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무겁다.


느닷없이 찾아온 탈력감에 몸을 움직여보려 하지만, 어째선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렵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누군가 움직이지 못하게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잠들었던가…


감겨있던 두 눈을 떠보려 하지만,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밝은 빛에 절로 눈쌀이 찌푸려졌다. 실눈으로나마 주변을 살펴보려해도 찔끔 나온 눈물 탓에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무슨 소란이지?


마치 물속에 풍덩! 머리 끝까지 잠수했다가 떠올랐을 때 잠시 귀가 먹먹했던 것처럼, 귓가에 소리가 웅웅거린다. 무언가 시끄럽기는 한데, 워낙 들려오는 소리가 많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다행히 시간이 조금씩 흐르며 나를 억압하던 속박들도 영원하진 않았는지 하나둘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허나 겨우 차린 정신으로 파악한 내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되찾은 자유조차 완벽하진 못해서, 아주 일부만의 자유만이 허락되었다.


딱히 어디 다치거나 먹지 못해 기운 없는 것도 아닌데, 두 팔과 다리는 꽉 묶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겨우 뜬 눈으로 바라본 광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적의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내게 무언가 던지려다 옆 사람이 겨우 말려준 덕분에 손을 내린 사람도 있었다.


시장통보다 더 소란스러운 소음 속에 간간히 들려오는 몇몇 문장들은 죄다 나를 욕하고 있었다. 사악한 마녀, 돈에 환장한 년, 더러운 창부, 피에 미친년, 등등… 온갖 더러운 욕설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잠깐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묶어두고 욕을 하는 건 둘째치고, 왜 던지는 욕설들이 죄다 년 타령이지? 이래서는 마치 내가…


“어엉…?”


꼼짝하기 어려운 가운데 겨우 고개만 움직여 내려다 본 시선에는 내 몸에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운동해서 키운 가슴 근육 대신, 옷에 가려져 있지만 딱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두번세번 확인해봐도 남성의 그것이 아니다. 만약 내 두 손이 묶여있지만 않았더라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일단 손부터 갔으리라.


그러고보니 조금 전 멍청히 내뱉었던 내 목소리 또한 이상했다. 평소에도 딱히 굵직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자 목소리라고 오해받을 정도는 아닌 평범한 내 목소리가,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조금 과장해서 목소리만으로 사람이 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러나 평소 앞머리만 조금 길게 내려오던 내 머리는 기억과는 다르게 한참 아래로 내려와 볼 전체를 간지럽혀 왔다. 얼핏 눈가에 비치는 머리카락은 심지어 토종 한국인의 검은 머리가 아닌 밝은 금발을 띄고 있었다.


“씨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 입에서는 한국인의 모든 정서가 담겨있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정말 ‘씨발’이 아니고서는 지금 내 기분이며 상황을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닥쳐라, 이 사악한 마녀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한참 혼란스러운 와중, 낯선 목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외침은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욕설을 내뱉는 무리와는 섞이지 않은 채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줄곧 입다물고 조용히 있길래 마지막 아량으로 재갈만은 물리지 않았거늘… 겨우 입을 열어 내뱉은 첫마디가 더러운 욕설이라니, 그런 속내를 감추고 그동안 잘도 성녀 연기를 해왔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영화 촬영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중세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갑옷 차림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엄청 무거워 보이는데 과연 저 차림으로 한발짝은 움직일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이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 사람… 방금 뭐라고 말한 거지? 나한테 그런 건가?


“저 사악한 마녀가 어떤 끔찍한 저주를 퍼부을 지 모르니 얼른 입에 재갈을 물리도록.”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브브븝…!”


딱 봐도 내게 호의라고는 한 줌 보이지 않는 상황에 사람 잘못봤다고, 오해라고 얼른 변명해보려 입을 열어봤지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명령을 받은 또다른 사내가 다가와 내 입에 재갈을 물려버렸다.


“으븝! 으브브븝!”


내 간절한 외침은 꼴사나운 옹알이가 되어 애처롭게 울려퍼졌다.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게 된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없는데, 나를 바라보는 관중들의 시선은 싸늘할 따름이다.


“악신을 섬기며 대륙에 혼란을 야기한 죄, 성녀를 사칭하며 대중들을 우롱한 죄, 권력을 탐하여 나라를 전복하려한 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국가 경제를 뒤흔든 죄…”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한테서 시선을 돌린 갑옷 차림의 사내는 무언가 종이 쪼가리를 꺼내 들더니 이내 단상 아래 모여있는 대중을 향해 큰 목소리로 하나하나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잘은 몰라도 뭔가 터무니없는 죄목들이 그의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악신이니 성녀니 하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 외에도 죄목은 참 다양하다.


죄목이 워낙 많다보니 오히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누구를 폭행했다느니 물품을 파손했다느니 하는 죄목은 국가 전복이나 암살 미수같은 죄목 앞에선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리고 안타깝게도… 흘러가는 상황으로 보아 이 모든 죄목은 아무래도 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법 없이 살만큼 착해빠진 놈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그런 미친놈도 아니다.


길을 걷다가 쓰레기를 버릴 때면 최소한 주변을 살펴보고 전봇대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를 발견해서 그 위에 슬쩍 끼워넣는 정도. 딱 그정도의 양심과 도덕 정신을 지닌,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슨 세기의 범죄자로 몰리고 있으니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없는 상황.


“이 명명백백한 그대의 죄목 앞에서 어디 변명할 말이라도 있는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갑옷 차림의 사내는 내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나,


“어븝! 어브븝!”


불행하게도 내 입에 물린 재갈은 풀어주지 않았다.


‘시발! 최소한 입에 물린 재갈이라도 풀어 주고 지랄하던가!’


“으붑! 우브브븝!”


“하긴, 제 아무리 사악한 마녀라 할지라도 사람으로서 마지막 양심이 있다면 변명은 못하겠지. 자, 그러면 이제 형의 집행을 진행하도록 하지.”


이럴거면 차라리 묻지나 말던가. 아주 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구만.


“본래라면 이 마녀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바이나, 우리의 자애로운 주신께서는 이런 사악한 마녀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베푸시기로 하셨다.”


사내의 말에 단상 아래 몰려있던 관중들 중 일부는 말도 안된다며 외치기도 하고, 일부는 반대로 제가 믿는 신의 자비로우심에 감격했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물론 나로서는 천만다행이라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레 맞닥뜨린 상황에 현실감이 없는 건 여전하다만, 앞서 사내가 말했던 죄목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기회라도 주어졌으니 일단 한숨은 돌린 샘이다.


그래서… 저 놈이 말하는 마지막 기회가 뭐지?


후욱-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열심히 고민하던 와중, 갑자기 후끈한 온기가 얼굴을 간지럽혔다. 느껴지는 온기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앞서 내게 재갈을 물렷던 사내가 이번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웬 횃불 하나를 손에 들고있었다.


“보라! 모든 부정한 것을 태우는 정화의 불길이 죄많은 마녀를 심판할지니! 만약 이 마녀가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정화의 불길은 오직 그녀가 저질렀던 죄악만을 불태우고 멈추리라!”


…이게 뭔 개소리지?


“허나! 만약 이 마녀가 끝까지 자기 죄를 부정하고 주신께서 베푸신 마지막 자비마저 거부한다면, 모든 부정한 것을 태우는 정화의 불길이 그녀를 심판하리라!”


그러니까 방금 이 새끼가 말한 걸 요약하자면…


불 붙여서 용케 살아남으면 용서받은 거고, 불에 타 죽으면 끝까지 반성하지 못했으니 잘 죽었다는 얘기지?


무슨 중세시대 행해지던 마녀 사냥도 아니고… 아니, 앞서 나를 향해 마녀라고 외치던 걸 생각해보면 마녀 사냥이 맞나?


어찌됐든 중요한 건 내가 불에 타 죽을 위기에 쳐했다는 사실이다. 이제보니 심지어 내 발밑에는 불이 잘 붙으라고, 물기 하나 없이 아주 바짝 말린 건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장난이지? 그치?


애초에 남자인 내가 왜 마녀 사냥을 당해야 하는 건데?


“으븝! 으브븝!”


허나 내가 아무리 억울해 한들 현실은 손발이 묶여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상황.


입에는 여전히 재갈이 물려있었기에 대신 간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 열심히 애원해보지만, 죄다 눈을 피하거나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죄다 내게 적의 가득한 시선을 보였다.


그 사이 사내의 손에 들린 횃불은 점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내 모든 발악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에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만 절실하게 깨닫게 만들었다.


신실한 신자라면 자신이 믿는 신께 열심히 기도라도 드리겠지만,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온 내가 할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현실을 부정하는 것 뿐이었다.


‘시발, 다 꿈일거야… 눈 감았다 뜨면 평소처럼 좁아터진 내 방에서 눈을 뜨겠지.’


…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꿈이 아니라면 느닷없이 내가 여자가 된 것도, 이런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건 현실부정일지언정, 현실도피는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추론에 가깝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정답을 내놓은 나 자신이 기특할 지경.




화르륵-!




그리고 마침내, 횃불은 기어코 내 발 밑에 수북히 쌓여있는 건초더미에 불을 옮겨붙였다. 아무리 바짝 말린 건초더미라 해도 곧장 불이 옮겨붙지는 않았다. 다만 서서히 서서히, 면적을 넓혀갈 뿐.


물론 곧있으면 건초더미를 잡아먹으며 크기를 키워가던 불길이 나까지 집어삼키겠지만, 나는 전혀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 상황이 꿈이라면 무서워 할 필요도 없다. 설령 저 불이 나를 집어삼킬지라도 꿈이라면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그래. 분명 이 모든 상황은 꿈일 텐데…


‘왜… 뜨겁지…?’


모닥불 피웠을 때 좀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느껴지는 열기는 생각보다 뜨겁다. 못버틸 정도는 아니지만 억지로 버틸 필요도 없는, 딱 그정도의 열기.


나는 지금 그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읍읍?!”


…그제서야 진짜 현실에 눈을 뜬다.


합리적인 추론은 개뿔. 현실부정이 아니라, 현실도피였다.


이 모든 상황은… 아무래도 꿈이 아니라 현실인 모양이었다.


이제서라도 정답을 깨달았다고 기뻐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으읍!!! 어브븝!!!”


일렁거리던 불꽃이 내 발끝을 건드리기 시작하자 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고통이 닥쳐왔다. 살면서 그 누가 타오르는 불길에 제 몸을 던져볼까.


“아무래도 이 마녀는 끝까지 제 죄를 반성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운 와중에도 갑옷 사내의 중얼거림은 내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불을 질러놓고는, 책임의 소재를 아예 나에게로 돌리는 그 뻔뻔함이란.


그러나 재갈물린 입으로는 욕을 내뱉을 수도 없고, 꽉 묶인 팔다리로는 한대 때려줄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잇는 거라고는 그저 비명지르는 것 뿐.


그렇게 점차 크기를 키워가던 불길은 기어코 내몸마저 완전히 집어삼켰다.




화르륵-!




“으브브븝!!!!!”


크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