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읽어본 사람들도 있을 거임.

19금 창작에 한 번 올린 프롤로그를 약간 수정한 거라.

근데 질문글의 답변들도 그렇고, 컨셉 빼면 내용이 19금 창작의 다른 글들만큼 충분히 19금스럽지는 않은 느낌이라...

네... 그래서 여기에 올리구요, 외람되지만 가능하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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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장르가 있다면 하드코어 에로틱 중세 판타지쯤 될 거다.
내 의견은 아니다. 플레이하던 하드코어 야겜에 빙의당했다는 내 소꿉친구의 의견이지.
하지만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한다.


철컥.
목을 죄고 있던 마력봉인구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막혔던 혈관이 뚫리며 피가 퍼져나가는 듯한 저릿저릿한 감각이 심장으로부터 손끝까지 한 차례 파도가 되어 휩쓸었다.
기운없이 널부러져 있던 몸에 마력이라는 이름의 활기가 샘솟는다. 꼼짝할 수 없다는 음울한 무력감을 단숨에 타파하는 상쾌함에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단 잘 움직이진 않아서 벽을 짚어야 했다.


"후우~ 빡세다, 빡세."


벽에 몸을 비비다시피 기대며 일어선 뒤, 내 마력으로 생성되어 검붉은 색을 띄는 손을 쥐었다 폈다.
언제는 없었냐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감각이요 움직임이, 이번에도 마력 찬양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마력 만만세, 진짜로.


"고생했다. 슈."


피범벅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을 몰골의 소꿉친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고블린 시체들의 난장판이 여기까지 온 그의 노고를 짐작케 했다. 평범한 고블린은 물론이고 이 무리의 보스였던 주술사까지 반으로 갈라져 죽은 게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슈는 씁쓰레한 미소를 짓고는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가늠했다. 내게는 대낮만큼은 아니더라도 훤히 보이는 어둠 속이라지만, 인간에게는 암적응된 시야라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주술사... 맞지? 저 녀석은 살려둘 걸 그랬나."
"그럴 것 까지야. 내 손에 찢기나 니 손에 반갈죽 당하나 거기서 거기지 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슈는 묻지 않았다.
하드코어 야겜스러운 세상에서 고블린 무리에 붙잡힌 미소녀가 어떻게 됐는지는 뻔하잖아?
그 배려를 본받아서 나도 건설적인 얘기만 하기로 했다.


"하... 독 저항만 있었어도 이 고생은 안 했을 텐데."
"해독제는?"
"싸우다 보니 깨져있더라. 사실 독이야 그렇다 쳐도 아예 붙잡힌 건 뭐... 주술사 때문이지. 마력도 감지할 줄 알고 머리도 돌아가니까, 바로 나한테 마력 봉인구를 달아버리더라고."


운이 아주 나빴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한바탕 싸우기 전 고블린 무리가 노예상인을 습격했고, 마침 그리하여 얻은 전리품 노예 중엔 마력 봉인구 단 마법사가 있었으며, 그리하여 얻게 된 마력 봉인구를 써먹을 머리가 되는 고블린 주술사가 마침 무리의 보스였다.
독이야 면역까진 무리여도 신진대사가 빠른 신체 덕분에 비교적 빨리 해독되지만, 마력 봉인구는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물건이다. 정말 운빨이 조지게도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언제나, 항상, 이딴 식이란 거지.
빌어먹을 야겜 세계관. 미소녀가 되어버린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구나! 하하.


"다른 포로들은?"
"밖으로 도망치게 했는데... 숫자가 많진 않았어."
"횃불 들고 들어와서 쓸만한 물건 챙기라고 하자. 마을까진 거리가 좀 되니까 물자가 필요하겠지."


좋군. 아주 생산적이야.
스스로의 침착하고도 면밀한 판단력에 만족하며 한 발 내딛는 순간, 영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 다리 사이를 훑었다.


"아...."


반사적으로 몸서리칠 뻔한 것을 벽 짚은 손을 움켜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학대당했음을 반증하듯 미미한 쓰라림이 올라오는 속살과, 그 속살을 거쳐 미묘한 점성의 액체가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
등허리를 역류하는 섬찟함에 이어 물씬 식은땀이 베어나올 때 특유의 열감이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씁. 뒷처리를 깜빡했네."


등을 벽에 기댄 채 손가락을 다리 사이로 가져간다.
검지와 중지로 부어버린 구멍의 겉면을 벌리자 후두둑 하며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싶어 자잘하게 떨리는 손끝을 안쪽으로 넣어 잉여물도 어설프게나마 긁어냈다.
친애하는 소꿉친구 슈의 설명에 따르면 내 종족이 종족인지라 어떤 종족 상대로도 임신하게 될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는 했지만... 0%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해둬서 나쁠 건 없다.


무책임 질싸 가능한 미소녀라니 개꼴린다! 끼요오오옷!!
...근데 그게 나라서 좀 그래.


"야, 내가 임신하면 그건 알일까 새끼일까?"


슈의 눈에 잘 보일지 모르겠지만, 씨익 웃으며 농담을 꺼냈다.


"헛소리 할 체력이 남았나 보네."
"아니, 좀 궁금하지 않아? 반인반룡이 번식하면 뭘 낳을까 궁금할 법 하잖아."
"그건...."


약간은 뒤늦게, 마물의 새끼를 밴 암컷은 마물을 낳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인 등 아인종을 포함해 인류의 테두리에 포함된 대부분의 암컷은 마물에게 있어 효율적인 번식 대상이다. 싸면 싸는대로 수컷 종족에 맞춰서 낳아주니까. 참 악의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근데 그거 나도 포함되려나 모르겠네. 하하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사샤."


어둠 속이라는 걸 감안하면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슈의 얼굴 위로 그늘이 내려앉았다.


"아, 응."


이어지는 침묵이 무거웠다. 실수했다. 괜한 농담이었다.
머릿속을 휘도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내며 애써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불안한 정신 상태와 그보다 더 불안정한 몸 상태였으나, 마력으로 만들어진 다리는 내 의지대로 쭉쭉 힘차게 발을 뻗어 나갔다.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을 내딛기 전, 어깨를 감싸 당기는 손길에 몸의 무게 중심이 기우뚱 기울었다.


"...나 더러운데."
"나도 피범벅이야."


든든하게 어깨를 쥔 손길에서 온기가 전해져왔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헛기침을 한 뒤 재차 농담을 꺼냈다.


"나였으면 정액 범벅보단 피범벅을 고를 텐데. 사실 게이였던 거지? 숨겨왔던 너의 소중한 마음을 슬슬 꺼내려는 거 아냐?"
"이런 들켰네? 하지만 들어보세요. 남자가 하프 드래곤을 어떻게 참냐?"
"그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하셨다?"
"어...뭐, 그렇지?"


음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헉. 좆됐다. 페도게이라니. 내 안의 남성성이 너를 용서치 않을 것."
"아니 그 땐 나도 어렸잖아."
"하지만 정신은 아니죠? 전생의 기억 다 갖고 있었죠?"
"시발 맞네. 내가 페도게이였다니 으아악 아니야."


도란도란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걷자니 금방 동굴 입구에 닿았다.
밖의 상쾌한 공기...를 흡입하기엔 대비되도록 내 몸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더욱 잘 맡을 수 있어 괴로웠다.
그럼에도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멈추지 않았다. 폐가 빵빵해지도록 가득히 숨을 집어넣고, 폐가 쪼그라들도록 길게 숨을 내뺐다.
무언가를 실감하는 것이 지금의 내게는 필요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뿔...? 아, 마지막으로 잡혀온 아인종...! 전원 구해주셨군요! 당신은 영웅이에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마을에 도착하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몇 안 되는 이들에게서 쏟아지는 밀도 높은 환호와 감사 인사.
그 속에서 슈는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가, 외투를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쳤다. 반사적으로 늘어지는 외투의 옷깃을 붙잡고 있자니 귓가에 자그마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근처에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정리할게."


아이고 든든하기도 하여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시달린 몸이 피로하기도 했다.


올려다본 하늘은 맑고 푸르며 주변일랑 녹빛 나무로 둘러싸인 숲의 정경.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숨을 들이쉬면 피톤치드인지 뭔지 하는 성분을 대거 흡수할 수 있을 듯한 평화로운 광경이다. 이렇게만 보면 힐링 게임 뺨친다니까.


슈를 둘러싼 처참한 몰골의 사람들을 보면 아늑하게 풀어졌던 마음이 다시금 꽉 죄여든다. 동시에 피범벅에 더러워진 몰골로도 어쩐지 유독 눈에 들어오는 슈의 존재감도 체감하게 되고.


'뉘 집 자식인지 훤칠하니 잘 생겼네.'


피식 웃으며 적당한 나무 밑에 뿌리를 피해 털썩 주저앉았다.


이 세상에 주인공이랄 존재가 있다면 단 둘뿐일 것이다.
하나는 슈가 빙의 전 플레이했다던 하드코어 야겜의 주인공인 용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빙의물의 주인공으로 적합할 내 소꿉친구 슈.


나는 어디까지나 엑스트라다.
반룡이라는 특성상 좀 많이 세고 좀 많이 개성 넘치긴 하지만...뭐, 아무튼.


이야기는 주인공의 것.
엑스트라는 주인공이 아니다.


따라서, 이건 사샤가 짓밟히고 능욕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슈가 플레이했던 게임의 스토리가 그랬듯 세상을 주무르는 악신이 한 용자에 의해 봉인당하는 이야기거나, 혹은 야겜에 빙의당한 주인공 슈가 어찌저찌 주인공다운 행보를 보이며 제 삶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다.


나도 클리셰 정도는 안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개 깔끔하고 좋게좋게 끝나는 법.


'해피 엔딩이 최고지.'


그러니까 나는 웃을 수 있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