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내 마음속의 사랑이란, 영원한 것. 하지만 그런 실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요. 세상이 불멸하는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건 단지, 다만 그 사랑을 말하는 인간이 불멸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속세에서는 사랑을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무언가라고 말하지만 다들 진실을 알고 있어요. 이 별에 60억 명의 인간이 있다면 60억 가지의 사랑이 있고, 60억 개의 차등(差等)이 있죠.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고요.

사랑은 숭고할 수 있어요. 네, 아마 그럴 거예요. 하지만 어떤 사랑은 더 아름답고, 어떤 사랑은 더 추악하며, 어떤 사랑은 더 소중하면서 어떤 사랑은 더 하찮아요. 원하지 않는 사랑은 없느니만 못해요. 증오와 다를 바가 없죠.

혐오스러운 자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가증스러움만큼 그의 사랑은 그 누군가를 상처주게 돼요. 아름다움이 무기이듯, 추악함 역시 그래요. 단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상처입힐 수 있는 거예요. 네. 사랑은 증오보다 강해요.
그리고 저는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신하고요.

당신을 흠모하지는 않지만, 연모하지는 않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받기에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요.
당신을 욕망하지는 않지만, 당신을 갈망하지는 않지만, 당신을 사랑받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요.
당신을 애정하지는 않지만, 당신을 욕정하지는 않지만, 당신을 매력적이고 가지고 싶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요.

그리고 당신을 존중하기에, 또 존경하기에 저는 당신의 공포와 혐오를 사고 싶지 않고, 당신에게 고통을 안기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렇기에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그렇기에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해요.

사랑 없이도 사람을 사귈⟮交⟯ 수 있어요. 이성적으로 사귈⟮戀⟯ 수도 있죠. 결혼도 못할 거 없어요. 창세 이래 무수한 사람들이 그러했고, 그들의 피가 과거로부터 우리 몸에 흐르고 있어요. 별거 아녜요.

생은 비즈니스의 연속이고, 자손을 남기는 것은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예요. 안 중요하다 여길 수도 있겠고, 저는 그런 의견도 존중하지만, 어찌됐건 다음 세대에는 그렇지 않은 의견만 남게 되니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비즈니스를 경험하고, 성현들이 아무리 사랑을 말했든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고 지나치는 그 모든 이들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들도 기대하지 않고요. 하지만 우리들은 대신 상대를 믿어요. 약속하고, 계약하고, 맹세하고, 인장을 찍어요. 그러니까, 사랑보다 중요한 건 「신뢰」예요.

저는 이 불쾌하고 역겨운 인간에게 그런 「신뢰」를 준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그는 상처와도 같아서, 못을 뽑아도 구멍이 남듯 이 마음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코르크 보드에 핀을 꽂듯, 당신이 준 성의와 은혜를 제 마음에 박아놓았으니까.

내 마음이 무거운 만큼 당신의 생명과 인격과 가치를 무겁게 느끼기에, 당신이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고 맹세해요.

당신의, 사랑의 부재에의 기대를, 저는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