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몸을 가진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나는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날 놔줄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주먹을 휘둘렀다.


"이크!"

가까스로 피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내 옆에 있던 송전탑이 쓰러지고 있었다.


"히...히익!"

이에 나는 몸을 굴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대신 도망갈 길을 놓치고 말았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타락파워궁수."

촌스러운 빌런 명에 나는 뭐라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탑급 히어로 제네시스이다 보니 항변하다간 내 목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자...잘못보셨는데요?"

"그 촌스러운 활을 들고도 그런 거짓말이 통할 거라 생각했느냐?"

"어..."

부정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내 활, 좀 구렸다.


장난감 활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활.

이럴 줄 알았으면 야근하고 찾아온 소악마 놈이랑 계약 하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 그런 헛소리를 할 때냐? 당장 도망쳐야지!


"제네시스 몰라? 제네시스! 랭킹 1 위 히어로! 하늘을 날 뿐더러 빠르고 강하고 심지어 육체도 방탄이란 말이야!"


미국 코믹스의 그 히어로를 떠올리게 하는 막강함이었다.

그런 히어로 앞에서 그 어떠한 빌런도 살아 남았다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 나도 여기서 내 불쌍한 인생을 마무리져야 할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짱박혀서 회사의 노예로 사는 게 나았을텐데 괜히 날 갈구는 팀장의 성벽을 까발리겠다싶어서...


-솔직히 그때 엄청 좋아했잖아.


"그렇긴 해."

이렇게 소악마와 투닥거리는 사이 저 멀리서 제네시스가 날아왔다.

그리고 날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기 전에 무슨 혼잣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올랜드와 가스펠을 죽인 대가를 치룰 것이다. 타락파워궁수."

"저...그...주...중간에 잘라서 죄송한데...두...두사람은 아...아직 안 죽었는데요..."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아뇨 그럴리가요. 다...당연히 히어로 랭킹 1 위의 제네시스 님을 어...어떻게 속이겠습니까. 그...그저 그냥...사...사실을 알...알려드릴 뿐...이...이랍니다...?"

"헛소리. 악독한 네가 죽인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하...하지만 시...시체는 안나왔잖아요."

"네 능력으로 없앴겠지."

"제...제 능력은 그런 게 아닌데요?"

"네 능력이 무엇이냐."

"그..."

나는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 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야, 능력 말해도 되냐."


-미쳤어?


"아니 말 안하면 바로 죽을 거 같은데."


-말하면 살려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그렇긴 해도 그래도...좀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니 알아서 해.


소악마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제네시스를 바라보았다.


"그...제...제 능력은 사...사실 빌런 능력이 아니라요...그...사...사실 차...착한 능력이랄까요?"

"죽고 싶은 건가?"

"아...아뇨 진짜라니까요. 그러니까 제...능력은 타락입니다. 그...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가장 그...질낮은...? 깊은 내면에 있는 욕망을 현실화 시켜 준다고 하...할까나요...?"

"쓰레기 같은 능력이군. 당장 죽여주마."

제네시스는 날 당장이라도 죽일 듯 손을 들었다.

이에 나는 살기 위해 바로 말을 건넸다.


"오...올랜드 씨 라...라면 좋아하시죠...?"


"..."

내 말에 제네시스는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진짜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올랜드가 라면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오...올랜드 씨는 이...있잖아요. 사...사실 히...히어로 때려 치우고 라면 집 사장 님...하...하고 싶으셨더라구요. 나중에 아...알고 보니까 아이돌 시절때 라면을 못먹은 게 한이 되어서...그러셨다고 하...하던데...그...서울역 앞에 가시면 있을 텐데..."


"...아이돌이었다는 것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거...거기다 그...조...조금 충격적이실 수도 있는데 가스펠 씨는...그...구...군필여고생이 되고 싶...싶으셧더라구요..."

"..."


순간 제네시스의 몸에 분노가 일렁였다.

이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제네시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화나셨..."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예...예?"

"가스펠이 여자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건 나 밖에 모르는 일인데."


그 말에 나는 속으로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 라는 말이 튀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이걸 입밖으로 내밀면 죽을 것만 같았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

"마...말씀하십시요. 제...제네시스님."

"내게 네 능력을 써봐라."

"예...예?!"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제네시스는 진짜인듯 단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겠다. 만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살려주고 아니라면 널 죽이겠다."

"어...그...다...당신은 능력 무효화 패시브가 있으시지 아...않으십니까?"


너무 당황했는지 반존대가 나왔다.

이런 나의 반응에 제네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다.


"나는 빌런들의 능력에 노출되더라도 원한다면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능력을 해체할 수도 있지."

"...개 사기 잖아."

"뭐라고 했지?"

"아...아닙니다. 그...그럼 어...해...해드릴게요."


나는 이런 말을 하며 바닥에 활을 쏘았다.

그러자 제네시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지?"

"그...자...잠시만요. 바닥에 박힌 화살 좀 뽑구요..."

나는 낑낑대며 화살을 뽑아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네시스에게 건넸다.


"그...당신은 탄환 무효화라 들어서요...그러니까 이걸 그...피부 안쪽으로 살짝 밀어 주시면 되는데...그...야...약간 주사기 같은 느낌으로 다가..."

"..."

"시...싫으시면 아...안하셔도 됩니다."

"아니다."

제네시스는 이런 말을 하더니 갑자기 팔을 걷어 붙혔다.

그러자 우람한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 정도 두께면 맞으면 즉사하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제네시스는 내 화살을 팔뚝에 꽂았다.


"..."

"...어...조금 걸릴 수도...이...있습니다!"

"죽여버리겠다."

"히...히이이익!"


그렇게 분노한 제네시스가 주먹을 내질렀다.

이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다음 생에는 빌런이 아니라 히어로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


"뭐지."

죽어야할 타이밍인데.

나는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사...사라졌다?"


"...진짜군."

"응?"


아래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누가 봐도 여자 아이의 목소리였다.


"어..."

눈 앞에 있는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 아이.

그 아이는 제네시스와 같은 금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마치...


"가스펠 씨와 같은 취미를 가지고 계셨군...요..."

"닥쳐라."


제네시스는 부끄럽다는 듯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향해 내질렀다.


그러자 순간 내 앞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버렸다.

정말 다행히도 제네세스가 몸이 작아져서 그런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자...잠깐...사...살려주십시오. 그...느...능력 인증만 하면 살려주신다면서요!"

"내 치부를 본 이상 살려 줄 수 없다."

"히...히익...!"


이대로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 머리 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그 능력 저...주...죽으면 사라 집니다! 아...아시겠어요?"

"그게 널 살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그러니까 제...제네시스 님은 그...능력을 원하는 대로 해체할 수 있잖아요. 그...그럼 언제든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제...제가 죽으면 여...여자 아이로 다시는 변할 수 없...없습니다!"

"..."


제네시스는 내 말에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이에 나는 악에 받쳐 대꾸했다.


"소...솔직히 조...좋으시잖아요!"

그 말에 제네시는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 날 노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살려 주마."

"저...정말 이십니까?"

"그래. 대신..."

"대신...?"

"내가 오면 바로 와야 한다."


그렇게 나는 제네시스의 노예가 되었다.

랭킹 1 위의 노예 말이다.



* * * *





히어로를 타락시키는 빌런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