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애정결핍 늑대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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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눈을 떠보면 보이는 풍경이 낯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내 방의 천장.


…왜?


그제서야 나는 잠결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한 밤중에 유서아가 난데없이 집으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적당히 술을 한잔 한 다음 손님이었던 유서아는 침대에, 나는 소파에 누워 잠에 들었을 것이다.


근데 왜 내가 보고 있는 건 내 방의 전등일까.


그런 의문은 어렵지 않게 해소 할 수 있었다.


내가 애초에 내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익숙함이 드는 만큼 느껴지는 위화감에 눈을 번쩍 떴다.


부정하고 싶은 일말의 섬뜩함에 나는 반사적으로, 또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너무나도 붉은색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유서아 였다.


“…”


방금 전 일어난 상황이라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분명 소파에 있었을텐데 언제 침대로 온 걸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유서아가 내가 잠든 사이에 침대로 끌고 온 것이다.


더구나 좁은 침대에서 최대한 같이 자기 위해 옆에 꼭 붙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자고 있는 유서아를 보며 그녀가 깨어나지 않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아.”


피곤한 사람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면 보통은 알아서 거리감을 유지하는데 유서아는 오히려 다가오려고 했다.


여러모로 붙임성이 좋아서 그런가.


그렇다기엔 같은 팀의 홍연 쪽이 더 그런 부류에 속하는 느낌이다.


그 사람은 임무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을 만나러 다니기 바빴으니까.


나는 조용히 내가 빠져나오면서 걷어진 이불을 유서아에게 덮고서 거실로 나왔다.


몸을 가볍게 씻고 히어로 정규복을 챙겨 입는다.


그 사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꼬리털을 정돈한다.


나갈 준비를 완벽히 끝내고 나서 나는 그제서야 거실에 서서 내 방을 바라 봤다.


아침은… 어쩌지.


평소에는 딱히 아침을 챙겨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잠을 더 자거나 다른 일을 할 때가 더 많았지 그렇게 규칙적이고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서아는?


아무리 멋대로 온 사람이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었다.


그런데 아침도 안먹이고 집에서 내보내는 건 실례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그대로 주방에 들어가 찬장을 열었다.


가끔씩 아침을 먹을때면 먹는 시리얼.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유서아가 일어나면 먹기엔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이러면 내가 나갔을 동안 알아서 먹고 나가겠지.


식탁에 시리얼을 놔두고 적당한 그릇과 숟가락을 꺼내 같이 옆에 두고 나는 나갈 준비를 했다.


++++++++++


“…여기까지가 임무내용입니다.”


“알겠습니다.”


“보수는 각각 지정된 계좌번호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히어로 협회의 사람과 이야기를 끝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깍듯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눈 앞의 협회 직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서 지나갔다.


오늘 할 일은 이게 끝인가.


새로운 임무도 확인했고 이전에 했던 임무의 보수도 받았다.


추가로 이야기를 해야 할 안건도 없으니 오늘 스케줄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오랫동안 앉아있어 찌뿌드한 몸을 스트레칭하고서 여태 무음으로 되어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스마트폰 화면에는 무난한 모양의 고딕체로 2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몇시간 더 있을 법도 했는데 이야기가 순탄하게 되어 오히려 시간이 비어버렸다.


“음.”


그나저나 이건 뭐지.


이런 일은 딱히 없었는데.


나는 시간을 보고 나서야 스마트폰 대기 화면을 알림창이 가득 채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에서 스팸메일이라도 온 건가.


이렇게까지 알림이 채워질 정도라면 내 개인 정보가 어딘가 엄한 데로 팔려 나갔나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문 인식을 해본 나는 의외의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유서아 - 부재중]


[유서아 - 문자]


[유서아….


여태 온 알림은 대부분이 유서아의 작품이었다.


그 마저도 대부분 아침 시간대인 걸 보면 내가 밖을 나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모양이다.


여러 건의 부재중 전화 사이로 남겨져 있는 문자 메세지들.


그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시리얼만 놔두고 왜 말도 없이 떠났냐.

깨우지 않고 가면 어떡하냐.


전체적으로 자신을 놔두고 떠난 것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이미 충분히 나이를 먹었으면서 외로움이라도 타는 건지.


거기다 마지막으로 보낸 메세지에 적힌 문구도 무척 신경이 쓰였다.


[돌아올때 연락해! 배달 시킬테니까!]


배달을 시킨다니.


자연스럽게 내 집에 눌러앉아서 있을 셈이잖아.


이럴거면 그냥 처음부터 깨워서 시리얼을 먹이고 내보낼 걸 그랬나.


적어도 그랬으면 잠에 취해 있는 유서아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일단 답장은 해줘야 겠지.


머리 구석에서 미약하게나마 흘러 들어오는 후회를 치워내고 나는 액정에 떠오른 키보드를 두들겼다.


[지금 끝났습니다.]


유서아가 쓴 문자의 양에 비하면 빈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짧고 간결한 답장이었다.


더 뭐라 쓸 말도 딱히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메세지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서아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일은 끝났어?


“네. 다음 임무 정보도 받았으니 자세한 내용을 팀 채널에 올려 두겠습니다.”


-칫, 쉴 틈을 안주네 협회 녀석들.


“…”


-그래서, 지금 바로 오는 거야?


“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바로 갈 생각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평화로운 분위기를 되찾았어도 차원을 찢고 들어는 몬스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히어로는 그런 몬스터나 범죄자가 나타나면 최우선 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게 히어로의 업무이자 의무니까.


아무리 전투를 기피한다 해도 최소한 히어로 정규 복장을 입을 때 만큼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도 딱히 일에 불만은 없다.


일단은 생명이 걸린 만큼 돈을 많이 주기도 하고, 직업 특성상 그렇게 인식이 나쁘지 않은 직업이었다.


더군나나 손님접대나 가게관리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하는 내게 그나마 괜찮은 조건의 일자리이기도 했고.


-혹시 먹고 싶은 건 없어?


머릿속으로 잡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유서아가 질문을 던졌다.


“아뇨.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흐응, 알았어. 내가 알아서 정할게.


“…”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그럼 올 때 양주 하나만 사올래?


“양주 말입니까.”


-적당하게 위스키 정도면 어때? 토닉 워터까지 해서.


이 사람, 대낮부터 하이볼을 마실 생각인가.


쉬는 날이랍시고 내 집에서 빈둥대고 있으면서 취향 한 번 고풍스럽다.


…뭐.


사실 나도 가서 맥주캔이나 딸 생각이긴 했지만.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부탁해!


한껏 신이난 목소리로 부탁을 하고나서 통화는 종료됐다.


남의 집에 와서 이틀내내 술판을 벌이다니.


참,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적당히 집어 넣고서 숨을 한번 크게 심호흡했다.


일단 편의점에 들러볼까.


…..


….



..


.


위스키와 토닉 워터를 샀다.


덤으로 하이볼에 쓸 얼음도 챙겼다.


아무래도 그냥 먹는 것보단 얼음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 있는 정수기에도 얼음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런 금방 녹아버리는 걸 괜히 집어넣었다간 차가워지기는커녕 밍밍한 술맛을 봐야한다.


아무리 아무 술이나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건 포기할 수 없었다.


“으음…”


하지만 그 덕에 생각보다 양이 많아졌다.


편의점의 봉투는 작은 사이즈라서 토닉워터와 얼음까지 집어 넣으니 결국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으니.


이렇게 되니 조금 눈치가 보인다.


양손에 한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다니는 게 술에 눈이 돌아간 사람처럼 보일까 조금 걱정된다.


그나마 다행인건 집 앞까지 오면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일까.


대문을 열자 안에서 기름진 냄새가 확 풍겨왔다.


벌써 음식 배달을 시킨 건가?


“어? 왔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유서아가 놀란 듯 달려 왔다.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에 어딘가 급해보이는 모습.


“그 앞치마는…”


유서아를 보자마자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앞치마였다.


무척이나 낯이 익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 그런 무늬.


저걸 어디서 봤었지?


“자자, 거기 서있지만 말고 일단 들어와!”


가물가물한 기억을 꺼내려고 눈을 굴리고 있으려니 유서아는 내 손목을 잡아 안쪽으로 당겼다.


마치 자기 집에 나를 초대하는 양.


“아.”


그리고 금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샐러드 같이 누가봐도 가격이 나가 보이는 메뉴들로.


꽤나 먹음직스러운 향이 코 끝을 스쳤다.


방금 전의 기름 냄새는 이것이었나보다.


“갔다 오는 동안에 만들어 봤어. 장도 좀 보고. 어떻게 냉장고 안에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어?”


어차피 밥을 해먹을 바엔 적당히 배달을 시키는 편이 편리했으니까.


괜히 직접 해먹으려 해도 손이 많이 갈 뿐더러 남은 재료들의 처리도 곤란했기에 어지간하면 재료를 잘 채워넣지 않은 편이었다.


“뭐, 그건 됐고 일단 자리에 앉아 식겠어.”


유서아가 내 등을 밀며 자리에 않길 재촉했고 나도 굳이 서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마주 앉았다.


이제보니 접시 옆에 각자 하이볼을 해먹을 잔까지 준비되어 있다.


이런 건 준비성이 참 철저하구나.


유서아는 내가 가져온 봉투에서 내용물을 하나씩 써내 테이블 옆에 세워두었다.


위스키 한 병과 그 한 병을 전부 채울만한 양의 토닉 워터들. 그리고 혹시 몰라 사두었던 얼음까지.


방금까지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한 곳이었다면 저것들을 놓은 것 만으로 펍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고나자 유서아가 가장 먼저 집어든 건 위스키였다.


역시 아무리 음식이 제대로 되어 있어도 가장 큰 관심사는 술인가.


“비율은 어떻게 마셔?”


“…무엇을 말하시는 겁니까.”


“하이볼 말이야. 몇 대몇 으로 섞는 게 좋아?”


“저는 각각 절반씩으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반반? 알았어.”


유서아는 능숙하게 병을 따고 잔에 위스키를 담았다.


나 만큼이나 술을 자주, 그리고 잘 마시는 그녀는 이런 식의 칵테일도 익숙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본격적인 칵테일 레시피도 아닌 술과 음료수 2개를 섞을 뿐인 간단한 것임에도 왠지 손길에서 능숙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근데 생각보다 위스키 비율을 높게 마시네. 이렇게 마시면 세지 않아?”


“조금 목이 타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만 위스키의 비율이 적어져서 향이 옅어지는 것보단 낫습니다.”


“흐응, 향이 그렇게 중요한가봐?”


“아무래도 이능력 특성상 냄새에 민감해서요.”


“흐응…”


유서아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둠에서 한줄기 빛을 찾은 떠돌이처럼.


“향이라…”


그리고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는 유서아의 모습에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울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