시간 기간동안, 제2보병사단의 38야전포병대대는 105-mm 야포를 총해 11,600발을 발사했다. 5월 16일에 전투가 개시되었을때 10여단의 가용가능한 포병은 다음으로 이루어졌다:

 

           4개 중형 대대 (미)

           7개 경량 대대 (미) (1개 기갑 SP)

           1개 155-mm 포대 (SP) (미)

           1개 8-인치 야포 (미)

           2개 경량 대대 (한)

 

전투가 진행중인 동안 10여단은 1개의 추가적인 8-인치 포대를 포함한 추가적인 포병을 받음에 따라 가용가능한 포병 대대의 수를 20개에 가깝게 늘렸다. 10여단은 이 포병들을 40-마일의 전선에 30마일의 깊이로 배치하였으며 CCF의 공세가 깎이고 꺾이는 다음 6일의 전투 동안 다음과 같은 탄약 소모량을 달성했다.

날짜

소모량

톤수

5월 16일

17,113

504.71

5월 17일

38,885

1,088.46

5월 18일

41,357

1,187.45

5월 19일

47,184

1,357.42

5월 20일

50,102

1,377.53

5월 21일

47,188

1,287.55

합계

241,829

6,803.12

 

이 6일 동안, B-26과 B-29 폭격기들은 야간 폭격을 통해 10여단을 지원했다. 레이더 통제를 통해 그들은 CCF 예비대 주둔지와 집결지로 예상되는 지역에 많게는 200톤까지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포병사격과 공습으로 인한 CCF의 피해는 막심했으며 그들의 부대들은 종종 엄청난 혼돈에 빠졌다. 이것은 특히 밤에 더욱 더 두드러졌는데, CCF의 야간전투의 관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병력들을 규합시키고 재정비하는데 애를 먹었다. 

 

다음 사건은 이 당시 CCF에 무슨일이 일어나고있었는지를 묘사해준다. 5월 19일에 중공군은 두 명의 미군을 생포하여 그들을 공격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CCF 대대 사령부로 대려갔다. 5월 20일 밤에, 이 대대는 남쪽을 공격하려고 집결하던 와중에 집중 공습을 받게 되었다. 공습은 너무나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켜 생존자들이 무질서하게 북쪽으로 도주하도록 만들었다. 이 혼란와중에 미군 병사중 한명이 탈출하여 미군 전선까지 도주했다. 9 보병사단에서의 정찰대가 남은 한명의 미국인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정찰대는 해당 병사를 죽은채 발견했지만 동일한 지역에 완전무장한 300여명의 CCD 병사들이 있었다. CCF는 전장에서의 화기 회수에 엄청난 중점을 두었기에 이러한 화기의 대량 유기는 CCF가 UN군의 화력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지표였다.

 

CCF 지휘부가 UN군의 화력의 파괴적인 효과를 알아차렸을때 그들은 그들이 UN군 사령부에 의해 자행되는 “피해 강요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행동을 강구했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안은 UN군 포병 사거리 내에서 배치되는 병력의 수를 줄이는것이였다. 포탄 파편의 분석과 소리와 화염의 연구를 통해 CCF는 전선에 배치된 포병의 종류를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그들의 보병을 배치했다. 그들의 “보병은 전방이 가볍고 후방이 무겁게, 화력은 전방이 무겁고 후방이 가볍게” 원칙에 따라 CCF는 본대가 제 2선과 측면들에 반격에 대비해 배치되어있을때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병사들을 전방에 배치했다. 사령부는 이후 이 대규모의 병령이 한곳에 집중되어서는 안되며 위치사수식의 방어가 더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하달했다. CCF의 목적은 “필요한 시간을 벌면서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며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였다.

 

1951년 전반기에 CCF가 병력을 “전방은 가볍게 후방은 무겁게” 원칙에 따라 배치할때 미 제8군은 그것을 “one up, two back” 방어 대형으로 묘사했다. 이 배치에서는 전방 군단은 전선에 하나의 사단을 배치하고 예비대로 두개의 사단을 후방에 위치시켰다. 전방 연대들은 여전히 진지를 파들어가고 전진하는 UN군 병력들에게 강력히 저항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지형을 차지하고있는것은 이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졌다. CCF의 목표는 UN군 공세에 약점을 만들어 그들의 예비대를 이용하여 이를 착취하는것이였다.

 

1951년 6월 이후

1951년 6월 이후, 38선과 거의 일치하는 전선을 따라 CCF는 주력 저항선에 따라 진지형식의 방어를 채택했다. UN군의 강렬한 공습과 포격을 견디기 위하여 CCF는 부대들을 좁은 전선에 굉장한 깊이로 배치했으며 연장된 초소와 전방위 방어를 위한 중요 지형점들을 정리한 정교한 야전 강화진지 시스템을 설치했다. 주 방어진지들은 주로 전방경사에 배치되었으며 인원들의 막사는 주로 역경사에 위치했다. 전방 방어 참호들은 몇 피트 정도의 거리를 두고 판 쉼터 구멍들이 있었다. 수류탄을 저장하기 위한 구멍은 양쪽으로 파였다. 터널들과 예비 참호들은 전방 경사 방어진지들과 막사를 연결했다. 탄약고들도 또한 참호들을 통하여 방어진지들과 연결되었다. 모든 진지들은 고각 사격으로부터의 방호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넓은 사각을 제공하도록 건설되었다. 언덕 고지의 진지들은 15피트까지 이르는 나무와 흙으로 덮였다. 가용가능한 양에 따라 3개에서 12개까지의 통나무가 사용되었다.

 

엄폐물을 위해 땅을 파는것 외에도 CCF는 기동을 가리기 위해 지형, 자연 수풀림, 어둠, 기상, 그리고 연기를 사용했다. 전방 지역에서 행군은 야간에 각 병사들이 일렬로 3에서 5보 이격한 상태로 이루어졌다. 보조 도로와 산길이 이용되었으며 행군 군기는 매우 엄격했다. 중공군은 주요 승리를 위한 기회가 주간 작전에 입을 추가적인 사상자들보다 확연히 중요할때를 제외하면 야간이나 기상이 악화되었을떄만 공세를 감행했다. 목표지점을 점령하기 위해서라면 공격은 전투가 자정 즈음에 끝나도록 오후 일찍 시작되었다. 밤의 나머지는 참호를 파고 방어진지를 정리하는데 사용되었다. UN군의 진군을 늦추거나 저지하기 위한 공격들은 동이 틀 즈음에 전투가 끝나도록 일찍 시작되었다. 계획된 철수는 야간에 이루어졌으며 아주 가끔 박격포나 포병 포격에 의해 엄호되었다. 중공군 포로들에 의하면 이것은 CCF 병사들이 사격을 개시하게 되면 그들은UN군 포병의 즉각적인 우선 목표가 되기 떄문이였다.

 

위장은 CCF가 UN군 포병을 상대로 사용한 또 다른 방어수단이였다. 부대 지휘관들은 그들 진지의 위장에 굉장히 신경을 썼으며 그들의 병사들에게 자연물과 은폐물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지시했다. 병력들은 비트를 매우 신경써서 팠으며 비트를 자연물로 위장할뿐만 아니라 흙은 주변에 퍼트려 주위를 끌지 않도록 했다. 비트 외부에서 휴식을 취할때 병력은 나무와 같은 자연적인 엄폐물들로 소산하고는 했으며 자신들 사이에 최소의 10피트의 거리를 유지했다. 만약 항공기가 접근하며 병사들은 움직임으로 위치를 드러내지 않도록 얼었다. 이러한 위장 규율은 종종 CCF 부대들을 그들이 행군중이거나 개활지를 횡단할때 탐지당하는것으로부터 구해주었다. CCF 병사들이 쓰는 모자는 자연물을 부착하기 위한 루프가 있었으며 이 또한 그들이 주변과 녹아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CCF는 또한 박격포, 포병 자산, 그리고 전방의 모든 차량을 위장시키는데 굉장한 주의를 기울였다. 박격포 사격 진지들이 거의 항상 개활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에서 10여발을 발사한 이후에 운용 인원들은 박격포를 10야드 떨어진 위장된 구멍에 위치시키고 개별 비트로 소산하여 엄폐하였다. 위장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중공군은 현장에서 구할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디코이를 만들었다. 그들은 더미 소총수를 만들기 위해 버리는 옷에 수수를 채워넣기도 하였으며 통나무를 포신으로, 강철판을 방패로, 보드를 흔적으로, 그리고 수수로 바퀴를 만들어 디코이 포병 위치들을 건축하기도 했다. 간단한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이러한 디코이들은 상당한 양의 UN군 사격을 유인할정도로 사실적이였다. CCF의 위장 능력은 너무나도 효과적이여서 미 제9군에 의해 1951년 9월에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이 UN군에 의한 지속적인 항공 정찰과 맹렬한 폭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였다.

 

결론

중공군은 UN군의 화력으로부터 발생하는 피해를 크게 3가지 방법으로 감소시켰다.

  • CCF는 공세 작전의 규모를 줄였다. 초기에, CCF는 UN군의 사단급 부대를 괴멸할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UN군의 포병을 상대로 방어할 필요에 따라 CCF는 중대에서 대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작전을 계획할수밖에 없었다. CCF에게 대규모 공세 작전에 필요한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집결은 UN군에게 너무나 많은 좋은 항공 타격 및 포격 표적을 제시해준다는것이 명백해졌다.
  • CCF는 병력과 자원을 분산시켜 그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 지하에 은닉시켜 보호했다.
  • CCF는 은언폐의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 UN군의 표적 획득 능력을 저지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세가지 방어적 방법들을 사용함으로써 UN군 사령부에 비해 월등히 열세였던 CCF는 한국에서의 특정 전술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만큼의 야전 전력을 보존할 수 있게 했다. 만약 성공이 정치-군사적 목표를 달성하는것으로 정의된다면 중공군의 대UN군 포병 전략은 성공적이였다.

 

 

Chapter 8 

아랍군 포병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방어전략

조지 W. 가리치 박사

 

이집트와 시리아는 10월 6일 1405에 시나이와 골란 고원의 이스라엘 진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과 집중포격을 통해 1973 전쟁을 개시했다. 기습에 당하고 공중지원 없이, 이스라엘 방어군 (IDF) 는 강력한 합동군 독트린이 없는 상태로 전쟁에 참전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병력들은 아랍 포병에 매우 취약한 그들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방어시설을 유지하고 결국에는 초기 아랍 공세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공세 나서기까지 했다. 이스라엘이 대규모의 아랍 포병을 상대로 어떠한 대응방법을 취했는지가 이 챕터의 내용이다.

 

공세에서의 아랍 포병

이집트는 170-킬로미터 전선에 2,000여문의 야전 화포를 53분동안 동원하여 3,000여톤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시리아는 65-킬로미터 전선에서 600여문의 화포를 55분동안 사격하였다. 전쟁 개시 직후 약 10,500발의 포타느 혹은 초당 175발의 포탄이 시나이의 운하 지역에 낙탄하였다. 골란의 시리아 포격 또한 비슷한 강도와 규모였다.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주공을 파악하는데 혼란을 겪도록 넓은 전선에 따라 포격을 가했다.

 

아랍 국가들의 전력은 거의 전격적으로 소련제 화기에 의존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종류와 사거리를 보유했다.

 

화기

사거리 (킬로미터)

122-mm 야포, M-30

11.8

122-mm 야포, D-30

15.3

130-mm 포, M-46

27.1

152-mm 포/야포, ML-20

17.3

152-mm 야포, M1943 (D-1)

12.4

152-mm 포/야포, D-20

17.4

180-mm 포, S-23

30.4

 

다수의 240-mm BM-24 (10.3킬로미터); 140-mm BM-14-16 (9.8킬로미터); 122-mm BM-21 (20.4 킬로미터); 그리고 132-mm BM-13-16 (9킬로미터) 로켓 발사기 또한 포함되었다. 박격포들은 120-mm, 160-mm, 240-mm 구경의 화포들이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또한 FROG 로켓들과 SCUD 미사일들도 보유했었으나 이들이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러한 장비들 외에도 아랍 국가들은 웨스트 뱅크에서 이스라엘의 콘크리트 필박스들과 다른 표적들에 직사화력을 투사하기 위하여 미확인된 수량의 전차들을 배치하였으며 이집트는 220여대와 시리아는 100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주요 이스라엘 시설들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였다. 양 아랍 국가들 모두 시나이의 포병 도로 (10-12킬로미터)의 이스라엘 진지들과 골란 대부분 지역의 이스라엘 시설들에 대해 포격을 가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두 전선에서의 아랍 국가들의 목적은 비슷해보였지만 현재로써는 이집트측의 목표가 더 많이 공개되어있다. 뒤따르는 작전에서 이집트 사령부는 그들의 초기 포격을 바 레브 선의 1~3킬로미터의 깊이로 집중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방어자들을 그들의 벙커에 고정시키기를 원했을뿐만 아니라 이집트 병력들이 이스라엘의 후방에 진입할 수 있도록 지뢰와 철조망 지대에 빈틈을 만들수 있기를 기대했다.

 

15분간의 집중포격 이후 (이집트 병력들이 수에즈 운하를 거너기 시작할 시점), 이집트 포병은 그들의 사격을 예상되는 이스라엘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후방으로 옮겼다. 이 단계에서 이집트 계획가들은 이스라엘 포병을 침묵시키고 지휘소를 타격하며 도로, 보급소, 그리고 장거리 포병이 있는 집결지들을 타격하는데 상당한 자원을 할애했다. 이집트 관측단 또한 전진했으며 일부는 전선 후방으로 침투하여 이스라엘 병력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전쟁 발발 30분 이후, 대전차 화기로 무장한 보병과 포병은 합동하여 이스라엘 기갑의 반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포병 화력은 이스라엘 전차들을 대전차화기들의 킬존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집트 공군은 거점들, 포병 진지들, 지휘소, 전자전 센터, 그리고 비행장들을 목표로 공습을 시작하였다.

 

전쟁의 넷째날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선두군의 진군을 지원하고 이스라엘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집중사격에 의존했다. 10월 14일에 이집트는 그들의 마지막이자 최후를 맞이할 공세를 30분간의 사전 준비 사격을 가한 이후 개시하였다. 북부전선에서는 시리안 공세작전은 8일에 정지되었다. 그러므로 시리아인들은 종전까지 방어의 역활을 수행하였고 그에 따라 시리아 영토에 이스라엘군의 진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집중사격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효과

몇몇 저자들에 의하면 1973 중동전쟁에서 포병은 최다 사상자를 낸 화기였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의 배치와 전쟁계획에 대해 굉장한 첩보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쟁 첫날에 사실상 모든 포병 및 전차 계류지가 최소 한발의 포탄에 의해 피격되었었다. 이스라엘 포병은 양 전선에서 일방적인 방어를 강요받으면서 191 사망이라는 역대 최다의 사상자를 남기게 되었다. 이 사상자들의 대다수는 전쟁 개시 초반동안 입은 피해이다.

 

포병의 집중사격은 방어자들에게 혼란과 분산을 일으켰다. 이집트 군사 저자들은 다리를 점거하고 전쟁 내내 이스라엘의 반격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을 이스라엘의 반격을 혼란스럽게 했던 포병덕분이라고 한다. 통신차량에 대한 직격탄과 유선 통신망의 방해, 그리고 포격이 지휘소들이 더욱 후방으로 물러나도록 강요함으로써 전장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더욱이 포격으로 인한 연기는 양측에게 식별의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포격에 충격을 받은 많은 이스라엘 사령관들은 자주 통신망을 과부화 시켰으며 상부 지휘관들이 전술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것을 어렵게 했다.

 

전반적으로, 로켓과 공군을 포함한 이집트 포병은 제병합동 반격을 실시하려던 이스라엘의 시도에 피해를 입힘으로써 발판을 확보하고 확장하려는 이집트의 공세작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군이 화력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부대 지휘관들은 점차 규정된 통신절차를 준수하였으며 이는 더 정확한 보고와 전장에 대한 원활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은 전장에서 대량의 사전 준비포격에 대응하는것을 매우 어려워했다. 1973 전쟁동안 IDF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정신적 충격의 증가량을 보고하였으며 이들은 지속적인 포격의 첫 한 시간동안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것으로 증명되었다. 이것은 2주 후 이집트군이 West Bank 방면에서 반격을 준비하던 이스라엘군에게 다시 집중 포격을 가했을때 다시 증가하였다. 종전 이후 전방면에 대해 이루어진 IDF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전투 충격은 기갑에서 제일 흔하게 발생하였으며 그 다음에 포병과 보병의 순서로 발생률이 높았다. 전투에 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덜한 지원부대들은 전투부대들보다 명백히 더 큰 정신적 붕괴의 위험에 직면했다.

 

방어에 나선 이스라엘군

이스라엘군의 독트린은 지상군이 공중 포병의 역활을 하는 공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은 개전 첫날에 이스라엘군의 공군과 그들의 방공장비를 파괴했다. 공지 합동 독트린의 약점은 이스라엘군이 중동 포병에 의해 고통받는데 기여하게되었다.

 

비록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지만 중동 포병은 시나이와 골란에서 이스라엘군 강화지점들을 파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시나이에서는, 사이드 항 동쪽의 부다페스트 강화지점은 항복하지 않았으며 11일에 이스라엘군에 의해 구원받았다. 반면에 타피크 요새는 탄약 부족으로 인해 방어가 무너진 13일까지 항전했다. 골란에서는 대부분의 강화지점들이 항전을 이어갔지만 이 지역에서의 중동 공세는 시나이와 달리 개전 둘째 날에 중지되었다. 셋째 날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시리아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합동작전 독트린에 약한 IDF는 기갑을 선호하면서 포병에 소홀했다. 이스라엘군은 공중 지원과 함께 전투하며 오직 짧은 기간동안만 방어를 하는것을 계획했었다. 공중지원이 없는 지상군은 지속적으로 효과적인 대포병 사격 없이 전투해야만 했다. 시나이의 포병도로와 같은 경우에는 이집트군의 규모와는 비견되게 오로지 12개의 포대, 혹은 48문의 포와 야포 (주로 105-mm, 155-mm, 그리고 175-mm) 만 보유중이였다. 개전 첫날이 끝나갈때즈음에는 이 48문 중에서 오로지 한 문만이 발포가 가능했으며 나머지는 격파되거나 지속된 사격에 의해 전투불능에 빠졌다. 

 

이 포병 전력의 불균형은 이스라엘군 지휘부가 계속해서 기갑에 중점을 두면서 전쟁 내내 유지되었다. 포병은 시나이 전선으로 이동하는 수송대에게 매우 낮은 우선순위에 위치해있었으며 이 점은 몇몇 이스라엘 분석가에 의하면 전쟁의 매우 중대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대포병 사격은 가능할때에도 매우 산발적이며 신중히 선택되었으며 매우 단시간동안만 유지되었다. 몇몇의 경우에는 단시간의 대포병 사격이 중동 포병을 침묵시키는데 충분할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과는 불규칙적이였으며 이스라엘군 야전 지휘관들은 이집트군의 공세작전에 대응하는 공중과 포병 작전의 부재에 대해 불평하게되었다. 

 

기동성, 특히 깊이를 이용한 기동보다는 수평적 분산은 집중 포격에 대응하는 이스라엘군의 방어전략의 기반이였다. 예시로 수많은 이스라엘군 포병은 매일 5번에서 15번까지도 진지변환을 하였으며 미리 준비된 진지들로 20에서 30분의 간격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미군의 155-mm 자주포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활약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아랍군을 상대로 영토를 빼앗기지 않아야 했으므로 중동군의 포격을 상대로 매우 적은 선택사항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 제 7기갑여단의 77전차대대의 사령관인 Avigdor Kahalani는 그의 부하를 대면할때의 참담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정확한 시리아군의 포격 아래에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전차들에게 산개하라는 명령밖에 내릴수가 없었다”. 전차병들은 그들의 해치를 닫았으며 기동군들은 적에게 영토를 내주기보다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비틀었다”.

 

한 이스라엘 작가는 시나이의 방어와 얼추 일치하는 설명인 골란의 기동력 중심의 방어태세에 대해 설명했다.

벙커와 마을 방어진지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방어군 전체가 기동이 가능했다. 전차, 자주포, 보병, 그리고 기계화 보병은 모두 움직였거나 단기간 내에 기동할 준비를 마칠수 있었다. 포병은 기동하고, 준비하고, 사격하고, 휴식하고, 기동하고, 다시 명령을 받은 직후 다시 사격하고… 이스라엘 전투군의 화력 전체가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수많은 조합으로 기동이 가능했다. 공격군은 그들이 마주칠 적의 조합에 대해 절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은 기동에 기반한 전술이였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군은 인력과 장비가 최소한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요구했다.

 

위에서 묘사된것처럼 전투중의 효과적인 수평 분산은 병력들이 재배치할 수 있지만 적이 노리지 않을만한 지형을 고를 수 있는, 지형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지휘관에게 의존되었다. 물론 이스라엘군의 경험에 따라 변형이 이루어졌다. 시나이에서 전투하도록 훈련받은 부대들은 갑작스럽게 골란으로 배치되었으며 이와 반대의 상황들도 일어났다. 작전의 다른 전구로 재배치 되면서 이스라엘군은 자신들의 지형을 숙달한 방어군의 승수 이점을 포기하게되었다.

 

위장과 속임수

강화진지, 대포병 사격, 그리고 기동력을 배치하는것 의외에도 이스라엘군은 위치를 숨기기 위해 위장을 사용하고 진짜 표적들에게 화력을 걷어내기 위해 가짜 포병 진지들을 설치하였으며 포병 사격을 흐트리기 위해 가짜 무전들을 내보냈다.

 

결론

1973 중동전쟁동안 IDF는 방어에서의 기동력의 가치를 이해했으나 제병합동을 위해서는 포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는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습득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대포병 역활을 수행하기 위한 대량의 포병의 필요성이였다. 1973년에 IDF는 오로지 3개 포병여단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82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할때는 자주포의 댓수는 약 300여문에서 950여문 이상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200% 이상의 증가량). 이러한 자주포의 엄청난 증가와 함께 IDF는 화력과 기동성 둘다 확보할 수 있었다.

 

1973년의 IDF의 경험은 후방으로 제한된 분산도를 가지고 있는 전선의 강화진지에 기반한 방어체계의 효용성을 밝혀주었다. 이스라엘군 사령관들은 국가 지도부가 필수불가결하지 않다면 그 어떤 영토의 포기도 허용하지 않았기에 이와 같은 전술을 사용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에 따라 IDF는 상당한 수의 인력과 자원을 대가로 치뤄야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