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의 말살은 인류의 신성한 의무."

"모든 수인은 즉시 도살되어야 하며 지구상에서 싸그리 멸절시켜야 합니다!"

"즉시 절멸수용소를 세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600만 마리를 신속하게 도축할 수 있죠?"


회의장에 고성이 오간다.

주제는 수인에 대한 처리 방안.

이 나라는 순혈인류를 위한 나라이므로 조금이라도 오염된 피는 없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쩐지 불쾌하군.


"이만 회의를 끝내도록 할까요? 날이 늦었습니다."

"벌써 시간이. 허허, 저는 아내가 차려준 저녁 먹으러 이만 갑니다."

"오늘 딸 생일인데. 이거 야단 맞는 게 아닐까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번주만 끝나면 휴가라서 다행입니다."


방금까지 학살과 절멸을 주장하던 양반들이 회의가 끝나면 단란한 가정의 늠름한 가장이 된다.

전장은 격화되었고 총력전에 이르렀는데 참으로 태평하기 짝이 없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목에 핏대 세우면서 수인을 전부 쳐죽여야 한다고 한 게 방금 전이었는데.

집에서 기르는 수인 한 마리를 볼 생각에 설레다니.


휴우, 이제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 * * * *


집으로 돌아가니 수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없다.

그저 수용소로 끌려가다가 도망쳤기에, 불쌍해서 기르고 있을 뿐.


"오, 오셨나요?"


그녀가 새우잠을 자다가 고양이귀를 쫑긋거리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손등을 혀로 핥으면서 나를 배시시 바라봤다.


역겨운 수인 같으니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잘 지냈어? 뭔 일 없었지?"


"예. 보고싶었어요."


아침에 봐놓고는 뭔 소리를 하는 걸까.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웃기시네. 나를? 왜?"


"그야 당신은 좋은 사람이잖아요. 저를 이렇게 거둬주시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어디까지나 널 사육하는 거야. 당장 절멸수용소로 보내도 모자를 판국에."


아뿔싸!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수인 처분에 관한 회의는 극비 중의 극비 사항.

회의 내용이 절대로 들켜서는 안된다.


수인은 경악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절, 절멸이요? 수인을 죽인다고요?"


"그,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믿었는데. 저도 죽일 거에요?"


"그게 아니라..."


"나빴어. 배신자! 악마!"


수인의 비난에도 난 할 말이 없다.

이런 애를 죽여야 하는 게 맞는 걸까.

모르겠다.


그녀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기고 싶다.

만약 그녀를 들킨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쾅, 쾅, 쾅ㅡ!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와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흐갸악! 드, 드디어..."


"진정해. 입 막아."


"다른 수인들도 그렇게 해서 잡아갔지? 다 알아!"


"그, 그게 아니라..."


쾅, 쾅, 쾅ㅡ!


큰일 났다.

일단 되는대로 그녀를 지하실 안에 쳐넣었다.

그리고 뒈지기 싫으면 소리 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집을 정리한 다음,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이 집에 수인이 산다는 신고 받고 왔습니다.?"


악명 높은 비밀경찰.

그들이 결국 이 집까지 찾아왔구나.


수인학살을 열심히 주장하면 안 들킬 줄 알았는데 결국 들켜버렸네.


상대의 계급은 중사.

계급장으로 깔아뭉개야겠다.


"웃기시네. 감히 나를?"


"중령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고요, 혹시나 해서요."


"혹시나? 엉뚱한 사람 의심할 시간에 적국 스파이나 찾지 그래?"


"중령님도 아시겠지만 수인에 대한 수색은 비밀경찰의 제 1 업무란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 중사 나부랭이가."


"불쾌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자꾸 그러시면 무단으로 수색하겠습니다."


머리가 아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빼돌리는 건데.


여기서 수색을 거부해봤자 의심만 살 것이다.

심지어 비밀경찰은 임의로 수색할 권한이 있다.

내가 아무리 계급장으로 깔아뭉갠다고 쳐도 상대가 무대뽀로 밀고 들어오면 답이 없다.


어쩌지.

마음을 굳게 먹고 안으로 들였다.


"들어와. 차 한 잔 할텐가?"


"저도 할 일이 많습니다. 흠, 수인 냄새가 나는군요."


상대는 킁킁 맡으면서 이곳 저곳 뒤적거렸다.

촉 한 번 상당히 좋은가봐.


하지만 이미 각오는 되었다.

이름도 모를 수인이지만, 난 도저히 그녀를 죽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소방용 도끼를 들어버렸다.


"중사.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네."


"중령님, 그게 무슨..."


"날 용서해주게."


퍽, 퍽ㅡ!


도끼를 무참히 내리찍었다.

불결한 수인의 머리를 치듯이, 순혈인류인 동족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결국 비밀경찰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버렸다.


"헉, 헉, 헉..."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를 지었군.

사방에 피가 튀는 끔찍한 살해현장이라니.


사방을 둘러보다가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


"사, 사, 사, 사, 살려주세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수인 안 할 게요."


그녀는 무릎 꿇고 사시나무 떨듯이 간질히 빌고 또 빌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해서 그런가.

자기도 저렇게 될까 무서워 하는 것이겠지.


도끼를 집어던지고 수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순결한 은빛 머리에 검붉은 피가 묻어버렸다.


"같이 도망치자."


"예? 그, 그게 무슨..."


"도망치자고. 이대로 절멸수용소에 끌려가든가, 아니면 발버둥이라도 치든가."


어차피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한 발짝 앞서서 움직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전쟁 중이니 수도에도 적국 스파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기밀자료에 접근 가능하니,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그들과 접선해서 나의 쓸모를 증명한 다음 탈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다.


스파이, 스파이라.

얼마 전에 우리측에 포섭된 이중간첩 한 명 있지 않았나?


한시가 급하다.

대충 씻고 시체는 숨긴 다음, 출근해야겠다.

그리고 기밀자료를 탈취하고 접선하는 거지.


수인 한 마리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