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동방 프로젝트 25년의 소회>

 

 

동방 프로젝트란 거대 IP는 지난 25년에 걸친 세월 동안 지극히 다양하게 발전한 만큼다양한 플랫폼과 2차 창작의 수혜를 입어 게임음악동인지를 포함한 만화소설 및 설정집굿즈애니메이션 등등 방대한 기반을 자랑한다

 

국내에선 해외에서 그렇듯 꾸준히 인기를 쌓아오다가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배드 애플이나 치르노의 산수교실은 당시 동방이란 IP를 몰랐던 필자도 접한 바 있다아니솔직히 음원 합성 및 MAD 계열 영상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스였으니 그럴 수밖엔 없었다.

 

이때가 2010년대 초반이다시대가 바뀌며 서브컬쳐를 지배하는 패러다임도 바뀌고단일 컨텐츠가 5~10년 이상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며(분기별 유행의 양성화국내 팬덤 또한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개인적으로는 이 시기가(늦게 잡아도 ~2015페이트아이돌 마스터 등등 소위 다른 니코니코 삼대장과 갈라지기 시작한 시기라고 추정하고 있다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지금도 하나의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애니화였다아무리 다 지어놓은 왕좌에 쐐기를 박는 용도라곤 해도정체된 팬덤에 활력을 불어 일으켜 주는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이웃집에선 아이돌 마스터2(2011)’의 호불호로 경색된 2차 창작계를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크게 쇄신해주지 않았나

 

비슷한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ZUN 선생은 제작사에 저작권이 귀속될 수 있다는 우려 등을 근거로 재차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꾸준히 동방 외전 제작과 동인활동을 겸업해오던 황혼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그리프신드롬(‘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2차 창작 게임)이 애니플렉스의 정당한 권리 행사로 발매 중지된 사건을 보면태생부터 동인 활동을 무제한 허용하는 동방의 성공 도식과는 다소 대치되는 감이 없지 않다

 

마치 권리처럼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던 것을 오늘부턴 누군가의 호의라는 불안한 전제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므로 동방 프로젝트가 택한 길은 다른 대형 IP와는 사뭇 달랐다원래부터 팬층이 두터웠던 일본은 눈에 크게 띄는 타격 없이 원만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중국이나 미국에선 지금이 전성기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세가 두드러진다반대로 2010년대 후반은 당시를 기억하는 국내 팬들에게는 다소 암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가 필자가 동방을 처음 알고 접하게 된 시기이다.

 

 

본론

 

<실패한 연구>

 

 

당신이 머나먼 무인도에 상륙한 고고학자라고 생각해보자처음에는 분명 호기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유적처럼 보이는 절벽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가치를 인정받은 문헌에서 언급하는 보물섬을 찾아왔을 수도 있다더러는 위성사진을 찍어보고 - ‘뭔가가 여기 있다라는 확신을 지니고 왔을 수도 있다

 

현대의 합리적인 고고학자라면 세 가지를 전부 고려한다.

 

다소 과분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가 깊은 팬덤에 유입되는 신입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고대 유적은 공식 작품으로벽화는 동인지와 만화로도자기와 여러 문물을 보고 감탄하다가 문득 절벽을 등진 도시에서 아직도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돌아서는가합류하는가유물이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등을 돌릴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뻔한 스포일러지만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이 필자와 비슷한 선택을 했으리라 믿는다

 

다시 섬으로 돌아와서아무리 딱딱한 고고학자라도 평생의 연구 주제를 마주하고서 이거 괜찮은데?” 정도의 찬사는 아끼지 않을 것이다문제는 이거다. “무엇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어느 유물이 주민들의 발목을 붙잡아 세웠을까

 

어느 컨텐츠가 사람을 동방으로 끌어들일까?

 

처음 접한 문물을 기준으로 하면 어떨까아니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자기 마음을 긍정할 때하지만 이것은 마음속에 물음표를 찍냐느낌표를 찍냐마침표를 찍냐 정도의 차이만 남긴다당신도 고고학자처럼 합리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어떻게든 명확한 결론을 내야 하는 학자와는 달리 이 모든 것이 단계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가파를 순 있더라도.

 

당신만 현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지금 보니 주민들은 다들 전직 고고학자다(조금 말이 안 되지만). 어떤 주민은 매일같이 그림을 그린다어떤 주민은 매일같이 글을 쓰고어떤 주민은 전직 고고학자답게 옛 유적을 순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우리의 주인공은글쎄원래부터 그리기를 좋아하는지 시험 삼아 마을 어귀에 짤막한 그림을 그려 붙였다

 

반응이 좋다. “어느 컨텐트가무엇이는 너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어서 언제부터 섬에 상륙해 지내기로 결정했는지 그 자신도 알 도리가 없었다대신 고향 같은 이곳에 아예 눌러앉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학자는 이제 주민이 되었다

 

현지인과 결혼한 인류학자가 그렇듯이더는 자기를 둘러싼 고향의 풍경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연구는 실패하고 말았다아이러니하지만 주민이 되고 나서야 이곳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시시각각 만들어지는 각종 환상적인 유물에 둘러싸여저 높이 있는 명예의 전당에 분필 한 줄 그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결론

 

<그러나 결론 같지 않은>

 

 

필자로 말하자면이미 4년째 동방과 관련된 글(칼럼장편단편 팬픽 등등)을 쓰고 있습니다한편으로는 자전적인 고찰을 써 보면서도 개인적인 내용은 일부러 빼려다 보니 이런 내용이 되었네요.

 

서론은제가 처음 동방 프로젝트를 알게 되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입니다모른다고 해도 진짜 몰랐냐면 거짓이겠죠하지만 그땐 이게 뭐야’ 정도의 감상밖엔 없었습니다그 소리가 처음 나왔던 홍마향 EX울트라 모드 영상을 친구가 보여줬을 때를 생각하면 접할 기회 자체는 많았죠

 

본론에서 말하는 내용은 한 사람이 동방에 빠지고 동인의 늪에 발을 들이기까지의 과정입니다다소 컬트와도 같은 주민들의 행동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마니악하고지나가던 고고학자가 보기엔 그나마 호기심이 드는 축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제 눌러앉고 싶다라고 생각한 순간고고학자는 이미 주민이 되어 있습니다어리석으면서도 즐거운 일을 반복하는 훌륭한 주민이 되겠지요그도 언젠간 자신이 만들어낸 유물로 기억되고 누군가를 끌어들이길 원할 겁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만들기가 즐겁습니다어떤 형태로건 섬을 떠날지언정별생각 없이 펜을 처음 들었던 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저도 처음 써 내린 글이 너무도 생생합니다제목이나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J모 플랫폼에 올린 50화 언저리 중편이었는데첫 문장부터 캐릭터 묘사며 조회 수가 0에서 1이 된 순간이며 첫 댓글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뒤로 갈수록 전개가 늘어지고 아무도 보지 않는 슬픈 글이 됐지만뼈저리게 후회하고는 다시 돌아와서 몇 번이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처음 쓴 문장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그러길 어느새 4.

 

 

 

그러니 당신지금부터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떠신가요?

 

한번 빠지고 나면 분명 뼈저리게 후회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