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위력이 약해요."


"아, 안ㅡ"




"불합격. 지속시간이 너무 짧아요."


"제발 한 번만ㅡ"


콰직



불합격. 불합격. 또 불합격.

여기 생물들은 하나같이 덜떨어진 것들 뿐이네요.



…뭐,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온 거겠지만요.


"다음."



"…다음."




"……다음. 나와요. 당장."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묵묵부답이라니.

지시에 불응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까 겪어봐서 알고 있을 텐데요.


목을 왼쪽으로 80도 가량 돌려, 폐기 예정인 것들을 모아둔 곳을 바라봤습니다.



…어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이미 처리가 끝난 폐품들 뿐이었습니다.


어떠한 일관성 없이,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쓰레기 산 여러 개.

그 쓰레기 산에서 스며 나온 검붉은 액체가 한데 모여 만들어진 넓다란 붉은색 호수.

호숫가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각기 다른 색을 띈 수초.


방금 까지만 해도 풍경처럼 저 멀리 있던 호수는, 어느새 제 그림자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넓어졌네요.


아직 폐기를 못 한 것들이 뒷편에 많이 남아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간 걸까요.

혹여나 도망치려고 할 걸 대비해 미리 사지를 다 묶어놨으니, 몰래 빠져나가진 못했을 텐데요.



아, 설마.


찰박찰박


곳곳에서 붉은 액체가 솟아나고 있는 살구색 흙을 살며시 즈려밟아가며 지나가, 호숫가에 다다랐습니다.

호숫가 한구석에 모여있는 알록달록한 수초들.


주황색, 하늘색, 검은색, 노란색, 초록색, 분홍색….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다양한 색상을 지닌 수초를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역시, 제 추측이 맞았네요.

이 수초들, 실은 폐기 예정이었던 생물들이었군요.

수초의 풀잎이라 생각했던 부분은, 다름아닌 머리카락이었습니다.

멋대로 움직이지 않게끔 사지를 꽁꽁 묶어놓았던 탓에, 자신들을 향해 뻗어오는 붉은 손아귀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붙잡혀버린 모양입니다.



으음, 가끔은 이런 경우도 있는 거죠 뭐.

호수의 출처가 출처인 만큼, 적어도 가는 길이 춥지는 않았겠네요.


아무튼 할 일이 끝났겠다, 이제 업무 일지를 작성하는대로 복귀하도록 하죠.


딸깍


오른쪽 귓가에 달아놓은 녹음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번 업무 일지 기록 시작.

다목적 디바이스가 전량 파손된 관계로, 기록 매체를 비상용 녹음기로 대체합니다.


■■■번 문명은 보호 충족요건 미달로, 알파 피난처 기준 17시 18분에 폐기 처분했습니다.

해당 문명이 위치했던 행성은 재정비를 진행한 이후, 새로운 문명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업무 일지 작성 종료."


딸깍


딸깍


업무 일지를 완성했겠다, 제대로 기록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다면 먼 훗날에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요.


잘 녹음이 됐으면 좋을텐데, 과연 어떨려나요?



"■■…번 업무 지지직 시작.

다목적 디바이스가 전량 파손된 관 지직 대체합니다.


■■■ 번 문명은 보호… 미달로, 폐기기기 했습니다.

해당 문명이 지지직 새로운 문명을 받도록 하…겠…니다.

이상. 업무 일지 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종"


딸깍


방금 눌렀던 버튼을 꾸욱 눌러, 재생을 종료했습니다.


그럭저럭 잘 기록된 것 같네요.



----------

신병교육대대에 끌려가서 각개전투를 하느라 산을 구르던 와중이었어요.

당시 각개전투를 담당했던 소대장이 저를 포함한 훈련병 216명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대항군이 쓰러진 걸 확인했다면, 확인 사살을 꼭 빼먹지 말고 해라. 그렇다고 총구로 막 들쑤시진 말고.


국제법상으론 확인 사살이 위법이란 걸 알았기에, 기분이 묘해졌어요.

그러던 도중,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제네바 협약 같은 국제법은 실제 전장에서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이상주의자의 헛소리로나 와닿을 거라는 건 당시의 모두가 알고 있었을텐데, 어째서 수많은 사람이 그런 국제법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을까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나온 결론은 이거였어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고 싶어서.


애초에 전쟁부터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친 짓인데, 그에 휘말린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PTSD의 주원인 중 하나가 전쟁일 정도이니, 말 다했죠.


전장을 오가며 온갖 못 볼 꼴을 보고, 그 끔찍한 광경을 만드는 데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누가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겠나요.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창마냥 한 가닥씩 툭툭 끊어져가는 정신줄을 어떻게든 붙잡을 수 있도록, 고통받는 사람들이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머리를 짜낸 결과 중 하나가 국제법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나는 내 동갑내기인 사람을 쏘아 전두엽을 날려버렸다지만, 적어도 항복한 적을 죽이진 않았어.'


여기에서 그 '적어도'라는, 자신의 행위를 조금이라도 합리화할 명분이 있냐 없냐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한 노력마저 물거품이 된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요?

제가 구상하고 있는 소설은, 그 세상이 어떻게 됐을 지를 상상해가며 쓴 글이랍니다.


표지 외주를 넣고, 작문과 심리에 관한 도서 10권 가량을 구매했을 정도로, 열심히 구상중인 소설이에요!

그 책들을 다 읽고 난 후에는, 과연 문체에 어떤 변화가 생길 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