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워낙 뜬금없는 발언이었기에 무심코 튀어나온 반말.


그에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눈앞의 여자를 본 순간, 나는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참석조차 하지 않았을 무도회.


다만 하도 사교활동을 등한시하고 온갖 핑계를 대며 튕긴 탓에 황제의 눈밖에 나기 직전이었기에 좋지 않은 감을 뒤로하고 억지로 참가했건만.


일부러 다가오지 말라는 뜻으로 살기를 풍기고 있던 내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이 여자의 춤 신청을, 마침 황제가 바라보고 있던 탓에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레이나 폰 테넌트, 였나.'


테넌트 남작가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골 변방의 귀족가 출신 영애.


실제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듯 기품은 있으나 낡은 티가 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 외모만큼은 여느 영애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가 춤을 시작하자마자 던진 말은 여전히 내 머릿 속을 맴돌고 있었다.


'내 비밀을 알고 있다? 제도 상경조차 처음일게 뻔한 이 시골 변방의 귀족 아가씨가?'


이래뵈도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조차 한 수 접어준다고 자부하는 바라크 대공의 작위를 이어받은 몸이다.


물론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수많은 뒷공작과 더러운 수단을 사용해오긴 했지만, 그건 귀족들 사이에서 약점 축에도 못 끼는 정도.


백번 양보해서 그 비밀을 알고 있다고 그 본인 앞에서 내가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뻗대는 건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는 바.


도대체간에 이 당돌한 영애가 안다는 내 비밀이 뭘까 궁금해지던 찰나였다.


"다른 분들은 대공 각하의 외모를 보고 멋지다, 라고 하곤 합니다만. 제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여요."


아주, 아름다우신 분으로 말이죠.


그러면서 그 행동이 무례임을 모른다는 듯 내 전신을 훑어보는 레이나.


특히나 가슴께에 집중된 그 야릇한 시선이 올라와 나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있다는 내 비밀에 대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 남장을 눈치챘다고?'


그것은, 지난 10년 간 목숨을 걸고 지켜온 비밀.


전생에 남자였으나, 이세계에 여자로 태어났고, 스스로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시 남장을 해야했던 기구한 삶.


그 비밀이 알려지는 순간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내 머릿 속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직 아티팩트는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어. 이 여자의 정체가 뭐든, 그걸 꿰뚫어보려면 마탑의 그 노망난 할망구정도는 되어야-'


"어머나, 철혈이라는 이명이 울겠어요. 이렇게나 동요를 드러내시고."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군요, 영애. 즐거운 장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하기엔 질 낮은 농담입니다."


"후훗,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께서 숨기신 본모습을 다른 이에게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는 레이나와의 춤이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이를 때 쯤.


"대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으니, 이 춤이 끝나면 3층의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늦으시면 안 돼요, 이브?


누구도 알지 못해야 할 내 진명까지 흘리며 등을 돌린 채 떠나가는 그녀.


그런 그녀를, 나는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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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또각-


한창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퍼질 무도회장에서 나온 후.


모두의 시선에서 벗어난 어느 시골 출신 영애의 발걸음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기품을 유지했던 것이 거짓이라는 듯 흐트러지더니 그대로 멈춰섰다.


그러고는 풀썩 주저앉아버린 그녀.


레이나 폰 테넌트.


전생에 이시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자는 그제서야 억지로 유지하던 긴장감을 풀어놓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제대로 한 거, 맞겠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자신이 마치 대단한 한 수를 준비한 백전노장의 귀족인것마냥 행세를 하다니.


심지어 상대가 그 바라크 대공이었다는 점에서, 말을 절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스스로를 마구 칭찬해주고 싶은 그녀였다.


"이게 뭐냐구...어차피 빙의할 거 여주인공에 시켜주든가, 아니면 악역 중에서도 좀 높은 귀족한테 해주든가!"


그렇다.


그녀의 정체는 빙의자.


언니라는 성격파탄자년이 자기 망상을 마구 풀어낸 똥망 로판 소설에, 자신을 모델로 삼아 만든 허접 삼류 악역영애의 몸에 빙의한 불쌍한 인생이었다.


원작에서 그녀가 빙의한 레이나는 소설 속 최고의 악역영애라고 할 수 있는 후작영애, 테리사 폰 아스티아의 따까리의 따까리로 등장하는 엑스트라.


여주인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테리사의 기분을 풀어준답시고 여주인공에게 깝치다가 곧장 털려버리고 정작 그 테리사에게도 버려진 채 두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 진짜 허접 그 자체인 인물이었다.


참고로 테리사는 언니 본인의 망상을 투영한, 자캐였다.


"아오, 그 망할 년. 감평 좀 해달라고 지랄을 떨길래 좀 봐줬더니 빙의를 시키다니!"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혼자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결되지 않는 법.


이미 온갖 로판을 숱하게 섭렵해온 그녀는 곧장 정석적인 빙의자 행복 라이프 계획을 세웠다.


그게 바로 계약결혼.


조금 전 자신이 던진 미끼를 물고 찾아올 바라크 대공에게 할 예정인 부탁이었다.


분명 보통의 로판이라면 짱짱한 남주의 재목인 대공이지만 결국 여주인공과 이어지지는 않는 신비한 캐릭터.


그 정체는 남자만이 가능한 작위의 승계를 위해 남장을 한 여자라는 사실을, 빙의자인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원래라면 여주인공이 주인공 답게 재능빨로 그녀가 사용한 아티팩트를 간파해서 정체를 알게 되고, 이후 친절한 조력자로서 여주인공을 돕게 되는 인물이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솔직히 원작에서 에반 폰 바라크, 아니 이브 폰 바라크는 그야말로 호구 그 자체였다.


정체 좀 밝혀지고 여주가 좀 잘 해줬다고 아주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듯이 떠받들어주다니.


그리고 여주는 여주대로 좋다고 그걸 다 받아처먹는 양심출타한 인간이었으니.


"어차피 호구짓 할거면, 내가 조금만 받아가도 되는거잖아!"


그녀는 이 나라 최고위 귀족인 대공. 해봐야 몇 년 계약결혼 하고 약간의 재산만 받아 독립할 예정인 자신에 비하면 여주는 아주 쓰레기 중의 쓰레기 일거라고.


그리 다짐한 이시아. 이제는 레이나 폰 테넌트가 된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찾아올 대공을 기다렸다.


"그래, 어차피 인생 한방이야. 상대는 여자니까 어디 로판 빙의 여주들처럼 반해서 헬렐레거릴 일도 없고! 난 그냥 몇 년동안 아내인 척 하면서 원작 지식 좀 풀어주면 그만이야!"


여자니까 여자에게 반할 일 따위는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자신의 미래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빙의자는 수년 후의 미래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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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장대공틋녀랑 빙의영애시아 보고싶다.


오랜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