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끔찍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슈에게만.


"아... 죽고 싶다."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굳히며 다정하게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휴, 저런...."
"영혼 없는 소리 집어치워라."


자못 딱하다는 감정을 실었건만 그렇게 들리진 않은 모양이다.
아침 내내 골이 울리도록 웃어댔으니 당연히 비꼬아 들을 법도 하다. 그렇다 해도 이건 나름 순수하게 위로의 의미를 담은 말이었는데 말이지. 딱히 딱하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 틀린 것도 아니긴 하다만... 좀 꼴받네.
건방진 소리를 한 대가는 치르게 해줘야겠지.


"가족 공식 후다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시바알...."
"나쁜말."
"씨발."


어젯밤 열심히 고민한 보람이 없게도 슈는 제대로 된 변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밤새 머리를 굴렸는지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퀭한 눈으로 방 밖으로 나온 그는, 어른의 계단을 오른 아들내미를 기특하게 여기는 부모의 흐뭇한 시선에 정면으로 직격, 이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느니, '손주 보기엔 이르다'느니 하는 후속타까지 얻어맞으며 완벽하게 굉침했다.


그러게 나처럼 푹 자고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집 밖으로 나왔어야지.
얼굴이 시뻘개져서 안절부절 못하는 걸 창문 밖에서 엿봤다가 웃음 참느라 배가 다 땡겨왔다.


일찍 일어난 김에 슈도 깨워서 데려올 수 있었던 거 아니냐고?
그런 불필요한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가 어디 있지? 아니, 불필요한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표현해야 옳다. 그도 그럴게 지금 내 마음은 이렇게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걸.


"마음에 안 들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저런... 걱정 마. 사흘 내로 마을 공식 후다로 업그레이드 될 테니까."


울컥 화를 내려던 슈의 표정이 곧바로 심각해졌다.


여성이 정조를 잃은 거야 이래저래 쉬쉬할 일이지만 남자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다.
하물며 슈네 부모님은 둘 다 아들바보인 데다 이것저것 떠들기를 좋아하는 호사가. 특히 아저씨의 경우 술이 들어가면 입이 매우 가벼워지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어른이 됐다는 경사는 소소하게 음주를 부추기기 딱 좋은 안건이 아닌가.


더욱 참혹한 미래가 기다린다는 걸 알게 된 그가 울상을 지었다.


"사샤, 어쩌지...?"
"글쎄다? 동네방네 나 아직 동정이랍니다~ 하고 소문이라도 낼래?"


썩 곱지 못한 눈길이 날아왔으나 우습게 받아넘겼다.


내가 이렇게 여유로운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말했다시피 여성의 성 사정은 은밀하게 취급되는 까닭에 슈의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슈네 부모님 두 분 다 호사가라고는 해도 선은 지키실 분들이니까.
사실 소문이 나더라도 '슈가 비동정이래요!' 라는 식이라기보단 '사샤랑 슈랑 사귄데요!' 같은 식으로 날 거라 예상한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아들내미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만.


이쪽도 곤란하긴 하지만... 내 입장에선 아주 나쁘진 않다. 앞으로 밤낮으로 슈랑 놀러나가기 편해질 테니까.
슈는 인기가 많은 편이라 틈만 나면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곤 하는데, 그걸 억지로 떼어놓고 나랑 다니자고 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더한 민폐가 될 수도 있으니... 참았지 뭐.


하지만 이제부턴 아닐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슈의 옆자리에서 비켜줘야 할 정당한 명분이 생긴다, 이 말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좀."
"흣스리흐지 믈그 즘."
"허."


탄식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을 뱉어낸 슈의 손이 잽싸게 내 머리 위로 뻗어졌다.
반룡의 반사신경을 쓰면 피할 수도 있었지만 슈의 기분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장난감도 아껴서 써야 오래오래 쓰는 거 아니겠나. 친구도 마찬가지다.


콱. 양손으로 뿔을 쥔 그가 마구잡이로 내 머리를 흔들어댔다.
뿔째로 붙잡혀 휘둘리는 기분이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상당히 어지럽다. 평소 단단하기만 한 뿔인데도 신경이 연결되어 있긴 한 건지 약간 스릴있게 짜릿하기도 하고. 비유하자면... 나만의 작은 롤러코스터?


"하하하하하하."


더 꼴받으라고 일부러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묘한 짜릿함에 조금씩 움찔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온 힘을 다해 뿔을 어이(맷돌 손잡이)마냥 돌리고 있는 와중에 그런 걸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지.


아, 즐겁다.
이게 사람 사는 삶이지.



타박 타박.


반룡의 예민한 청각이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잡아냈다.


"자, 잠깐만. 슈?"
"으아아아-!"


왜 가끔 사람은 의미없는 행동에 열중하게 되지 않던가.
엄지와 검지로 테이블을 번갈아 두드린다든가, 끝에 무게추 비슷한 게 달린 줄을 빙빙 돌린다든가, 손가락 사이에 끼운 펜 따위를 빙빙 돌린다든가, 발 밑이 공중에 떠 있으면 괜스레 종아리를 휘적거린다든가.... 슈도 지금 그런 상황에 빠져든 것 같았다.
무아지경으로 내 뿔을 잡고 휘두르고 있는 것이, 착잡하기 그지없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단순 행동을 반복하는 심정은 알 만 하지만...!
어... 그러니까...... 이렇게 휘둘리는 걸 남한테 보였다간 평소 쿨함과 신비함을 표방한 내 이미지에 타격이 온다!


"이거... 놔...!"


반룡의 근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 슈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뒤로 나동그라질 뻔한 슈가 가까스로 상체를 되돌리며 당혹스러워했다. 하긴 둘만 있을 땐 뿔 갖고 장난을 자주 쳤으니까 반응이 좀 낯설긴 하겠지.


"사샤?"


씁, 미안한 표정 짓지 마! 화내는 거 아니니까!
뒤늦게 떠올랐는데, 듣자하니 뿔 달린 아인종들의 뿔을 서슴없이 만지는 행위는 무례한 일에 속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소꿉친구를 무뢰한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라 해야 마땅하리라.


"...."


내가 눈짓을 하자 반사적으로 슈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되돌아오는 걸 보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는 못 했나 보다. 소꿉친구라면 이런 건 척 하면 척 하고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간의 세월이 헛되구만.
슈는 내버려두고 관성으로 빙글빙글 도는 듯한 머리를 억지로 가지런히 고정시켰다. 불과 몇 초 되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렌, 사샤. 여기서 뭐해?"


건물 뒤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땋은 양갈래 머리의 소녀, 로즈마리.
비교적 성장이 느린 나보다도 어린 티가 나는 그녀에게 나는 빙긋 마주 웃어보였다.


"불쌍한 슈를 위로해주고 있었지."
"왜? 무슨 일 있었어?"
"음...."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생각해보니 이걸 얘한테 말해도 되나? 아웃 아닌가?
근데 또 장르가 야겜인 세계관으로 보나,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갈 소문으로 보나, 구태여 숨겨봤자 의미가 있긴 할까?
순간의 고민은 보신주의적인 내 성격으로 인해 한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다.


"...어젯밤 밤에 몰래 나갔다가 부모님께 들켰거든."
"아하."


거짓말은 안 했다. 거짓말은.


"어쩐지. 아저씨들 얘기하는 데서 슈렌 이름이 나오더라구."


묵묵부답으로 눈치를 보던 슈가 퍼득 고개를 들었다.


"...뭐? 어디서?!"
"비앙카 언니네 집 앞."
"비앙카네 집이면 주점이잖아! 설마 대낮부터...!"


겸허히 인정했다. 아저씨의 행동력을 얕봤다는 걸.
하기사 아저씨나 아주머니나 슈에 대해 다 좋은데 숫기가 좀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곤 했으니까. 확실히 이쪽 세상에선 이른바 사내답고 호탕한 남자가 좋게 취급받는 것 같더라고.


기겁하며 달려나가는 슈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은 오랜만에 힘이 빡 들어간 아주머니의 요리를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분명 국물도 퍽퍽하고 건더기도 고기로다가 푸짐하게 들어간 녀석이겠지? 어쩌면 드디어 술도 마셔볼 수 있을지도? 군침이 싹 도네.


"...저기, 사샤."
"응?"


로즈마리는 방금 전까지 슈가 있던 내 옆자리에 앉고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했어?"
"...."


물 같은 걸 마시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으음, 역시나 야겜 세상이야. 성에 대해선 굉장히 진보적이고 자유롭구나. 하하.


뭐를? 하는 뻔한 대응은 하지 않았다. 해봤자 보다 직설적인 답만 돌아올 게 뻔하니.
은근슬쩍 옷자락을 쥐는 걸로 보아, 이 맹랑한 아가씨는 꼭 내 입으로 대답을 듣고 싶은가 보다.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조금은 골려주고 싶어졌다. 내가 먼저 꺼낸 주제도 아니니까 구태여 자제할 필요도 없겠지.


"그러엄~ 당연히...."
"안 했구나."


이런, 어떻게 알았지?


로즈마리의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아니, 갈색이 아니라 푸른 색인가? 보라색? 햇빛 때문인지 색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커다란 눈망울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자니 그녀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밝은 미소와 함께 로즈마리는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툭툭 토닥였다.


"나 응원할게."
"어... 어, 고마워?"
"사샤는 강하니까, 여차하면 강제로 밀어 넘어뜨려버려."
"...."


세계관이 세계관이라지만, 이거 괜찮은 거 맞나?
도대체 이 세상의 성교육은 어디까지 진보적이란 말인가?


"나 진짜진짜 응원할 테니까. 포기하면 안돼."


순수하고 열성적인 응원이었다.
뭐라 말로써 답하기엔 애매해서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걸로도 로즈마리는 만족했는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럼 다음에 봐."


타박타박.
로즈마리는 왔던 길을 그대로 밟아 사라졌다.


"...뭐지?"


소녀의 뒤를 쫓던 시야의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움직임이 눈을 잡아 끌었다.


마을 밖 들판에서 날아왔을 새하얀 꽃잎 하나가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유영한다.
마치 거친 파도 속을 헤쳐나가는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뒤집히면서도 바람을 타고 계속 나아간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제법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말했듯이, 사람은 이따금 의미없는 행동에 열중하곤 한다.
무심코 넋을 잃고 꽃잎을 구경하던 나는 이내 슈가 마을 아저씨들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조리돌려지는 장면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깨닫고는 몸을 일으켰다.


산들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자니 어느덧 꽃잎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쉬워할 것 없는 일이다. 봄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앞으로도 비슷한 광경을 종종 볼 수 있을 터. 물론 그때도 멍때리며 꽃잎의 비행을 구경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만.


평화로운 봄날이다. 당분간은.


---


줄바꿈을 더 자주 써야 할까 고민중입니다.

어떻게 하는 편이 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