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악역 캐릭터들을 좋아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항상 이기는 주인공과 계속해서 싸운다는 게 멋져 보였을 지도,


아니면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때 즐겼던 게임인 명일방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캐릭터는 악역 측 인물인 프로스트노바였다.


그녀는 스토리에서 죽는 인물이지만, 본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모습과 부하들을 아낀다거나 하는 모습 등으로 호감을 얻은 캐릭터였다.


당연히, 부활 및 실장에 대해 반쯤은 장난식으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캐릭터였지만…


나는, 어떤 커뮤니티에서 [프로스트노바 실장 떴다!!!]라는 글을 보곤, 무심코 클릭하고 말았다.


당연히 어떤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을 가지고 온 것일 줄 알았던 나는, 곧이어 화면에서 나오는 빛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뒤, 나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눈을 떴다.


머리가 마치 깨질 것 같이 울렸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끄응…”


사실 둘러 볼 것도 없었다.


나는 어린 아이의 몸이었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 설원에 있었으니.


나를 품 안에 안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를 따라오는 사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풍경이라.


“여기는…어디에요?”


나는 날 안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질문했다.


여기가 어디냐고.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어린 아이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던 건가…”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의문을 가질 즈음,


“여기는 툰드라, 우르수스의 동토다.”


그가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자,


‘우르수스면…들어 본 적이 있는데…’


무언가 기억이 나기 시작하며,


이 어린아이의 기억과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오게 된 ‘내’기억이 뒤섞였고,


“끄으윽…”

“...?!”


결국, 처음 깨어났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두통에 기절하고 말았다.


.

.

.


“끄응…”

“일어났느냐.”


정신을 차려 보니, 나를 안고 있던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과 달리,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패트리어트, 내가 빙의한 프로스트노바처럼 주요 악역 세력인 ‘리유니온’의 간부이자 프로스트노바의 양아버지인 인물.


“더 쉬거라.”

“...네.”


그는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쉬라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 나갔다.


주변을 보니, 여긴 그와 그를 따르는 유격대가 임시로 설치한 캠프 같았다.


나는 제자리에 앉아 내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나는 어린 프로스트노바에 빙의한 걸까…’


프로스트노바는 이전에 말했듯 메인 스토리에서 죽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내가 이대로 원작을 따라간다면 그대로 죽고야 말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당연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주인공 측인 로도스 아일랜드에 냉큼 붙자니 언제쯤 로도스 아일랜드가 생기는 지도 모르겠고, 


더군다나 내가 빙의한 것이 졸병 1에 불과한 캐릭터면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 간부급 인물이여야 할 내가 리유니온에 없다면 틀림없이 원래의 스토리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무용지물이 될 테고 말이지.


“하아…”


그러면, 내가 죽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결까.


나는 기분이 착잡해져서 괜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혹시 죽으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외치는 성난 고함소리, 우지끈-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들이 말이다.


내가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지만, 그런 내가 들어도 밖에서 무언가 싸움이 일어났다는 건 알 수 있을 듯 했다.


“전투인가…?”


전투라면 왜 내가 있는 임시 캠프 쪽은 멀쩡한지 의문이 들긴 했다만, 


그보다  패트리어트는 어떻게 싸우는지가 궁금해졌기에 나는 살짝 텐트 바깥을 내다보았다.


야외에서는 내 예상대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도 게임을 하며 익히 보았던 우르수스의 군인들과의 전투가 말이다.


그 전투에서, 유격대는 엄청난 전투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패트리어트였다.


그는 자신의 창을 한 번 휘둘러 다섯을 쓸어버리는 일 쯤이야 쉽다는 양 날뛰었다.


결국 소규모 부대였는지 얼마 가지 않아 우르수스 군인들은 모두 쓰러졌고, 전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처음으로 본 사람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장의 광경이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어서만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무언가 경외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감정이 느껴진 것만 같았다.


사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의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보다 못한 이 테라 대륙에서, 무언가 내 몸을 지킬만한 수단은 마련해야겠다는 것을.


.

.

.


“가르쳐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전투가 끝나고 장비를 점검하는 패트리어트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살아남고 싶습니다.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내 목적을 밝혔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이다.


“...”


패트리어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힘들 것이다.”

“...상관 없습니다.”


힘들 거라는 그의 말에, 나는 상관 없다고 답 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따라오거라.”


그는 내 눈빛이라도 보았는지, 나를 바깥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후로 내가 얼추 원작의 프로스트노바의 나이가 될 때까지,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기초적인 체력 훈련부터, 전투 훈련까지 모두 우르수스 유격대에 맞추어진 훈련이라 어린 아이의 몸인 내가 하기엔 상당히 힘이 들었으나…


그래도 게임 속이라는 건지, 버틸 만은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나는 실전을 나가기도 했는데, 실전에서 나는 우르수스 추격대와 전투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점차 이 설원과 테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흐아아앙…엄마…아빠…”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부모가 감염자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아이가 자신의 부모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전생에 보았던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벌인 짓들이 생각이 나기도 했고,


그리고 아이도 감염자라고 부모와 같이 죽이는 악질적인 경우도 본 적 있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아이에게 끝없는 절망과 고통을 안겨 주겠다는 깊고 검은 악의가 느껴져서,


그리고 내가 빙의한 프로스트노바의 기억이 속에서 울부짖는 것만 같아서.


이런 상황들을 볼 때마다 내 속은 뒤집어지고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럴 때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저기, 얘.”


내가 아이를 부르자, 아이는 울다 지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텅 비어 있어서, 그 무엇으로도 채워 넣을 수 없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정확히는 이 몸의 기억이 알고 있었다.


“복수하고 싶지?”


저 공허한 눈동자는, 오직 복수를 향한 열망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나의 그런 의미가 확실하게 전해졌는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가자.”


언니가 가르쳐줄게.


내가 여기에서 객관적으로 성인이 된 나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복수는 복수고, 가끔씩 이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보듬어 줄 사람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이 모이고.


그런 아이들을 내가 직접 내가 배운 대로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 아이들과 같이 전투를 수행하다 보니 어느새 ‘눈의 악마들’이란 별명이 붙었다는 것을 아는 건 탈룰라와 만났을 때였다.


“당신들, ‘유격대와 눈의 악마들’ 맞죠?”

“...그쪽은 누구지?”


사실 한 눈에 알아보았지만, 나는 구태여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왜냐하면 저 자는 탈룰라, 명일방주의 메인 악역인 리유니온의 보스였으니까.


“그렇게 적대할 필요는 없는걸요. 저도 감염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요?”

“끙…”


아직은 애가 멀쩡할 때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고민 끝에, 탈룰라를 패트리어트에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혹시나 얘를 고쳐 쓸 수 있다면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사실 고친다기보다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다는게 더 맞는 말이긴 하겠지만.


.

.

.


그래, 그러기도 했었지.


나는 과거 회상을 끝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렇게 개판이 따로 없는 세상에서 정의와 이상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지.’


내가 식량을 조달하러 간 사이에 탈룰라는 원작에서도 분명 타락의 시작이 되었을 사건을 겪고 말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하나씩, 둘씩 감염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시작했다.


본래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던 말투도, 점차 반말에서 하대로 바뀌게 되었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때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듬어 줄 수 있었을 때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해 봐야 어쩌겠는가.


나는 결국 타락의 불씨에 온 몸을 잡아먹힌 탈룰라를 뒤로 하고.


“저는…로도스 아일랜드는…!”


리유니온의 보스, 탈룰라의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소녀를 향해 나아갔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은 체르노보그,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탈룰라. 난 너에게 질렸다.”


그 메인 스토리는 많이 다를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