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폭력 불복종 평화시위였다.

죽~ 33인의 얼굴마담들을 치켜세우며 평화적인 시위 운운하시다가 6차 개정때에 이르러서야 무력저항에 대한 기술이 들어감. 필자는 82년도에 개정된 국사교과서로 공부했음. 6차, 7차 국정 교과서들은 3.1운동이 단계적으로 무력항쟁의 국면에 들어갔다고 서술하고 있음. 3.1운동 초기에도 많은 무력충돌이 발생하였으므로 그나마 이것도 부정확한 서술임.

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미국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독일과 같은 패전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들에게만 해당되었고, 일본과 같은 전승국의 식민지의 민족자결은 회의의 관심사항이 아니었음. 오히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들의 기존 식민지 정책에 대한 현상유지를 강화하는 제국주의적 관점이 담겨있다고 신돼지 선생께서는 역설하신 바 있음.

3.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5.4운동은 3.1운동 이전부터 계획되고 진행되었던 중국의 반봉건 신문화주의 운동.

4. 인도의 간디, 네루에게 영향을 주었다.

3.1운동이 인도에 영향을 미친 증거로 7종 교과서 하나같이 인용하고 있는 "네루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은 3.1운동이 발생하고 13년이나 뒤인 1932년에 기록된 것으로써 아무 관련이 없는 소재임.

5. 33인의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운운

낭독 안했음. 태화관에 모인후 한용운이 위하여~를 선창하자 참석자 일동은 건배를 외치고 자수 크리.

6.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속자 47,949명

사망자 168명, 부상자 629명, 구속자 5813명 (자료에 따라 약간씩 대동소이함)

그렇다면 3.1운동을 어떤 식으로 소개했을까. 예컨대 천두슈가 1919년 3월 23일『每周評論』에 쓴「朝鮮獨立運動之感想」을 보자.
 
"헌병부대와 경찰서 문앞에는 언제나 꽁꽁 묶여 있는 백성들이 몇 십명 때로는 몇 백명이나 되었다. 경찰들은 독립운동에 참가한 여성지도자를 체포하기만 하면 옷을 홀딱 벗겨서 거리에 세워 놓았다"

"한 어린 학생이 오른 손에 국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헌병은 칼을 들고 그 학생의 오른팔을 뚝 잘라버렸다. 그 학생은 다시 왼손으로 국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계속 외쳤다. 일본헌병은 또 그의 왼손마저 잘라버렸다. 그러나 그 학생은 의연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이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하게 하였지만 그 학생은 말을 듣지 않았다. 혈안이 된 일본헌병은 그만 그 학생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논자가 중국학자들의 견해라며 인용한 기사들의 전문을 읽어보면 객관성이 답보된 어떤 학술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당시 중국의 변혁적 사조를 고조시켜야 했던 진보 지식인들의 프로파간다에서 창작된 것들이다. 적어도 영향을 미쳤다라고 평가가 되려면 그 사건의 발발이나 전개에 추동력을 위한 어떤 동인(動因)을 제공했어야 한다.

그러나 3.1운동의 경우 5.4운동(협의로 보나, 광의로 보나)이 촉발하게 된 아무런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운동을 주동한 조직들은 이미 신문화운동으로 표방되는 변혁운동 조직으로서 1919년 이전에 만들어진 단체들이며, 그 이전부터 항일, 반봉건 정치투쟁을 해오고 있었다.

단지 일개 학생데모에 그쳤어야 할 5.4 시위가 대규모 사회운동으로 전환된 것은 1919년 4월 29일 파리강화회의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전국적인 실망과 분노들이 폭발되어 대중적인 응집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3.1운동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들이 중국과 같은 기대와 실망을 경험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러한 반외세 민족운동들이 발생했다. 터어키의 민족 부르죠아 혁명, 이집트의 민족독립운동, 우리나라의 3.1 운동이 다 그런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무슨 3.1운동이 주도적으로 이 모든 것을 이끌었다는 식의 괴설들이 어떻게 설득력을 가진다는 말인가.

5.4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3.1운동이 아니라 러시아의 10월 혁명이다. 반론자가 인용하고 있는 천두슈, 리다자오가 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소비에트 정권은 혁명 성공과 동시에 중국에게 "무릇 전의 제정시대에 취했던 특권을 모두 중국에 되돌려주고, 어떠한 댓가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중국의 독립해방운동에 대한 원조를 제의한 바 있다.

이에 傅斯年과 羅家論은 물론이고 陳獨秀는 세계를 정복할 20세기의 대혁명이라 극찬하면서, 중국 혁명의 롤모델로 삼았다. 陳獨秀, 李大釗 등이 주도하는 반제, 반봉건 운동은 5.4운동으로 촉발되고 다시 6.3운동으로, 다시 중국 공산당 창당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적어도 이 정도의 일관성은 가져야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