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어제도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퇴근하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발가락으로 데스크탑 전원을 켠 뒤 게임을 조지는...뭐 30대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였다.

그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일을 없었다. 몇만시간 동안 플레이한 게임의 히든엔딩을 봤다거나 똥겜의 스팀 페이지에 사탄도 혀를 내두르를 악평을 남기는 거 같은... 있잖은가? 그런 '빙의 국룰' 이란 거.


나는 그런 걸 한 적이 없었다.

그냥 겜 좀 하다가 잘 시간이 되어서 이불에 몸을 뉘인 뒤 눈을 감은, 그런 평범한 하루.


그게 하루아침에 뒤엎어졌다.


*


"...뭐야."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방 천장이 아니라 불이었다.

불. 전기의 힘을 빌려 주변을 밝히는 백열등을 은유로 부를 때 쓰는 단어인 불이 아니라 산불 뉴스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불이었다.

세상을 살라먹겠다는 양 활활 불타오르는 불이 건물 곳곳에서 피어올라 주변 기물을 태우고 있었다.


"..."


일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사고가 멈췄다가 멀리서도 느껴지는 열기에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밖에 있었다.

자고있던 사이 내 위치가 실내에서 실외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중.

펑! 하는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진동이 피부를 떨게 했다.


태평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몸을 일으켜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바닥을 짚는데-


"어?"


자연스럽게 아래로 간 시야를 가리는 두 개의 덩어리. 다시 한 번 생각이 정지했다.


이건, 그러니까, 그게에...


바닥을 짚은 손을 움직여 그 덩어리를 만져봤다. 말랑한 촉감이 느껴지면서 흉부에서도 감각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지금 내 시야를 가리는 이 두 덩어리는 내 몸에, 그러니까 흉부에 달려있는 내 살이구나.


"시발 그게 말이.... 어...?"


'거북목은 몰라도 여유증은 없었는데.'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있던 머리에, 찌릿 하는 두통이 일었다.


"크흑, 흑, 헤엑, 흐읍...!"


스쳐 지나갈 덧 두통은 어느새 격통이 되어 머리를 헤집었다.


"켁, 흑, 학."


좁은 곳에 억지로 두꺼운 것을 쑤셔박는 감각이었다. 대학시절 시험 기간에 전공 지식을 압축해서 머리에 때려박던 때의 감각과 비슷하지만 더 강렬하고 폭력적이고 우악스러운.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한 번 머릿속에 들어오니 부드럽게 녹아 섞이는, 겪어본 적 없는 경험들에 대한 기억.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 유년시절부터 오늘까지의 기억이 한번에 밀어닥치는 기억의 범람.


이하율의 기억.


갓 스무살이 된 이하율. 고된 수험생 생활을 마치고 명문 대학에 합격한 여자아이. 부모님과 같이 상경해 기숙사에 짐을 옮기고, 입학을 축하하자는 아버지의 말에 꽤 비싸 보이는 중식당에 들어간 기억.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느닷없이 울리는 사이렌. 괴수경보. 괴수? 분명 의문이 들어야 했는데 이하율과 가족은 괴수가 무엇인지 알고 신속하게 대피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이 하율의 눈앞에 등장한다. 양 손이 칼날처럼 생겨 예리한 빛을 발하는 거대한 사마귀. 이하율은 그런 괴수에 등장에 얼어붙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달랐다. 그렇게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는 괴수의 칼날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이후 자신도 해치려는 괴수를 등지고 도망친다. 죽은 부모를 뒤로하고. 그것이 죄송해서 마음이 아팠다. 분명 나하고는 연관 없는 인물들인데.


그렇게 주입된 기억은 어느새 현재에 도달한다. 하율은 어찌어찌 괴수에게서 도망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미 대학부지 일대는 화염에 휩싸여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폐허 속에 덩그러니 남아버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이 들려오지만 하율은, 그러니까 이젠 하율이 되어버린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흘렀다. 분명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난데없이 화재현장 덩그러니 놓여진데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당황해야 마땅한데, 부모님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내 부모도 아닌데, 갑자기 주입된 기억과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풍경에 나는 나와 하율을 분리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보다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 오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죽은 게 다행인 일이었지.


이것이 내가 이 세계에 던져진 첫날에 한 일이었다.


*


"헉."


눈을 뜨고 번쩍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확인한다.

2035년 3월 1일. 잠들기 전 확인했던 날짜와 일치했다.


꿈이었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꿈이 아니었구나. 안도와는 다른 한숨이 나왔다.


나는 여전히 이하율이었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침대에서 벗어나 화장대 근처에 둔 전신거울을 봤다. 거기에는 20대 특유의 풋풋함은 사라진, 그러나 성숙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어린 애가 아니지."


아직 꿈에서 덜 깬 걸까. 하율로 산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고 어제도 봤던 얼굴이었는데. 문득 이 모습이 낮설었다.

스물이었던 하율이 어느새 빙의 전 내 나이를 따라잡았다는 사실이, 내가 별세계에 떨어지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단 것이 새삼스레 다가와 어깨를 무겁게 했다.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니지!"


감상에 젖기를 몇 분, 오늘은 아침부터 바쁜 날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분주하게 방을 나섰다.


"아들! 일어났어?"


문을 두드리며 부르자 방 안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얘는, 오늘 입학이라는 애가 아직까지 자고 있었어?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마디 하려다 최근에 있었던 불상사 때문에 맘을 고쳐먹고 주방으로 향했다.


'나도 남자였던 적이 있으니까 이해한다고 말해줄 수도 없고 참.'

아무래도 우리 아들은 신체 건장한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아침의 생리현상을 나에게 보이는 것이 퍽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요 최근 들어서 유난히 까칠한 거 보면 사춘기인 거 같기도 하고.


토스트기에 식빵을 집어넣고 프라이팬을 꺼내 계란을 구웠다. 되도록 아침은 밥으로 챙겨주고 싶지만 1학년은 입학식 준비 때문에 평소 등교 시간보다 1시간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공지가 있었다. 조금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이 아카데미 입학하는 것도 올해였던가?'


국립 아가스티아 아카데미.


우리 아들이 입학하는 학교이자 동시에 내가 빙의한 이 세계의 타이틀이기도 했다. 3D 오픈월드 게임으로 아카데미와 아카데미 주변 도시까지 구현된, 국내에서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맵을 가진 게임이었다.


오픈월드다 보니 스토리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게임에 캠페인 모드가 없으면 되겠는가. 구색으로나마 스토리를 갖추고 있기는 했다. 왕도 소년만화같은 청춘과 사랑, 검과 마법의 이야기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슴슴했지만, 특출나게 모난 부분도 없어서 전체적으로 호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하율은 그 캠페인 모드에서 흑막이자 최종보스 포지션이었다는 점 정도.


'이젠 의미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지금의 이하율은 별볼일 없는 퇴역군인이자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둔 싱글맘에 불과했다. 원작에선 아카데미 이사장이었던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지금 내 위치에서는 어떻게 굴러가도 최종보스가 될 수 없다. 나라는 변수가 10년이라는 세월동안 굴린 스노우볼의 결과였다.


'아니, 나도 설마 애엄마가 될 줄은 몰랐지만.'


-갈 데 없으면 누나랑 같이 살래?-


-아줌마는 누군데요?-


-...한번만 더 아줌마라 하면 확 두고 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놈은 어렸을때부터 사춘기 같은 놈이긴 했다.


하여튼, 원래 같았으면 올해 입학하는 주인공이 졸업할 때 쯤 이하율은 심장에 칼이 박히며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만, 지금의 이하율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이젠 하고싶어도 못하거든! 깔깔!'


아카데미 이사장이자 전직 불귀부대 분대장, X작전의 유일한 생환자, 단일작전 최대 사살기록 레코드 홀더인 이하율은 이 세상에 없다 이 말이야!

이사장직 맡아달라는 것도 걷어차고! 퇴역하면서 알고 지내던 장교들이랑 연락 끊었거든!


본인의 위치와 군 시절부터 다져온 인맥, 권모술수와 모략으로 인류와 마수 사이를 주무르며 세상에 재앙을 불러오는 흑막이 '될 수도' 있었던 이하율은 당장 마트에서 계란 값만 올라도 벌벌 떠는 주부가 되어버렸다고!


...요새는 진짜 두렵다. 적당히 좀 올랐으면 좋겠다. 퇴역군인 연금은 그렇게 많지 않단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란을 잘 구워진 토스트 위에 올리고 지난 주말에 만들어둔 사과잼 뚜껑을 열었다.


"...? 끅... 으윽...."


.... 정정한다. 사과잼을 열려고 '했다'. 뚜껑 안쪽에 묻은 잼이 엉겨붙었는지 더럽게 안열렸다.


"줘봐."


"앗."


등 뒤로 누군가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잼을 낚아챘다. 이윽고 뽕 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집에 살고 있는 건 나를 제외하면 아들 뿐이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아줌마 실력 많이 죽었네. 이것도 못 열고."


"너는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ㄹ..."


또 아줌마래. 아니 아까 전 거는 내 회상이었던가? 하여튼 얘는 10년동안 한결같이 말버릇이 고약했다.

뭐라 쏘아붙이려고 뒤를 돌아 아들을 봤다. 근데. 어.


"어... 어...?"


"...? 왜 그래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거기에 주인공이 있었다.


*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빙의물 주인공이 소설이나 게임의 일러스트만으로 등장인물을 알아보는 서술에 많은 의문이 있었다.

2D 일러스트와 달리 빙의한 세계에서 대면한 캐릭터는 실사일텐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인가.

그건 3D모델링이라 해도 큰 차이가 없었다. 아가스티아 아카데미는 카툰랜더링이라 사실상 2D와 차이가 없기도 했고.


그리고 솔직히 10년 전에는 진짜 코딱지만한 어린애였는데 거기서 원작 그래픽으로 구현된 주인공의 모습을 어떻게 겹쳐보겠는가...!

오히려 지금 교복을 입은 우리 아들, 시우의 모습을 보고 10년도 더 전에 본 주인공의 입학 당시 교복 모델링을 떠올린 내가 대단한 거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흑막이 되기 싫으니 주인공을 키우기로 했습니다.'같은 여성향 로판 제목같은 전개는 내가 노린 게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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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제한 없는줄 알고 라노베 느낌으로


'아카데미물 최종보스에 빙의한 나는 악역루트를 회피하기위해 노력한 결과 안온한 은퇴라이프를 손에 넣었는데 그 과정에서 주워온 아들이 알고보니 이 게임의 주인공이고 언젠가 나에게 검을 들이밀 존재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떨어지기 싫은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라고 하고 글 썼는데 제목 80자 제한 있어서 걍 핵심만 남김..



요새암타물볼거너무없다제발누구든좋으니암타순애물찐하게하나만써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