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회관

 

 

 

                                                                                                      허 창 옥

 

  

 

  새다. 새 한 마리가 얕은 물에 발목을 담근 채로 연신 먹이를 쪼고 있다. 신천(新川)의 산책로를 걷다가 봇물이 내려와 작은 폭포를 이루는 곳, 물이 가장 가까운 기슭을 찾아 앉았다.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하여 물소리 듣기를 좋아하지만 도회지에서 흐르는 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을 만나고 싶어서 신천을 찾는다. 혼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다가 강 저편에 서 있는 새를 본 것이다. 검은 새다.

 

  아침저녁 신천을 지나며 백로를 본다. 깃털이 눈부시게 희고 몸매가 빼어난 새다. 새는 천천히 날거나,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서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그 견줄 데 없이 아름다운 새를 차창으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행복해진다. 날거나 머물거나 그것이 새인 것만으로도 나에게 기쁨을 준다. 더구나 하얀 깃털 옷을 입은 새라니!

 

  하지만 해 저물어 어둡고 선득한데 먹이를 쪼고 있는 저 검은 새는 쓸쓸해 보인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행복하지가 않고 마음이 아리다. 저 새는 가난하고 추워 보인다. 둥지로 돌아가 잠을 자야할 시간에 왜 아직도 시린 물에 발목을 묻은 채 먹이를 구하고 있는가. 새의 이름도 생태도 모르면서 그 처지를 운운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이 시간에 거기에 있는 것, 저 새에게는 그저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일상일지도 모른다.

 

  일상이라, 불현듯 이태 전에 본 조각전(彫刻展)이 생각난다. 각북 가는 길에 동제미술관을 들렀었다.『일상과 이상』이란 테마로 전시된 작품들 중에 유난히 내게 다가왔던 것은「여행」이었다. 새의 형상이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둥근 공간으로 처리한 새의 몸통에 사람을 앉혀 놓은 것이었다. 하늘을 향해 한껏 길게 뻗친 부리와 목에서 수직상승의 의지를, 수평으로 쫙 펼친 두 날개에서 무한창공을 날고 싶은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의지와 열망은 새의 것이며, 새가 되고 싶은 사람의 것이라 여겨졌다. 

 

  옳거니 했다. 사람이 만든 새인 비행기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비상이다. 멋진 비상, 진정한 비상은 대기와 구름을 살갗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비바람의 저항을 이겨내면서 누릴 수 있는 새들만의 특권이다. 자유인 게다. 작품「여행」에서 내게 건너온 메시지는 자유였다. 새의 몸에 실려서 여행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새’ 라는 형상과 의미 그 자체로 충만한 자유, 그것이 느닷없이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새 한 마리가 내게로 들어와서 여태도 살아있다. 나는 그 새를 가두고 있는 새장이며 새 주인이다. 내 안에 있는 새를 내보낼 어떤 방도도 없이 이따금 새의 파닥이는 날갯짓을 느끼고 그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대로 산새소리 물새소리 가로수에 찾아드는 도회지의 뭇새소리를 즐거이, 때로는 아프게 들으며 살고 있다.

 

  강은 빈약하다. 인공으로 유지되는 강이어서 보에 물을 가두고 내보내고를 조절한다. 보에서는 흘러넘치는 물이 연이어 흐르지를 못하고 바로 아래에서 바닥을 드러내는 형국이다. 유장하게 흐르지는 못할지라도 밤낮으로 강물이 흘러서 신천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많이 아쉽지만 지척에 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더구나 그 물 위를 나는 새들을 볼 수 있고, 밤이 되어도 강을 떠나지 못하는 새를 보며 그와 나 그리고 내 안의 새가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진정 기껍다.

 

  상념에 젖은 사이 검은 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날개를 펴는 순간을 놓쳤다. 어디로 갔을까. 그곳이 어디이든 꿀맛 같은 잠을 자기를 바란다, 내일은 또 하루치의 일상이 기다릴 터이니. 일상은 고단한 날개 위에 내려덮이는 어둠이며 늦은 저녁의 허기이고 시린 발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살아있음의 환희와 자잘한 기쁨의 원천인 것이다.

 

  새가 꿈꾸고 내가 열망하며 동시에 내 안의 새를 날려 보내고 싶은, 그 자유란 그러니까 단순히 일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곤고한 일상의 뒤에 찾아오는 것이며, 겨운 날갯짓으로 헤쳐 나가서야 비로소 이를 수 있는 편안한 마음 또는 얽매이지 않는 정신일 터이다. 온갖 것에 얽매여 저 창공을 날지 못한 내 안의 새는 오늘도 힘찬 비상을 꿈꾸며 다만 하루치의 날갯짓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