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했던 생각바구니: https://arca.live/b/tsfiction/9599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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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손 좀 줘볼래요?”


소녀의 말은 언제나처럼 맥락이 없었다. 이젠 슬슬 익숙했던 찰나였고, 이런 거라면 그리 특이한 요구사항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침 흥미로운 대목을 읽고 있던 터라, 용인은 잠자코 한 손을 내주었다. 


“흐아아…….”


낯설은 감각과 기이한 신음소리는 용인의 집중력도 무너뜨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따듯해애…….”


용인의 경호 대상, 소녀는 용인의 손에 제 손을 맞대어 보고 있었다. 


용인이라해도 지금은 인간 여성의 모습을 갖춘 만큼, 그 손은 인간의 것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네일아트나 핸드크림조차 바르지 않으니 오히려 투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용인의 손을 문화재나 예술품이라도 되는 양 황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 굳은 살…….”


지금은 철부지 소녀의 경호원이지만, 저번 세계에서 용인이면서 이름 꽤 날렸던 검사였다. 수련과 고난의 흔적에 별 감정 없었지만, 소녀의 반응에 용인은 낯간지러웠다. 

다른 손으로는 용인의 손가락이나 팔목, 손톱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톱도 단단…….”


“너 뭐하냐.”


“관찰이요…….”


“뭔 관찰.”


“용인의 특성에 대해서…… 에? 에!”


홀린 듯 중얼거리던 소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누가 뺏어갈까,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모, 못들었죠? 아무것도 못들었죠, 언니?”


“용인의 특성에 대해서, 까지 밖에 못들었다.”


소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좌절로 물들었다. 대체 무슨 특성을 알아보겠다는 건지, 의문이 없지 않았지만 울먹일 듯한 얼굴에 묻기를 그만뒀다.


“이쯤 하면 됐냐?”


“네? 아, 아! 네! 손은 됐어요!”


용인은 자기 손을 돌려받았다. 소녀가 잔뜩 만지고 나서인지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괜히 쥐락펴락 해보는 사이, 소녀가 베시시 웃으면서 몸을 가까이 붙였다.


“또 왜.”


“저, 손 다음엔 발도…….”


“야.”


“신발은 제가 벗겨서…….”


“너 그거 뭐야.”


용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소녀가 품속에 끌어안고 있는 작은 공책를 집었다. 


소녀는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눈 뜨고 코 베인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언니!” 


공책 겉표지에는 <관찰 일기>라는 적혀있었다.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언니에게 달려들었다. 


“그거 안돼요! 그거 줘요! 안 돼애!”


소녀가 헌터 전문 양성 아카데미를 성실히 다니곤 있었지만, 용인에게는 결코 비할 바 못됐다. 저항은 한 팔로도 막혔지만,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마냥 그치질 못했다.


“제발! 그거 줘요! 아니, 주세요! 네? 언니! 보지 마요! 그냥 줘요오!”


그런 절박함을 고려한다면 아이보다는 꼬리를 빼앗긴 여우 요괴의 것과 비슷했다. 그보다는 귀여웠고, 그보다 훨씬 약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거 뭔데.”


“주세요! 언니! 아빠한테 이를 거에요! 네! 그냥 주세요오……!”


“쓰읍.”


용언도 아니었다. 가벼운 으르렁거림. 하지만 소녀의 칭얼거림이 단박에 멎었다. 


“……힝.”


“나 다시 말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울상을 지은 소녀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예쁨받을 미모였지만, 용인에게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대답.”


“네…….”


“그거, 과제에요…….”


“필요한 설명은 길고 자세하게.”


“……언니, 근데 언니는 제 경호원인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대답.”


“……힝.”


계약관계를 들먹이고자 했지만, 어쨌거나 소녀는 인간이었고 경호원은 용인이었다. 

소녀는 더 이상 할말이 궁한지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종족학 학기 과제인데……. 다른 종족 사람들, 특성 조사하고. 알아보는 과제라서…….”


“……손은 왜.”


“언니는 용인이니까……. 하나하나 다 알아보려고요.”


용인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을 제기했다.


“용인이 나 밖에 없는 줄 알아?”


“하지만 우리 세계에 용인은 언니뿐이잖아요?”


다음으로는 과제 수행의 공평성을 언급했다.


“다른 애들은 직접 뛰어다니면서 알아볼텐데. 너는 이렇게 편하게 해도 되겠냐?”


“교, 교수님이 언니한테 물어보라고 했어요!”


소녀는 억울한 듯이 외쳤다. 용인은 이마를 짚었다.

아카데미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용인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당사자에겐 과분할 정도였고, 애초에 원치도 않았다.


“그래서, 이게 그거야?”


“네! 저, 그니까 주시면 안될까요? 제출 못하면 저 F 맞을지도 몰라요…….”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 F 학점, 좋지 않지. 어느 까마득한 옛적 기억을 떠올린 용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줄 게.”


“와!”


“내일.”


“에에에?”


소녀의 눈이 뗑그래졌다. 


“나도 네가 뭘 적었는진 확인 해야할 거 아니냐.”


타당한 말이었다. 인터뷰는 당사자의 사전 동의가 원칙이니.

다만 소녀는 당황이 역력했다. 


“어? 그. 저어. 그치만.”


“가서 다른 숙제나 해라. 마법 연습이나 하던가.”


“아니, 언니! 그. 안주셔도 되니까 안보면 안될까요? 네? ”


“얘가 왜 이래. F 맞고 싶어?”


“아니 그건……. 저, 학점 상관 없으니까 안 보면 안 돼요? 네?”


더 이상 칭얼거림을 듣고 싶지 않았던 용인은 허공에 자그마한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소녀으 공책을 아공간 속에 집어 던졌다.


“걱정하지 말고. 돌려는 줄게. ”


소녀는 세상이 무너지리라 믿는 사람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



통통통.


“언니! 진짜 읽으면 안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니까 읽지 말아요, 언니. 언니!”


통통통.


“아! 그거 용인이 보면 죽……지는 않는데 크게 다치는 글씨에요! 네? 저 언니 다치면 막 울 거에요?!”


통, 통통통통.


“언니이! 제 말 들리죠! 저 글씨 너무너무 못써서 부끄러워서 그러니까 안 읽으면 안 돼요? 네? 네?”


묘한 리듬감 있는 문 두들김과, 조금씩 변명이 제법 다채로워지는 말들이었지만. 용인은 소녀에게서 시끄러움만 느꼈다. 


한 손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소음 차폐. 방은 고요해졌다. 


소녀가 문에서 소리치다 잠들지 어떨지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저러다가 유모가 와서 데려다 주겠지.


“후우.”


가벼운 한숨. 하루의 끝자락, 잠에 들기 전 책장 좀 넘기는 게 용인의 몇 안되는 취미였다.

두께도 얄팍하고 전에 읽던 책이 아니지만, 취미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뭘 적었길래 저러는 거야.”


진짜 속옷 사이즈라도 적어놨나? 그건 좀 감탄할만 한데. 무섭기도 할테고.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하드커버 표지를 넘겼다. 


소녀의 변명과 달리, 글씨체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명필은 아니지만, 가독성 보다는 필자의 귀여움이 강조되는 글씨체다.


그리고 첫 장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자기의 사진. 


그 옆에. 이름. 나이. 성별. 키. 몸무게, 쓰리사이즈, 팔 길이, 손 크기, 발 사이즈, 다리 길이…….


“뭐야.”


과하다 할 정도로 빽빽한 항목들. 그리고 그 옆은 성별 빼고 다 공란이었다.

소녀에게 나이나 이름도 제대로 안알려줬다는 게 새삼 떠올랐다. 


다음 장으로 넘겼다. ‘용인의 특성!’이라는 소제목.


* 용인은 일찍 일어난다. 잠도 일찍 자는 지는 잘 모르겠다.


* 용인은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소설도 좋아하고, 마법학 고서적도 읽고, 과학책도 읽고, 사전도 읽는다. 사전은 왜 읽지……?


* 용인은 씻는 걸 싫어한다.  좋아하는 데 목욕은 싫어한다. 목욕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이랑 씻는 걸 싫어한다……. 같이 씻고 싶었는데.......


* 용인은 아무 거나 잘 먹는다고 했다. 고기도 잘 먹고, 채소도 잘 먹는다. 특히 콩이랑 당근을 잘 먹어줘서 좋다!


* 용인은 파인애플 피자를 싫어한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다행이다!


* 용인은 민트초코아이스크림을 싫어한다. 힝. 맛있는데……. + 사주면 먹는다고 했다!


* 용인은 마법을 엄청엄청, 진짜 세상 누구보다도 잘 쓴다! - 마법학 교수님이 감탄한 정도니까 확실한 사실임!!


* 용인은 어두운 옷을 즐겨 입는다. 신발도 편한 걸 주로 신는다.


* 용인은 폴리모프도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안해서 아쉽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용인의 전반 특성이라곤 볼 수 없는 사항들. 객관보다 주관적 평가가 더 많은 서술.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제출한다 해도 좋은 학점은 못받겠는 걸. 

이래서 보지 말라고 했던 건가. 느낌표는 왤케 많아. 하트 같은 거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용인은 책장을 파르릉 넘겼다. 맨 앞장 빼고는 제법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죄다 이런 서술이라 문제였지. 그나저나 언제 적었담. 


하지만 이것만으론 그렇게 울고불고 보지 말라는 게 납득이 안됐다. 자신의 스토커 기질을 들키기 싫은 건가. 


그러다 공백. 줄만 있는 부분이 나타났다. 그래도 공책 절반 채웠으니 성실성은 높게 봐 줄만 했다.


그리고.


“뭐야.” 


마지막 페이지에 다시 나타난 특유의 글씨체. 하지만 주어와 서술이 아까와 다르다.



* 언니는 엄청 멋지다. 에쁘기도 하다. 용인이니까 당연하다!


* 언니는 생각보다도 훨씬 구두랑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 엄청 예뻤다! 근데 왜 안 입는 거지????


* 언니는 세상 누구보다도, 다른 용인보다도 훨씬 세다!



중간에 줄을 무시하고 쓰기도 하고, 급하게 쓰거나 자기만 보려는 듯 조금 뭉개지기도 했다. 



* 언니는 다른 용인과 다르게 인간을 좋아하는 거 같다.


* 언니가 어려졌을 때 엄청엄청 귀엽다!!


* 언니가 커졌을 때는……. 엄마 같았다…… 엄마…….


* 언니는 무서운 것도 그냥 막 들어간다. 귀신 안 무서운 가봐. 진짜 대단해…….



피식 웃었다. 남의 일기장 훔쳐보는 기분. 아까와 다른 재미가 있었다. 



* 언니는 저 세계에서 힘들게 살아왔다고 했다…….


* 언니는 행복해질 수 있다. 분명. 어떻게든!



한숨 흘리듯 털어놓았던 과거가 소녀의 글씨로 보니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 언니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 언니는 나를 좋아할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고 했는데, 좋아할 거다. 아마도……?


* 언니를, 나는 사랑하는데. 나는 언니를 사랑한다.



* 언니는 나를 사랑하



그게 끝이었다. 공책 끝 페이지의 마지막 줄. 


“허.”


이래서 보지 말랐던가. 용인은 표지를 덮었다.


책을 다 읽었으니 잘 시간이다. 마력등을 껐다. 이불을 덮고 누웠다.


깜깜한 방안에,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결국 용인은 다시 공책을 열었다. 



*** 



“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쩐 일인지, 이른 아침부터 방문 앞에 소녀가 서있었다. 전혀 쓰지도 않던 경어체 인사까지.

속셈은 뻔했다. 잠을 제대로 못잤는지, 얼굴에 다크써클이 짙었다. 


“안하던 짓을 하시네요, 아가씨?”


존대에는 존대로. 일부러 미소를 담아 그렇게 물었다.


“헤, 헤헤…….”


얼버무리는 웃음도 어딘가 어색하고 힘이 없었다.

용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다시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여기.”


“고, 고맙습니다…….”


공책을 건네받으면서도 머뭇거린다. 소녀는 용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안 읽었죠……?”


“글쎄?”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 용인은 먼저 출발했다. 경호원으로서는 언어도단의 행위지만, 어차피 아카데미에 늦는 건 소녀였다. 


용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떨리는 손으로 공책을 펼쳤다. 


“어?”


첫 장에 공백이 한가득이던 항목이 다 채워져있다. 


키와 몸무게, 어제 감탄만 하느라 결국 까먹었던 손 크기. 물어보려다 제지 당한 발 길이.

적어뒀을 뿐 실현 가능성은 없을 거라 여겼던 팔 길이, 다리 길이. 심지어 쓰리 사이즈까지도.


뒷장을 넘긴다.

그대로다. 지워진 자국은 없다.


“야, 안 오냐? 내가 등교해?”


“고, 고, 곧 가요!”


마지막 장. 제출할 때는 따로 보관할 테지만, 언니가 읽었을까봐 가장 걱정되는 부분.


* 언니는 나를 사랑하


“아…….”


안 읽었나봐. 

걱정이 풀리며 몰려오는 위안. 

그리고 동시에, 짙은 아쉬움. 


“내려 가요……오?”


공책을 덮으려는 찰나에, 그 페이지 맞은 편 커버 안쪽에.

눈치 채지 못했다면 얼룩으로 넘길 정도로, 작게. 


-ㄹ지도 모르지.


“……언니! 언니! 같이 가요! 언니!”


소녀는 한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그 동작이 쾌활한 걸 보니, 꼭 지각을 피하고자 뛰어가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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