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드디어 근이네."


언제나와 똑같은 하루였다. 출근하고, 일하고,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고, 야근하고 퇴근하고.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그냥 바로 자야겠다."


사내는 입고 있던 옷을 벗지도 않고 침대 위로 편하게 누웠다.


아 몰라 귀찮아.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 화면을 키고 웹소설 앱을 켰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수면욕이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처음 보는 붉은 무언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머리 위에서는 작은 금속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 안에서 청량한 느낌의 나무 향이 풍겨왔다.


사내, 아니, 이유진이 얼굴을 가린 붉은 면사에 손을 가져가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를 말렸다.


"소저, 부군께서 벗기실 때까지는 봉관을 단단히 쓰고 계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유진이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리려다 흠칫 몸을 떨었다.


소저, 소저라고?

어디선가 많이 본 광경이었다. 바로 어젯밤에 잠들기 전에 보려던 소설인 것 같았다.

 

유진의 움직이 멈춘 것을 확인하자 곁에 있던 여종들이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대체 누구지?


소설에 빙의한 건 알겠는데, 소설 배경이 중근세 어딘가에 걸쳐있는 만큼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기에 대체 어떻게 빙의한 건지 궁금해하기보다 대체 누구로 빙의했는지 불분명한 것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게다가 중세 시대인 만큼 혼롓날에는 설령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부정타지 않게 나쁜 일은 입에도 답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어째서 여종들이 울먹거리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그때 또다른 여종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꽃가마가 왔습니다. 소저, 가시지요."


소설 속 여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딴생각에 빠져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여종들이 또다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푸른 장삼을 걸친 십 삼사 세 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방으로 들어왔다.


"열셋째 누님……. 저 왔습니다."


"유하……."


그 소년의 얼굴을 본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온갖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후부(후작가 저택)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평한후부 열셋째 소저. 소설에서 주인공에게 멸문당하는 후작 집안의 생존자.


후부에서 유이하게 살아남은 어린 소녀가 된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소설에서 그녀는 집안이 멸문당하기는 했어도 주인공과 싸우거나 한 적은 없었고 어차피 귀족 혈통이니 여종이나 하인으로 빙의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아니,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이제 출근할 일도 없고 일할 것도 없으니, 편안하게 먹고 살아야지.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유진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울지 마라. 이 누님 혼삿날인데, 웃으면서 보내주지 않으련?"


그 말을 들은 유하가 눈물을 꾹 참고 억지로 미소지으면서 방문 앞에 쪼그려 않았다.


"하하, 알겠습니다 누님. 자, 제 등에 업히시지요."


유진이 유하의 등에 업혀서 꽃가마로 향했다.


꽃가마를 타고 진왕부로 가는 길. 대연에서 제일가는 무인인 진왕부 혼례답게 하남성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폭죽이 잇따라 터지고 악기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종들까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누님이 탄 가마가 진왕부로 떠나는 것을 보고 겨우 울음을 참고 있던 유하가 눈물을 흘렸다. 지체 높은 가문일수록 며느리의 친정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누님의 결혼생활이 그리 편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