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폭행 당한 것은 사실.

 

 

유관순 열사 성고문설이 왜 나왔냐하면

위대하신 독립운동가이신 박은식 선생이 독립지혈사 운운하면서 또또 구라쳤는데

검증없이 독립기념관 만들던 시절까지 이게 사실인냥 돌았고

이걸 유관순에게 갖다 붙히면서 살이 인터넷에서 더 붙은 경우

 

 

유관순이 오늘날의 이미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특히 이대 기독교 계열에서 한국의 잔다르크와 같은 위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위인만들기 성인만들기를 쓰던 권위주의 정권의 방침과 합쳐진 것임


당시 그렇게 무슨 대표적으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대표가 된 이유도 사실 없음
무슨 일제가 숨기기 위해서 당시 어쩌구도 사실 아님
 
해방 이전에는 감리교 연차총회에 부모 다 죽고 오빠와 자신도 감옥에 간 불쌍한 소녀가 있다고 보고된 것과
영국 출신의 장로교 의료 선교사였던 스코필드 박사가 
제자였던 노순경을 면회하며 외국 언론의 힘을 빌려 수감자들 상황을 보다 유관순 이름표를 봤던가 했던 경험담. 이 정도
 
 

 

 

근래에 쓰이는 표준영정의 경우는 그래도 좀 실제와 가깝게 그려진 편인데
사람들이 많이 알고 많이 쓰이던 그림은 아예 다름
 
유관순 경우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있는데 안 찾아보면 엉뚱한 소리 하게 됨. 첫번째 짤처럼.

 
어린 시절의 친구나 그 후 그녀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체구 크고 목소리 크고 씩씩한 여성으로 기억했으나(신장은 근래 논쟁 재현)
어쩌다 단아하고 굳건한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바뀌었음.

 
성고문설이라고 돌아다니는 것,
거의, 사실인 부분이 거의 없음

 

 

 

독립운동지혈사스러운 성고문설은 일종의 프로파간다 도구로 아무 근거도 없이 날조했던 이야기임

 
 
유관순과 같이 시기 체포되어 유죄판결 받았던 이화학당 학생들도 보통 1년 후에는 다 학교로 돌아가서 정상 생활했고
같은 감방에 있던 이아주는 출옥 이후 인촌 김성수와 결혼 함.(근데 이애주냐 이아주냐?)
 
재판정에서 당당한 모습에 김성수가 반해서, 병으로 가출옥되어 병원에 입원한 이아주를 찾아 와서 만나게 된 후.
 
유관순 형량이 남보다 긴 이유는 3.1운동 주도한 부분보다
헌병 보조 폭행 부분이 커서, 실제로 다른 사람들 - 특히 같은 이화학당 친구들 - 보다 최종적으로 6개월 정도 형을 더 오래 살게 되었고
그 바람에 출옥 얼마 안 남기고 옥사하게 됨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 여성용으로 지어진 지하감방의 8호감방에 수감되었고 당시 함께 감옥 생활을 한 사람은

 
어윤희(1877~1961) 충북 충주 출신으로 개성으로 이주하여 신학문 공부와 기독교 전도사를 하다         
3.1운동으로 체포. 유관순 감옥에서의 행적에 관한 증언을 가장 많이 남긴 사람. 
 
권애라(1896~?) 개성 출신. 이화학당 졸업반 시절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배부하다 체포.         
앞에 말했지만 이아주도 있었고, 아이러니 한 것은 이아주가 아파서 병원으로 실려가게 될 당시 아프다고 급히 알린 당번이 유관순 

 
그 외에 신관빈, 김향화, 눈이 안 보이는데도 3.1운동에 참가했던 신명철 등이  같이 있었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어떤 증언으로는 구세군 사령부인 엄명애도 같은 방에 있었던 시기가 있다고 이야기가 있고 최소한 목격은 했음
 
이 사람들 증언은
 
형 확정 후에도 최후까지 투쟁한다는 정신을 기린다며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가 간수에게 끌려나가 얻어 맞거나, 식사 제한등의 처벌을 받던 모습이나
사실 체구가 큰 편이라 남들보다 밥이 적어서 더 힘들어 했다는 인간적인 이야기도 있음.
 
인터넷 돌아다니는 고문 이야기는 사실 아님
 
3.1운동 1주년 기념으로 감옥 안에서 만세 합창 주도하다 상당히 심하게 맞았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부모님 잃고 오빠까지 잡혀간 거에 절망감을 느꼈다는 증언과 함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만행 같은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음.
 
역시 그 무렵 2번의 옥고를 치룬 박인덕도 유관순을 자기가 식사당번 통해서 '무모하고 너만 몸 상한다'고 말렸다고 이야기를 남겼고
그리고 무슨 시체에 어느 부위에 정자가 어쩌고 -*-;;; 장난하나.
이태원에 썼던 장지가 후에 일제 군용기지로 전환되면서 연고자들에게 신문으로 이장 최고 공고를 했으나
당시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알지 못했다고 함(그렇게 생각됨) 그래서 무연고자로 사라진 것임. 한 마디로 시체를 뭐 찾아서 어쩌구 뻥임

 
무슨 유관순 유언까지 만들었던데 유관순이 남들보다 형기가 긴 편이어서 오래 감옥생활 같이한 사람들은 먼저 나갔고
결국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증언은 아예 남아있지 않음
아쉬운 일임
사실 죽은 날짜도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있기도 했고

 
 
사인에 관하여 참조할 이야기는
오빠인 유우석과  이화학당의 지닛 월터(A. Jeannette Walter) 학당서리, 친구 김현경이 유관순을 면회갔는데        

 
당시 "얼굴이 퉁퉁부어있고 전신이 멍들고 잘 걸음을 못 걸었다. 손도 부어서 맞잡은 손의 자국이 눌린채 나오지 않았고 살이 썩어서 피가 나왔다.         
입원시키고 싶었으나 '중죄인'이라면서 거부당했다." 라는 이야기를 남겼음 
(같은 감방의 이아주의 예를 보면 감옥 안에서의 그 당시 일제 기준으로 '행동불량'이 - 끝까지 저항한 모습 -  원인일수도)
 
        
시체가 이화학당으로 옮겨진 후 검시를 했던 의사가(부검이 아니라) 당시 방광파열이라고 했는데
허리를 다친데다, 방광 부분에도 폭행으로 상처를 입는 바람에
요독증, 폐혈증, 또는 신부전증의 후유증이 와서 사망했을거라는 추정과 부합되는 증언
어떤 소설가가 예전에 자궁파열 드립 쳤던데 에휴... 왜 사냐
 
 
무슨 고문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고 해서 외국인 박사가 국제적으로 항의해서 내줬다는 류의
도시전설 역시 돌아다니던데
 
 

 

일단 실제 공식기록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경성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이라고 오빠 유우석 호적에 남아있는 것 뿐
그리고 관련 증언은 전혀 다르게 남아있음

 
무슨 시신을 안 내줘서 국제적으로 항의하여 압력을 넣고. 다 전혀 없는 이야기고
당시 감옥법 73조에 따라 2년 안에 직계가족이나 가까운 친족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혹은 친구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부모님과 돌아가졌고, 숙부 유중무 님도 복역중이고 동생들은 어려서 잠시 다른 집에서 보호에, 오빠인 유우석 역시 출소 후 연락이 안 닿아서
가매장이 되었다가 - 그래서 시체가 더 상했고 - 전혀 모르고 있던 학교로 시체가 옮겨진 것임
그래서 월터 학장 서리가 시신을 인수함. 과거에는 프라이 학장당이 인수했다고 쓰여진 적이 있으나 당시 서울에 없었다고

 
그리고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몇 달 전 서울로 이주한 친척인
유빈기라는 분(이 분도 3.1 운동으로 집행유예 3년 받은 분)에게 연락이 닿아서
아들 유중영이라는 분과 도착해서 관 옆에서 밤 새우고, 그 후 오빠 유우석에게 연락이 닿음
일제가 보름 가까이 못 찼던 친척을 이화학당이 찾음
 
오히려 오빠 유우석은 더욱 더 비참하게 죽었기를 바라면서 날조하고 그걸 그대로 믿는 네티즌들과 달리
부조리한 식민 지배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간 동생이 오히려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고 말했고(짤 첨부)

 
시체절단설 역시 해방 후 유관순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그때 만들어진 이야기. 사실 아님
 

 

김종우 목사가 장례식 집전하였고, 
유우석과 친구 2,3명. 박노철 선생이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어주었음
당시 경찰과 타협으로 1918년 대학부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김활란이 학생 대표로 장지까지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따라감
장례식에도 형사가 명단 들고 와서 같은 학급만 참여할 수 있게 하기도 했고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면서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며 나 애국한다고 자뻑할 시간에
진짜로 관심있으면 독립운동사연구소 같은 곳에서 낸 유관순 일대기 보면서 실제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겪었나 보고 오던가
그럴 의지도 없으면 괜히 관심있는 '척' 좀 하지 말기를

 
유관순 관련해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정말 황당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날조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