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택을 하면 돌이킬 수 없다.]


[정녕, 정녕 그리할 것이냐? 너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안전한 세계로 무사히 넘어가겠지. 하지만, 너는...]


"이미 결정했어..."


[.....알겠다.]



막으려고 했다.

피하려고 했다.


차원의 좌표가 찍혀 온갖 세계의 괴물과 이매망량, 역겨운 역병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세계를 지키려고 해봤다.


허나 지쳤다.

못하겠다.

감당할 수 없다.


간신히 막아냈다고 생각했던 재앙의 파도는 인간의 땅과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붙였고, 내가 있는 곳은 패배하지 않다쳐도 그를 제외한 다른 세상은 모두 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결단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용사님과 황녀 전하의 눈에도 절망감이 어렸다.


그래서 난 별빛을 거니는 그분께 난 나라는 대가를 바쳤다.


이계에서 온 존재인 나는 그분께 참으로 복스러운 보석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와닿지는 않았다.

기왕 소중히 여겨줄 것이라면, 여자 몸으로 강제로 바꾸지도 말고 좀 안전한 세계에서 나데나데나 해주지...


다행히도 전능하신 그분께선 내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셨다.


"나 이계의 첨병이 되리"

[ㅡ그리하면 그대는 뜬 눈으로 역겁의 세월 동안 홀로 남으리.]

"그 대가로. 살아남은 모두를 구원하길."


-아, 안 된다! 안 돼!!!

ㅡ멈춰요!!!



내 친우, 동료, 동반자들은 내가 저지르는 금기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당연하지.

이건 나 하나가 이곳에 남은 대가로 살아남은 모든 이를 이곳과 동일한 '안전한 세계'로 보내주는 금기니까.

나 하나만 희생하면 돼.


나 하나만...



"하아..."



됐다.


금기에 번지르르한 마법진도 없었고, 전조증상도 없이 모든 생명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별빛께서 날 배려해주신 덕분일까?


눈을 감으면 난 살아남은 자들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로 넘어간 것이 보였다.


그래, 슬퍼하겠지.

내 친우, 동료들이 바닥을 긁으며 날 부르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너흴 구했잖아.

폼은 나진 않지만, 뭐...



"어차피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는 있고..."



힘만큼은 자신있으니까.


내가 자신이 없는건 괴물과 재앙의 파도에서 그 많은 사람을 지키는 게 힘든거지. 나 혼자만 있다면 괴물이 얼마나 있든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괴물 살이나 뜯어먹고, 혼자서 노숙이나 하고... 그렇게 하면 당장에 죽진 않겠지.


내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몸과 정신력이 유일한 나의 장점이니까.



ㅡ그리하여 꽤 시간이 흘렀다.


100년?

200년?

어쩌면 10년도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긴 한데... 이곳엔 시간을 체감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해는 빛을 잃었고, 초목은 매마르거나 기괴하게 변이되거나 하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도 난 눈을 감는다.


[그 모든 재앙은 ■■■의 탓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용사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더 잘해냈다면 우린 고향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원을 원했던 이들이 내뱉는 소리.


나와 내 동료들을 탓하는 소리.


그들은 재산을 잃었을까 가족을 잃었을까?


화가 나지 않냐고?

당연히 화가 난다.


화가, 너무 나서.

피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나한테 그런 기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


참으로 곤란하게도 눈을 감으면 처음엔 다들 협력하고 평화롭게 도우며 새로운 삶과 문명을 이뤄낼 줄 알았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그랬지.


그런데 인간이 여유로워지면 부유해지고, 부유해지니 권력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니 상하관계와 정치질, 온갖 루머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결국 이꼴.

어느새 날 마녀로 몰아 정치적인 선전으로 이용하는 놈들이 아주 드글드글했다.


아예 내가 이계의 재앙을 불러일으켰다고 호도하는 놈들도 상당했을 정도...


당연히 화가 나고 눈을 감을때마다 분노와 피눈물이 치밀었지만, 그 분노와 증오도 나의 동반자가 된 것일까?



[ㅡ여기! 그 ■■■의 동료입니다! 우릴 외딴 세계로 몰아내버린 그 ■■■의 동료!]


"뭐?"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내 친우가.

내 친우가 죄인처럼 사슬에 꽁꽁 묶여서 군중들의 욕설과 고함으로 모독을 받는다.


그 어여쁜 얼굴이 초췌해지고, 누군가 던진 쓰레기나 계란에 더럽혀진다.


그걸 본 순간..


음,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 겠다.


"별빛이여! 구원의 계약을 파기한다!!!!"


[ㅡ그럴 필요 없단다.]


별빛이 속삭였다.


[너의 행선지는 정해졌나니.]


그분께서 웃으신다.


문이 열렸다.


눈을 감으면 보이던 그 '평화로운 세계'의 문이.

우리에게 구원받았음에도 나를 저주하고 증오하던 놈들이 있는 곳으로.


다른건 전부 이해하겠다.

날 욕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원망할 대상을 나로 한정하는 것도 이해하겠다.


그런데 이건 아니지.


그러니까.



[ㅡ그대들에게 멸망을 선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