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전의 배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후 천주교는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으며, 덩달아 서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이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서양의 거대한 무역망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항해 기술이었다. 영주와 상인 계층의 지지 아래 일본의 해양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특히 나가사키 지역은 서양의 갤리온과 유사한 함선을 건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발전된 해양 기술은 해외 무역의 확대를 불러왔고, 그 결과는 더 많은 수익이었다. 1603년 에도 막부가 수립된 이후 일본 전역이 안정화되자 중앙정부 역시 해외 무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무역의 규모는 더 확대되고 체계 역시 복잡해졌다. 에도 정부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에 영감을 받아 이전 도요토미 정권처럼 정부가 통제하는 주인선(朱印船)제도를 만드는 대신 일본에 무역회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인 난카이 주식회사(南株式會社)는 막부로부터 자유로운 경영을 약속받았지만 상당수의 지분을 막부가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난카이 주식회사는 동인도 무역으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약속하였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앞다투어 투자하기 시작했다. 투자가 과열면서 주가도 폭등하기 시작했으나 동인도 무역 시장은 한정되어 있었고 투자자들에게 더 많은 수익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난카이 주식회사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무역 시장이 될 곳은 해가 떠오르는 곳 너머에 있었다.

해가 뜨는 나라보다 태양에 더 가까운 나라가 존재한다는 소식은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영주와 상인들에게는 막대한 부를 약속하는 것 같았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북돋았다. 그리고 누군가들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았다. 키리시탄(기독교인)에게 신대륙은 막부의 탄압에서 벗어나 순수한 하나님의 땅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키리시탄 금지령 이후 더 이상의 선교활동은 금지당했으며 수많은 키리시탄들은 영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죽음의 공포에서 싸워야 했다. 난카이 주식회사에서 신대륙 식민지 개척자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모집소에 찾아왔다. 사실 막부는 키리시탄들의 행적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키리시탄들을 잘못 건들여서 큰 화를 입기보다는, 그들을 저 멀리 외딴 곳으로 보내는 것이 기독교를 몰아내는 데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첫 번째 식민지가 성공한다면 막부는 이미 존재를 알고 있는 키리시탄들을 싸그리 붙잡아 식민지로 몰아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보급을 해 주는 대가로 그들의 충성을 보장받고 식민지 경영을 할 셈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식민지 개척단이 꾸려졌다. 

서양의 기술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무역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