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애정결핍 늑대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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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https://arca.live/b/tsfiction/84884889
프롤로그 https://arca.live/b/tsfiction/8432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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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시간 있어?"


내 몫으로 둔 맥주잔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유서아가 말했다.


물론 내가 첫 잔을 비웠다는 게 유서아도 마찬가지라는 건 아니다.


맥주를 마시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된 유서아는 새로운 걸 찾았다는 깨달음인지, 아니면 여태껏 먹지 않았던 것의 반동인지 이후로 세 잔이나 비워내 버렸다.


아까운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마구 마셔대면 조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어진다.


"내일 말입니까?"


"응, 혹시 같이 쇼핑이나 할까 하고."


쇼핑이라.


전생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꽤 동떨어진 말이다.


내가 하는 소비 생활이라고 해봐야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이 맥주들이 전부.


그나마 가끔 임무 도중에 들르는 편의점 정도가 그나마 내가 밖에서 구매하는 것의 전부였다.


그런 내가 쇼핑을 가봤자 무슨 도움이 될까.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담백한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이유를 모른 체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새 맥주를 따랐다.


"내일은 협회에 볼일이 있습니다."


"협회에?"


"네, 다음 임무를 확인하라는 명령이 와서 가야 합니다."


이전 임무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으니 슬슬 새 임무를 받을 때가 온 것이다.


히어로의 일은 엄연히 따지자면 용병생활이다.


할당된 일을 받고 그걸 완수하면 돈을 받는다.


그런 간단한 원리로 히어로라는 직업은 굴러가고 있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이야기하지!"


방금까지 묘하게 가라앉았던 유서아의 모습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 짧은 사이에 고민이 해결되기라도 한 걸까.


"...잠깐, 내일 몇 시에 나가?"


"협회에서 약속하는 시간은 항상 오전 10시로 같습니다."


"지금은 몇 신데...?"


"아까 오신 게 12시였고 지금은 새벽 2시입니다."


방금 전 슬쩍 스마트폰을 확인했을 때 이미 1시 50분이 다돼가고 있었다.


아마 그 이후로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2시 언저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멀뚱히 유서아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유서아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방금까지 맥주를 입안으로 때려넣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던 손까지 벌벌 떨고 있다.


"너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기겁을 하며 소리치는 유서아 덕에 나도 모르게 귀가 머리에 달라붙는다.


그런 건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내 귀는 다른 사람들보다 청각에 예민해서 큰소리는 부담된단 말이다.


"괜찮습니다. 수면 시간은 5시간 정도만 있어도 되니까요."


빈말은 아니다.


늑대의 특징을 지닌 내 신체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몇 배는 튼튼하니까.


이 정도 가지곤 조금 피곤한 정도로 그칠 수 있다.


"아니, 그렇지만..."


유서아는 반박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잔에 조금 남은 맥주를 흔들며 뚱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내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그래,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해한다.


내일 일이 있는 사람을 데리고 새벽까지 술을 먹자고 판을 벌였으니 말이지.


그래도 정말 내일이 곤란했으면 애초에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다.


"3시 전에만 자두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한껏 침울해진 유서아를 달래기 위해 한마디를 덧붙인다.


유서아는 울프팀의 분위기 메이커다. 이런 사소한 일로 침울해지면 곧 있을 임무에서 지장이 생긴다.


나는 조용히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이미 안주는 없지만, 그런대로 맥주의 향으로 잘 넘어간다.


어쩌면 이미 어느정도 취해서 알콜에 대한 저항이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슬슬 그만 먹긴 해야겠네.


"...안되겠어."


슬슬 빈 치킨 상자를 정리하고 일어날까 싶은 생각에 상자를 바라보고 있던 와중 유서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작게 말했으면 한쪽 귀를 세우고 있지 않았으면 못들을 정도로.


"당장 자자!"


그러더니 이번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빼액 소리를 질러댄다.


"...지금 말입니까?"


"덤으로 나도 좀 같이 자는 걸로."


여기서 잔다라...


음... 어쩌지.


이 집에 오게 되었을 때 나는 그저 일하기 적당한 거리에 있는 집을 구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그러니까 내가 생활하는 데 있어 최소한만이 있다면 충분했다.


덕분에 들어가는 비용도 최소화한다고 가구를 줄이고 인테리어나 꾸미는 것조차 하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안을 보고 황량하다 말할 정도였지.


거기다 그 이후로도 별다른 취미도 가지지 않아서 늘어나는 물건도 없었기에(맥주 캔 박스는 제외하고) 여전히 내 집은 황량한 채로 그대로 변한 게 없다.


그러니까... 애초에 집에 손님이 온다는 전제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


...어쩔 수 없나.


아무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손님을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선 내 침대를 내주고 내가 바닥에서 자는 것이 맞겠지.


"그럼 일단 정리를 하겠습니다."


잘 곳을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이 났으니 이제는 일을 마무리할 때다.


나는 치킨 박스와 맥주캔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치킨은 먹을 때는 좋지만 끝나고 나서 뒤처리가 귀찮단 말이지.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뼈가 없는 걸로 시키면 맛이 달라져 버려서 곤란하다.


나는 작은 봉투에 뼈들을 담고서 상자를 적당히 접어 분리수거를 위해 옆으로 치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캔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버린 맥주캔. 하지만 그 위치는 테이블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


자연스레 나는 위로 올려다보고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빈 캔들을 한 아름 들고 어떻게든 옮기려 하고 있는 유서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낑낑대며 최대한 조심스레 움직이던 유서아는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었다.


...


제발 저러다 죄다 쏟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


"크네..."


내 여분의 잠옷을 입고서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유서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사이즈가 한참은 웃도는 잠옷 덕에 거의 어린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아니면 그 남편 와이셔츠라고 하는 그런 모습이거나.


"왜, 왜 그래?"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자 유서아는 조금이지만 얼굴을 붉히고는 양손을 가슴 쪽으로 모았다.


"아닙니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호소하듯 고개를 돌렸다.


아까 우리 집에 올 때는 거의 복장을 풀어헤친 채로 있더니 이런 건 부끄럽긴 한 건가.


사실 내가 보기에도 조금 그런 모습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옷이 우리 집에서 가장 작은 옷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발육이 좋았다.


학교에서는 항상 줄을 서면 맨 앞이나 맨 뒤였고 이따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 나이를 몇 살 위로 착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샌가 내 키는 남자 평균 키를 초월해 버렸고... 이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전부 내려다보게 될 정도가 되어 버렸지.


당연히 그런 내가 입는 옷이 여자 평균 키에 가까운 유서아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저 방에 침대가 있으니 거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그래?"


다른 사람을 내 침대에 재우는 것은 조금 걸리는 부분이지만 청소도 매일같이 하고 빠지는 털들도 수시로 관리했으니 자는 데 문제는 없을 거라 본다.


유서아는 중요한 곳을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내 방문을 열었다.


"방에 아무것도 없잖아?"


"딱히 물건을 두는 취미는 없거든요."


왠지 언젠가 했었던 것 같은 대화에 데자뷔를 느끼며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는 유서아를 뒤따라 갔다.


"호오..."


모던이라는 명목으로 아무 무늬조차 없는 단색의 이불이 덮인 침대.


가끔 집에서 서류를 봐야 할 때 쓰기 위해 놔두었던 사무용 책상.


이런 별다른 색조차도 없이 한없이 무채색인 공간에 유서아가 들어오니 마치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한 점 찍은 느낌이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유서아는 곧바로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침대에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서 한쪽 면을 손으로 슬쩍 들어 올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


"아, 알았어. 장난 안 칠게. 그런 표정 짓지 마."


내 표정이 어떻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지는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몸을 떨고 있을리 없으니까.


나는 한숨이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고 다시 방문을 열었다.


"그럼 저도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어? 여기 안 오는 거야?"


유서아는 마치 내가 그곳에 눕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침대는 팡팡 두드렸다.


...나도 같이 자라는 건가.


고개를 돌리자 눈을 마주친 유서아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다시 침대를 두드렸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


...


...


...음.


나는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침대는 1인용이라 둘이 자기엔 부적합합니다. 저는 거실에서 자겠습니다."


"우음... 그래. 잘자."


밋밋한 반응.


단번에 눈치챌 정도로 어딘가 무척 다운되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몇십 년이 되었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남자였던 시절의 나를.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여자가 되었어도 이런 관계에는 여전히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양심에 찔렸다.


몸이 달라졌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다. 아무리 내가 여자여도 정신만은 남자니까.


그러니 거리를 재지 못하는 상대방 대신 내가 직접 간격을 벌려줄 뿐이다.


"안녕히 주무시길."


나는 짤막한 말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