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1편을 올립니다.

다음 편은 언제 올지 몰라요....

---


이야기 속에서 평화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평화로운 어느 날.
늦은 밤에 소꿉친구가 날 방앗간으로 불러냈다.


이는 심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방앗간이란 예로부터 남녀상열지사의 A부터 Z...는 아니고 G 정도까지는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니크한 남자가 말과 함께 오우거 파워 소년을 타는 소설에도 기술되어있는 더할나위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자, 생각을 해보자.


객관적으로 나는 미소녀다.
머리에 뿔 한 쌍이 달려있고 눈동자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져 있다는 점만 빼면, 그리고 엇비슷한 나잇대의 소년소녀들보다 성장이 쪼오끔 느리다는 점만 빼면, 겉모습만 따졌을 때 길 가던 행인들의 시선에 그럭저럭 인력을 발휘할 수준은 되는 아름다운 소녀다.


문제는 내가 전생에 남자였다는 것.
그리고 이번 생 전반을 함께하다시피한 소꿉친구는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평소 근면성실한 소년이었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부끄럽게도 다시 태어나기 전부터도 남녀상열지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지라 더더욱 짐작이 어렵다. 다만 언뜻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모범적이고 우수한 이들이 내면에 변태성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는 근거 없는 속설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나는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었다.


아, 내 친구는 가능충이구나.
그런데 나는 가능충이 아닌데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거절해야지.'


그 녀석이나 나나 아직 성인이 되려면 몇 년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서 마을 밖 마물들이 인간을 이용해 번식하고, 놀 거리 없는 촌동네에선 나이불문 성적인 놀이 문화가 활발하다고 해도, 그 녀석과 나는 엄연히 21세기 동방예의지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아닌가.
새로운 삶을 여성으로서 살게 되었으니 성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굳게 각오하고 방앗간의 문을 열었다.


내 예상대로 나의 오랜 친구는 고백을 준비한 게 맞았다.
다만 내겐 '미리 말해두는데'를 서두로 삼는 뻘소리를 늘어놓는 버릇은 없었기에 침착하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그렇기에 조금 당황하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선은, 내가 생각했던 내용의 고백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가 야겜을 하다가 빙의되었단 거지?"
"아니야!!"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이 썩 애처로웠다.
저렇게 머리카락을 함부로 다뤘다간 나중에 중장년이 되어선 뭇 남성들의 공포를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야 이젠 걱정할 필요 없지만 쟤는 평범한 인간 남성이라 신경 좀 쓰는 편이 좋을 텐데.


"이 세상엔 원작이 있고, 그 원작이 성인 RPG 게임이며, 그렇기에 세상이 이 꼬라지이다. 이거잖아?"
"잘 이해했네! 바로 그거야!"
"다시말해 너는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경험이 있고, 어쩌면 올클한 고인물이기도 하며, 여차저차 게임 속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는 얘기잖아."
"아니라니까! 왜 내가 한 적도 없는 얘기를 덧붙이는 건데!"


그야 뻔한 얘기니까.
더 말했다간 애가 정말로 뒷목을 잡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이 세상이 야겜스런 세계라는 건 누가 알려줄 필요도 없이 척 보면 안다. 상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구태여 고백을 하려 한다면 '이 세상은 야겜 세상이야.'가 아니라 '이 세상은 게임이고 난 그걸 플레이해봤어.'가 더 적절한 내용 아니겠나.


하지만 이렇게까지 부정하니 구태여 거짓을 꼬집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성인이 성인물을 향유하지 못하는 곳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성인물을 향유한 행적이란 유독 부끄러운 것일 터.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웃지마. 화낸다."
"응. 나는 다 이해하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아니...!!"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그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부끄러움을 모면하려 억지를 부리는 행동이 더욱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법이거늘. 이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내 친구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모르긴 몰라도 전생에서 쟤는 나보다 어렸을 거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느낌이 그렇다. 어른인 내가 귀엽게 봐주도록 하자.


"아무튼, 그래.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니까 조심 좀 하라고."
"허. 누구? 나?"


헛웃음을 흘리며 검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물론 그 취지는 이해한다. 두 번째 삶에서 내 육신은 영락없는 미소녀니까.
자고로 성인 게임에서 미소녀란 속히 말해 섹스하기 위한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전생의 내가 남자였던 걸 아는 녀석인 만큼 불미스런 일에 노출되지 않도록 걱정해주는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상대여야 하는 게 아닐까?


"슈, 내가 누구?"
"...사샤 더 하프 드래곤. 개쩌는 반인반룡."


좋은 대답이다. 자주 어필한 보람이 있구만.
불퉁한 표정으로 좀 미적거린 건 맘에 안 들지만 넘어가주마.


"그래. 나 종족값 개쩐다고."


다시 태어났을 적에 왜 머리에 뿔이 자라나 싶었다.


다 같이 뿔이 자란 사람들 틈에 있었다면 모를까, 내가 마주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외견 멀쩡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말을 주워듣고 인간 외에도 사람 취급받는 아인종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 아인종들 중 내가 정확히 어떤 종족인지는 알 수 없었다. 뿔이 자라니 염소 수인이나 소 수인쯤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을 뿐.
특히 황소나 들소 쪽에 무게를 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신체능력은 남달랐으므로.


내 종족을 명확히 밝혀준 건 다름아닌 슈렌이다. 그게 누구냐고? 내 눈앞에 있는 얘다, 얘.
전생 야겜 플레이어 슈 모씨는 놀랍게도 나와 비슷하게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에 더해 상태창까지 볼 수 있었다.
어쩐지 내가 애타게 부르짖어도 나타나지 않던 상태창을 지 혼자 써먹을 수 있다더니, 나한테는 이세계 전생물이었지만 쟤한테는 게임 빙의...아니 환생물이었던 거다.


그래도 별로 부럽지는 않다.
생각보다 쓸모 없는 모양이더라고, 상태창.


여하간 슈가 상태창을 확인한 내 종족은 무려 반인반룡.
이 세계에서도 용은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생물로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재앙처럼 묘사된다. 나는 그런 존재의 피가 반은 섞인 것이다. 이러니까 피지컬이 미쳐 날뛰지.


...어째선지 불을 뿜지도 못하고 날개나 비늘도 없지만...!
그거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중요한 건 내가 개쩌는 용의 피가 섞인 최상위 종족값을 지닌 존재란 거다.


"...그래서 더 걱정이야."
"아하, 하긴 아무리 강한 미소녀라도 자지에 박히면 꼼짝 못하는 게 야겜 국룰이기는 하지."
"그... 말을 좀... 아니다."


슈가 탄식하며 얼굴을 쓸어내리건 말건 나는 당당하게 논리를 펼쳤다.


"근데 그것도 좀 강해야지. 드래곤처럼 강대한 존재는 패배가 아니라, 본인이 반했다거나 하는 극히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사유로 이벤트를 띄운다고."


당연하지만 내가 남자에게 반할 일은 없다.
그리고 종족을 감안하면 클리셰적으로 누군가에게 패배할 것 같지도 않다.
따라서 나는 에로틱 이벤트에 대해선 완전무적! 게이머 입장에선 왜 얘랑 섹스 씬이 없냐고 바짓춤 붙잡고 미쳐 날뛰도록 만드는 마수걸이용 캐릭터나 다름없는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보란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아직 휴지끈이 짧구나. 더욱 정진하도록."
"그으...래."


리액션 좋은 소울 프렌드를 놀려먹는 건 언제나 유쾌한 기분을 가져다 준다.
은근히 침잠했던 감정선이 높게 부상하며 뒤통수까지 올라오는 짜릿함에 기꺼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슈의 입장에선 좀 꼴받긴 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웃는 낯엔 침도 못 뱉는다는데, 무려 미소녀의 웃음이니까.


"그걸 말하려고 여기로 부른 거야?"
"음, 그렇지?"


예상했던 내용의 고백은 아니었지만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슈의 용건이 끝났다면 이젠 한껏 들뜬 기분으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낼 시점이다.


"그럼 이제 니네 부모님한테 오밤중 나를 불러낸 건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지 함께 토의해볼까?"
"무, 뭐? 내가 몰래 오라고 했잖아!"


그게 되겠냐고. 이 촌동네가 얼마나 좁은데.
사실 밖으로 나오며 식탁에 있던 그릇 떨군 게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나. 이미 들켰다는 게 중요하고, 당시 다소 머리속이 복잡했던 내가 솔직하게 이실직고했다는 게 더욱 중요하지.
슈네 부모님의 걱정과 약간의 의심을 담은 시선이 급속도로 주홍빛 흐뭇함으로 물드는 광경이란... 나조차도 얼굴이 벌개질 정도였으니, 슈가 봤더라면 아마 혀 깨물고 죽겠다고 날뛰지 않았을까.


"자자, 이미 벌어진 일이야. 해결책을 논의하자구."
"너도 당사자라는 거 알고 있지?"
"당사자니까 이러는 거지."


솔직히 친구 사이인데 그렇고 그런 취급 받는 건 조금은 곤란하다.
하지만 그 곤란함도 슈가 고통받으며 끙끙댈 걸 생각하면 견딜 만 하다는 게 그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리라. 불쌍하지만 어쩌겠나. 그러게 친구를 잘 뒀어야지.


"전부 거짓말이고 그냥 혼자 밤산책을 했다고 하면?"
"운동을 지지리도 싫어하는 내가 갑자기? 잘도 믿어주시겠다."
"그냥 둘이 만나서 도란도란 얘기만 했다고 하면?"
"오, 그냥 내일부턴 우리 같은 침대 쓸래? 손만 잡고 잔답시고?"
"하아... 미친 년인가 진짜...."


생산적이지 못한 회의는 내 수면 사정으로 인해 일찍 끝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려다본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쩌면 원래부터 아름다웠으나 밤에 밖에 나올 일이 없던 터라 몰랐던 걸지도.
궁시렁대며 부질없는 고민을 거듭하는 소꿉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러 이 아름다움을 공유할까 하다가 말았다. 아름다운 밤하늘 못지 않게 소소하게 괴로워하며 끙끙대는 슈의 모습도 볼 만 했으니까.


좋은 밤이다.


어쩐지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문득 떠오를 것만 같은.


그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