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드디어 악당 기지에 왔다


*


"그륵, 크르르."



실험체인 개 한마리가 몸이 붉어졌다.


곧이어 주둥이에서 불을 토해냈다.



"캬악."


"엄마야!"



나는 놀라서 샥 피했다.


자기한테 기대는 걸 보고 막내가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러니까 남자 취급을 못 받죠."



흥. 그 망할 놈의 헛소문, 믿던가 말던가.


어차피 지금은 여자니까 타격 없다 뭐. 흥. 흥.



"저, 저건 뭐에요?"


"말했잖아요. 다른 종족이랑 주물럭주물럭해서 만든 연구 실험체라고."


-쟨 주둥이에서 불 뿜는 꼴 보니 무스펠이네 먀.



무스펠이 뭐냐고 질문하면 화내려나.


슬쩍 눈치를 살폈더니 여우가 불의 거인이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것도 모르냐는 둥 면박을 줬을 텐데.



"여우 성격 많이 좋아졌네."


[음?]


"아무 것도 아니야."



무스펠 어쩌고 외에도 여러 케이스가 있었다.


몸집을 갑자기 거대화시켜서 덤벼드는 원숭이라던가.


환영을 부리는 호랑이라던가.


단순히 몸 자체가 무식하게 튼튼한 산양이라던가.


이게 다 실험체란 거지?


실험 참 많이도 했네.



"끝이 없는데요?"



아무리 쓰러뜨려도 끝나질 않았다.


더구나 대부분 맷집과 회복력이 좋아서 한번 쓰러뜨려도 벌떡 일어서곤 했다.


예상보다는 약해서 전투도 할 만했지만, 수가 이다지도 많아서야 곤란하다.


소녀가 흘러내리는 고깔 모자를 치켜올렸다.



"선배 먼저 가세요."


"네? 혼자서 싸우려고요?"


-혼자라니 먀. 나도 있는데.


"이곳 정리되면 저희도 따라갈 게요."



몇차례 실랑이를 벌였지만 고깔 모자 소녀의 뜻이 확고했다.


나와 여우는 그녀의 계획에 따랐다.


한방향으로만 뚫고 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꺼져버린 유리바닥을 대신하여 발을 디딜 수 있는 발판이 있었다.


벽에 박힌 채, 공중에 불안정하게 떠있는 발판.


크지는 않아, 발을 내딛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발판을 따라가니 작은 방이 나왔다.


방 안에는 비정상적인 크기의 가재 시체가 몇구 있었다.



[게르만 땅에서 봤던 놈들 같다.]


"그럼 그 가재들도 여기서 연구하고 만들어서 풀어둔 거란 말이야?"


[아니, 여기 있는 것들은 그렇게 풀어뒀다가 회수된 놈들이겠지.]



여우가 가재의 발을 가리켰다.


가재 발에는 진흙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전투 도중 가재가 귀신 아저씨를 납치해갔다던, 발키리의 목격담이 떠올랐다.



"가재들이 여기로 회수된 거면 아저씨를 데려간 가재도 여기 있겠네."



그럼 아저씨도 여기 있겠고.


당초에 이 마을 왔던 게 아저씨 성불시켜주려고 온 거였으니까 돌고 돌아서 어찌어찌 도착은 한 셈이었다.


정작 성불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는 아직도 감이 안 잡히지만.


방을 나와 더 걷다보니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위층은 바닥이 멀쩡하여 걷기 편했다.


걸음걸이에 안정감이 있으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위층은 아래층처럼 큰 홀을 연구실로 쓰거나 하진 않고, 단지 긴 복도에 방이 와다다다 박혀있는 구조였다.



"와다다라니, 막내한테 옮았나."


[뭐가.]


"혼잣말한 거야."



어느 방부터 살펴봐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둘러본 바, 소장실이라고 팻말을 달아둔 방이 있길래 이거다 싶어 들어갔다.


내부는 휑했는데, 독특하게 생긴 전등 아래 1인용 책상과 의자만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외로워보이는 책상 앞에는 흰 가운의 안경잡이 여성이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강 팀장님,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시라니깐요.

제가 넉살이 좋아서 넘어가는 거지, 깐깐한 사람이면 화낸다니까요."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것치곤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어투였다.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것치고도, 감정기복이 없는 어투였다.


내가 아무 반응을 않자, 바삐 움직이던 여성의 펜이 돌연 멈추었다.



"뭐에요. 안 웃으면 뻘춤한데."



농담 던진 거였어?


방금 대사에서 어느 부분이 개그였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게임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저, 그, 강팀장 아닌데요."



그보다 북유럽인데 강씨 성이 있어?


애칭인가?


여성은  그제서야 서류에서 눈을 뗐다.



"당신은...."



여성이 흘러내리려는 안경을 치켜올렸다.



"발키리?"



날 마주본 여성의 얼굴은, 꼭 사진으로 봤던 그 얼굴이었다.


우리 막내 점원이 언급했던 예의 '언니'.


이 게임의 히로인 중 하나.


마법소녀, 소냐.



"네. 저랑 얘기 좀 할래요?"


"전 당신이랑 할 얘기 없어요, 동생의 원수."



여성은 다크서클이 낀, 피로한 눈으로 날 적대했다.


그보다 동생의 원수라니. 한번 혼쭐낸 거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일하면서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무하네.


여성이 책상 밑에서 길쭉한 막대를 꺼냈다.



"변신!"



그녀의 몸이 검게 변하였다.


땅에선 한순간 흰 빛이 일렁이더니 검게 물든 그녀를 집어삼켰다.


흰 빛과 검은 빛이 어우러지다가 사그라들자, 그곳에 검은 로브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의 머리에는 고깔 모자가 얹어져있었는데, 일견 동생과의 혈연관계를 암시하는 장치처럼도 보였다.


전통적인 마녀의 의상과 닮아있지만 군데군데 흰색 고양이 캐릭터가 박혀 있는 점과, 치마가 프릴이 달린 미니스커트란 점에서 마법소녀의 인상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여성은 빗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그보다 저게 뭐야!


멋지잖아!


나도 저런 멋들어지는 변신 과정 줘!


왜 나는 손바닥 탁치면 뿅하고 변신하고 끝인 건데!


이건 불공평해!


쟨 히로인이라서 그런 거야?


나도 히로인이잖아!


정확하게 따지면 히로인 (남자) 지만서도....


아니, 지금은 남자도 아니잖아! 그냥 히로인 맞네!


나도 저런 근사한 변신 과정 줘!



"여, 여우야."


[뭐냐? 꼬맹이.]


"나도 저런... 화려한 변신 할 수 없어?"


[마력 낭비다! 미개한 요정들이나 할 법한 발상을....]



여우가 혀를 찼다.


저번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여우는 '미개한 요정'이란 캐치 프레이즈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냥 솔직하게 해주기 싫다고 하면 어디 덧나나? 치.


책상 밑에서 흰 고양이가 밍기적 밍기적 기어나왔다.



-전투여 냐? 오랜만이구만 냐아.


"전투 아니에요."



가급적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동생이 부상 없이라고 조건을 걸었잖아.


싸우다보면 부상 없이라는 건 힘들다고.



"전투 맞아요."



저쪽은 나와 다른 의견이었다.


눈치가 없네!


여성이 빗자루를 움켜쥐었다.


빗자루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더니 허공에서 액체가 생성되었다.


녹색 빛깔.


닿으면 유쾌할 듯 보이진 않았다.


둥실둥실 떠 있는 녹색 물줄기는 여성이 빗자루로 날 가리키자 곧장 내게로 날아들었다.


응당 무반동포를 소환한 나는, 포탄으로 쏴서 떨구려했다.



[바보야 피해!]



여우는 날 밀쳤다.


녹색 액체는 여우가 맞았다.



[으윽.]



치이이- 하며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염산 같은 것일까.


다행히 여우가 재빨리 몸을 털어, 크게 다치진 않았다.



[실내에선 못 쏜다고 했잖냐 멍청아!]



나는 속으로 놀랐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뿐이지, 여태 여우의 됨됨이에 대해 '오만 깐깐 건방' 정도로 여겨왔는데.


그 여우가 한 몸 던져 날 구해준 거다.


말이야 험하게 했지만.



"그, 그랬지 참.

미안해. 잊고 있었어."


[포탄은 못 쏜다.

차라리 간단한 마법으로 막아!]



여우는 그리 쉽게 말했지만 간단한 마법이라 한들, 문제는.... 



"나 마법 못 쓰잖아."



전투 중에 쓸 정도로 숙련도를 쌓진 않았단 점이었다.



[지금 필요하니까 바로 익혀.]



여우의 주장은 터무니없었다.


무리무리. 그런 거 무리.


시험삼아 눈을 감고 마법을 써보려했다.


아니나다를까,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새에 적 마법소녀가 산을 날려 방해하였다.



'치이이'



산에 닿은 방의 벽면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시는군요."



히로인하기엔 살벌한 능력이었다.


난 저래서 저 히로인 별로 안 좋아했다.


퍼스널컬러도 핑크가 뭐야 핑크가. 천박하게.



"하양아."


-그려. 알았어 냐아.



여성이 부르자 흰 고양이가 술법을 부렸다.


발치에 찬물이 쏟아지고 발이 질척질척해졌다.


여성이 빗자루로 다시 마법을 쓰려는 찰나, 여우가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


고양이가 여우의 박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지자, 질척거려 움직이기 힘들던 발밑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성의 마법이 이미 준비된 후였다.



"얼음."



그 한마디로 머리 위에서 사면에서 수많은 고드름이 덮쳐왔다.


피해도 피해도 날 쫓아오는 고드름이었다.


아이 따거워.


홧김에 여우가 한 말도 잊고 무반동포의 방앗쇠를 당겼다.


전등의 불빛을 받은 포신은 '지지직'하는 기계음을 내더니 포탄을 발사했다.


포가 일으킨 돌풍에 방의 한쪽 벽이 허물어지고 고드름이 전부 날아가버렸다.


무의식 중에 한 짓이었음에도 어리둥절해져 여우를 바라보았다.



[뭘봐. 난 아무것도 안 했다.]


"네가 도와준 거 아니야?"


[그래.]



여우도 눈이 쟁반만 해졌던 거 보면 진실인 듯했다.


공격을 멈춘 건 적 마법소녀와 요정도 마찬가지였다.


내 화력에 놀란 얼굴이었다.


모두 뇌가 정지하여 느닷없이 찾아온 평화.


여우가 전등을 올려다보다가 소리쳤다.



[알겠다! 이거 인조 자외선이구나.]


"자외선이면 뭐가 다른데?"


[태양광이랑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잖냐 꼬맹이!]



방주인인 마법소녀의 표정을 살펴보니, 여우의 통찰이 정답인 듯했다.



[막 쏴.]



쏠 수 있구나!


신나서 질러버렸다.


마구 질러버렸다.


쾅 콰앙 쾅쾅.


무슨 마법인지 자꾸만 날 구속하려 들길래 그것도 한방.


액체도 또 날리길래 그것도 한방.


방은 금새 쑥대밭이 되었다.



"무식하게 화력만 강하시군요."



여성은 내 화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던 건지 다른 수를 취하려했다.


품에서 약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그것도 산인가 보죠?

얼마든 던져 봐요. 포탄으로 격추시킬 테니까."


"안 던져요."



여성은 약병의 내용물을 입에 털어넣았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거 맛있어요?"


"맛있는지는 않고, 맵네요.

얼마나 매운지 혀에-."



여성이 입술을 씰룩였다.


여성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감이 안 좋은데.



"불이 붙은 느낌이에요!"


'화악'



여성이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이거 방금 그... 실험체 괴물이 쓰던-." 


"무스펠 종족은 연구가 끝났으니까요.

따끈따끈한 종족이라 해부할 때 고생 좀 했죠."



여성이 병 하나를 더 꺼내 뚜껑을 땄다.


저것도 비슷한 종류인가?


마시게 뒀다간 큰일이 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포탄을 쐈다.



'콰앙!'


"약 정돈 마시게 두지, 너무하네요."



여성이 한 손을 앞으로 뻗자 쭉 펼친 손바닥이 붉은색 액체로 변모했다.



"저건... 용암?"



용암치고 전해지는 열기가 약했지만 생김새는 꼭 그러했다.


유사 용암은 북유럽의 찬 공기와 닿아 차갑게, 검게 식었다.


이윽고 흑색의 말랑한 고체로 굳은 용암은, 푹신하게 포탄을 받아냈다.


여성은 그새에 약을 흡입했다.



"아유 써."



어느새 두병째 약물을 마신 여성.


여성의 등 뒤로 잠자리의 그것을 닮은 한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역시 날개는 한쌍 뿐이네요. 엘프 연구는 진척이 안 나가니 원."


"엘프?! 엘프를 연구했단 말이야?"



나는 놀라서, 이때까지 유지하던 존댓말도 버리고 말았다.



"그래요. 알브헤임에 사는 요정들.

저나 동생이나, 꽃집의 소녀에게 붙어있는 종족이죠."


"그건 나도 알아! 우리 여우 같은 애들이잖아.

너, 엘프를 연구했다 했지?

방금 무스펠을 연구할 땐 '해부했다'고 표현했잖아.

해부 없이는 연구할 기술력이 없단 거잖아.

너, 마법소녀면서 살아있는 요정을 해부했단 말이야?"



인게임에서, 히로인은 소냐는 마법소녀란 캐릭터성에도 불구하고 간혹 잔인한 면모를 보이곤 했다.


야심을 위해서 적이나 엑스트라에게 잔혹하게 굴곤 했다.


그렇대도 자기 주변인과 관련이 있는 경우엔 한없이 헌신적이던 캐릭터가 이 히로인이었는데....


마법소녀 소냐는 특유의 고저차가 없는 어투로 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첫째, 저는 살아있는 요정을 해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체가 이곳저곳에 널려있었거든요."



여성이 잠자리 날개를 펄럭였다.


날개가 얇고 투명한 것치곤 자못 거센 바람이 불었다.


나는 날아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느라 고생이었다.



[갈!]


"아그그윽...!"



여우가 꾸짖자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여성의 날개를 태웠다.


빛은 출발점을 더듬으니 태양이었다.


햇빛이 밖에서부터 벽을 뚫고 천장을 뚫고 들어온 것이었다.


여성이 빗자루를 쥐자 날개의 구멍난 부분에서 검은색 기포가 올라왔다.


기포는 여성의 날개를 천천히 재생시켰다.



"둘째... 알브헤임의 요정은 저런 짓 못합니다.

당신은 왜, 저 요정이 당신과 함께 다니는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이간질하려는 거야? 안 속아!

그러는 너야말로 왜 네 요정이랑 같이 다니는데!"


-난 저 애가 좋으니 같이 다니는 것이여, 냐아.

시스콤 자매의 언니, 얼매나 보기 좋아? 냐아.


"저흰 단순합니다.

알브헤임이 대화재로 타버렸으니, 하루아침에 멸종위기종이 되어버린 엘프를, 연구를 통해 복원할 것.

이것이 하양이의 목적이었죠.

제 목적은 더 간결하죠.

괴수에게 홀로 맞서다 사망한 누군가의 영혼을, 계속 제 곁에 두는 것이 제 목적이니까요."



어쩐지 그녀의 설명에, 나는 우리 가게의 신입 점원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신입 점원의 목에 새겨져있던 へ자 문양이.


여우는 곁에서 움찔하여 소리쳤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라 아둔한 것!]



여우의 외침은 이내 그쳤다.


마법소녀의 흰 고양이가 여우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어떻죠?

당신 아스가르드에서 왜 여기로 왔죠?

당신의 여우는요?

당신의 여우는 뭐고, 왜 당신을 좇아왔죠?"


"우리도 간단하거든?

아스가르드의 왕이 바나헤임으로 가래서 왔어.

가서 바나헤임의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했거든."



난 아스가르드의 발키리 서임식에서, 어쩐지 날 꿰뚫어보는 듯한 신왕의 모습에 감명받았다.


신왕의 임무를 성공하면 상을 주겠단 약속에, 이 자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거라면 집으로 보내달란 부탁도 들어주지 않을까 하고 수락했다.


넋 놓고 있다가 남자주인공과 미연시를 찍게 되는 루트를 삼가고 싶었다.



"그리고 여우는-."



여우는.


여우는....


여우는.


여우는 뭐지.


여우는 왜 나를 따라왔지?


귀신 아저씨가 일찍이 이리 말했다.


'바나헤임까지면 멀리 돌아가야지 않겠나.'


조금 먼 거리는 아니란 뜻이었다.


여우는 어째서 날 따라왔지.


여성은 망설임이 생긴 내게 회색 액체를 퍼부었다.


그걸 맞은 나는, 액체가 응고하자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석고인가. 이거 쓰려고 정신 흔들어놓은 건가.



"쉬이 그럴 듯한 답이 안 나오나보네요."



여성은 내 마음에 생긴 망설임에 답해주었다.



"제가 답해드리죠.

저 여우는 스바르트 알프, 검은 엘프입니다."



검은 엘프? 다크 엘프?


다크 엘프라. 창작물에서 종종 들어봤다.



"땅 아래에 사는 금발에 태닝 키 큰 섹시 양아치 종족?"


"아닌데요."



아니었어? 머쓱하네.



"아스가르드에는 자료가 없으니 모를 만하죠.

원체 동맹국의 안녕엔 관심이 없었으니.

저도 에린 땅의 기록을 보고야 알았습니다.

무덤 아래에 사는, 한때 신이었던 이들이 힘을 잃은 모습입니다."


"흥, 궤변은.

아스가르드엔 힘을 잃을 신도 없어.

대다수가 죽고, 살아남은 신은 몇 되지도 않던데."


"아스가르드는 그렇겠죠.

바나헤임의 신이니."



바나헤임?


내가 임무 받았던 거기 아니야?



"축하드립니다. 바나헤임까지 갈 필요도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바나헤임의 신도 전부 죽어버렸으니까요.

살아남은 극소수만이 저렇게 검은 엘프가 되어, 지하에 숨어 근근이 연명할 뿐이니까요.

한때 아스가르드의 우군이던 바난 신은 오딘이 자초한 라그나뢰크의 화재로 인해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오딘이라면 그 늙은 왕?


구하러 가기로 한 땅에,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 라.


그리고 여우는 그곳에 몇없던 생존자 중 하나라.


충격적이긴 하지만 나에게 모종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여성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약올리는 것처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여우는 실향민입니다.

당신네 왕이 자초하고 당신네 왕제王弟가 일으켰던 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몽땅 잃은 실향민.

레긴레이프는 아스가르드 왕의 권한 대행이죠?

아스가르드에 원한이 가득할 여우가, 왜 당신에게 접촉했을까요?

순수한 의도는 아닐 텐데요?"



아.


아아.


우리가 만났던 초반을 떠올렸다.


이제는 다소 성격이 누그러진 여우.


처음에 여우는 날 존중하면서도 어딘가 내게 불친절하였다.


나 외의 다른 발키리에게도 그랬다. 


그 시기엔 인간성이 그럴 뿐이라 여겼다.


지금은, 설명을 들은 지금은 같은 답을 낼 수 없었다.



"여우는 당신에게 마법소녀의 힘을 덧씌웠습니다.

당신을 적절히 이용하여, 거꾸로 아스가르드에 보복을 하기 위해서.

어쩌면 최후엔 아스가르드와 함께 당신도 없앨 계획이었을 지도 모르죠."



언젠가 벨 아저씨와 여우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도 네 흉내나 내봐야겠다. 앙갚음은 관두고.'


앙갚음이라고 온순하게 돌려서 표현하던 건 그런 뜻이었던 걸까.


여성은 신이 났는지 여우에게 제안하였다.



"자, 스바르트 알프님!

저희 거래를 하죠!

전 저분이 원수입니다.

당신도 저 분을 해할 속셈이셨죠?

손을 잡아요. 저희끼리 싸울 이유는 없잖아요?"



나는 믿기지 않았다. 도무지.



"진짜야? 여우야."



주둥이를 열지 못하게, 줄곧 여우를 누르고 있던 흰 고양이가 슬쩍 몸을 비켰다.


여우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두 분 모두 지금쯤 도착하셨겠지.


아니, 두 분의 요정을 합하면 '네 분'이라고 부루는 편이 옳을까.


심란했다.


꽃을 팔아도, 손님에게 차를 내어도 심란함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내가 도와야 하는 일인데.



-주름 생기겠다. 삐.



삐약이가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


누구 때문인데 그런 말을.


가게의 화분 물을 갈던 나는, 들은 체 만 체하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인가.



'우리 딸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렇게도 덧붙였다.



'아, 하면 안 되는 짓은 빼고.

아직 술 담배는 이른 거 알지?'



하고 싶은 일이라.


뭘까.


일단 현재로서는 내가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기분이라 조급함 밖에 없는데.


갑갑한 마음을 환기하고자 창을 열었다.


봄이니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빵 굽는 냄새였다.


우선은 저 빵을 먹고 싶었다.



"나갔다 올게."


-어디 가냐 삐?


"빵 사러. 아빠 깨면 말해줘."


-오늘 먹을 치는 있지 않냐 삐.


"가끔은 딱딱한 바게트 빵 말고 맛있는 크림빵도 먹고 싶은 게 소녀의 마음이라고."



메롱. 혀를 내밀었다.


서둘러 나왔더니 뒤에서 삐약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따라왔다.



-벨은 밤에나 깰 거다 삐.



나는 모습은 눈에 띄었다.


빵 넣으려고 가져온 가방에 들어가라 시켰다.



"크림빵만 담아드릴까요?"



견물생심이라고 했나.


정작 빵을 앞에 두자 나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아뇨. 베이글도 몇개 주세요."



히히, 여기다 연어 끼워 먹어야지.


아빠는 베이글만 보면 '버터도 없고, 설탕도 없고, 우유도 없는데 그걸 무슨 맛에 먹니'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정작 샌드위치해서 주면 제일 좋아하는 양반이 또 아빠다.


그래, 오늘 점심은 베이글 연어 샌드위치다.


그렇게 정해졌으면 시장을 돌아야 했다. 연어가 없었으니까.


시장엔 웬 일로 사람이 적었다.


평소에 할 일 없으면 시장에 모이시던 아주머니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감기라도 돌았나?


쉬는 가게도 많았다.


국수 가게, 옷 가게, 과일 가게....


연어 가게 주인들도 죄다 쉬고 있으면 직접 얼음 낚시로 하나 낚아야 하나 걱정했다.


다행히 괜스레 밖에서 떨 일은 없어보였다.


아냐 언니네 가게에 마침 싱싱한 연어가 있었다.



"얼굴이 어둡네. 걱정거리 있니?"



쓸데없이 예리한 게 이 언니의 흠이었다.



"아냐아냐. 아냐 언니가 잘못 본 거겠지. 아무 걱정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서도."



오늘은 잡담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연어를 받고 바로 일어섰다.



"벌써 가?"


"네. 피로해서요."



피로 따윈 쥐뿔도 없다.


십대 후반 꽃다운 시기.


바야흐로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연령대였다.


가게를 나가려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손님치곤 엉거주춤했다.


손에는 뭔갈 들고 있었다.



"아냐야. 너 있었구나.

아, 꽃집 처자도 있었네. 마침 잘됐다."



마을의 우체부, 샘 아저씨였다. 


샘 아저씨는 나와 아냐 언니에게 곱게 접은 종이를 한장씩 내밀었다.


언니가 종이를 펴며 물었다.



"이건 뭐에요?

택배 같진 않은데."


"편지 같지도 않고."



샘 아저씨가 말했다.



"그거 삐라야."



보통 배부하는 측이 스스로 삐라라고 부르기도 하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단지를 읽어보았다.


마법소녀에 관한 내용이 씌여있었다.



"5년 전 사태, 기억하지?"


"마법소녀 식인 사건이요?"


"그래그래, 그거."



마법소녀 식인 사건.


5년이 지난 지금도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되며, 마을의 마법소녀에 대한 인식을 망친 사건.


이름으로 보면 '마법소녀가 사람을 먹었다'는 말처럼 보이지만, 당시 마법소녀는 사람을 먹지 않았다.


사람의 영혼도 먹지 않았다.



"빗자루 마법소녀가 헬헤임의 사신들 먹은 건 말이죠?"


"그래."


"그 끔찍한 거 어휴, 전 회상하기도 싫어요."



아냐 언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당시 마법소녀가 먹은 것은 헬헤임, 저승의 심부름꾼이었다.


식인이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붙은 이름이었다.


물론 이또한 만만찮게 무거운 죄다.


우리 마을의 주민들은 대저, 성불시켜줄 사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다.


그런 와중에 사신을 먹었단 건 상당히 중죄였다.



"그 사건 이후로 얼마 안 가서 헬헤임이 저승사자 파견을 관두지 않았냐."


"그랬죠. 누구 말로는 그 사건 때문에 겁 먹어서 그랬다던데."


"그후로 다들 티는 안 내도 마법소녀를 두려워했잖냐.

이번에 가져온 게 그거다.

촌장 후보 B번이, 자기가 새 촌장이 되면 마법소녀를 색출해서 마을에서 쫓아내겠다고 하더구나."



그런 삐라였구나.


진실이라면 꽤나 암울한 삐라였다.


아냐 언니가 대꾸했다.



"근데 아저씨, 그렇게만 속단하기도 어렵잖아요.

마을에 마법소녀가 한 서너명 있던데.

그 사건을 일으킨 건 한명이었고."


"그건 그렇지.

이번 겨울에만 해도 얼음낚시하다가 얼음 깨져서 물에 빠졌단 사람, 마법소녀가 구해줬다더라."


"누가요? 누구를요?"


"야채 가게 칼린이 빠졌고, 구해줬다는 마법소녀는 앞치마를 입은 아이라던 걸."



나다.


칼린, 그 바보가 겨울이라고 안심하며 빙판에서 막춤을 추다 얼음이 깨진 건이었다.


얼음낚시로 와전됐구나.


아냐 언니가 지적했다.



"낚시를요? 칼린이?

푸훕. 샘 아저씨 뭘 모르시네요.

칼린이 낚시 같은 점잖은 취미생활을 할 턱이 있나요.

빙판에서 춤을 추다가 얼음이 깨진 거겠죠."


"생선이 먹고 싶었던 걸수도 있지."


"그랬으면 물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쳐서 잡았겠죠.

칼린은 그런 애에요."


"그야... 그렇지만서두."



쩝.


샘 아저씨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던 차였다.


가게 밖에서 비명이 울렸다.



"사람 살려! 곰이야!"


"곰?"



봄이라고 겨울잠이 깬 걸까.


숲에서 곰이 내려온 모양이었다.



"곰이 뭐가 두렵다고.

한두마리쯤은 때려잡기도 하고 해야지."



샘 아저씨가 피식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아냐 언니가 물었다.



"아저씨는 잡을 수 있어요?"


"맨손이래도 한 열명 있으면 가능하지."


"우리 마을 주민 전부 합쳐도 백명도 안 되거든요?"


"그러면 열번 조금 안 되게 잡겠군."


"이 아저씨 만날 입만 사셨어."



샘 아저씨는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어디 보자. 곰이란 게 어떤 녀석 말하는 걸까...."



샘 아저씨는 소리 나는 쪽을 유심히 보다가 "헉!"하며 후다닥 가게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냐 언니는 우스꽝스러운지, 샘 아저씨의 성대모사까지 하며 약을 올렸다.



"왜요? 막상 봤더니 곰이 두려워요?"


"그게 아니라 곰이 많아!"



그 말에 나도 언니도 빼곰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저씨 말대로였다.


열마리 전후 되었다.


괴수도, 뭣도 아닌 그냥 곰.


그러나 수가 열마리 전후.


오늘 시장엔 사람이 적었다. 큰일이었다.



"크오오옴!"



멀찍이에서 곰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다치고 아파하는 소리도 들렸다.


샘 아저씨가 나와 아냐 언니를 끌고 가게 뒷쪽으로 달아났다.


한발짝 뗄수록 사람들의 비명은 작아졌다.


야채가게 톰 아저씨의 굵직한 외마디 비명도, 막과자집 하비 오빠의 고통에 찬 비명도, 달걀집 쎄이 아주머니의 절규도.


이렇게나 쉽게. 이렇게나 허무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아냐. 이거 아냐."


"응? 나 불렀어?"



아냐 언니가 날 봤다.



"이건 아니야. 다들 저렇게... 저렇게 아파하는데."


"어쩌려고 그래. 세명이선 아무것도 못해."



샘 아저씨가 말했다.



"맞아, 우리 일반인이잖아."



일반인 아니다.


전투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딱 하나 쓸 수 있는 마법이 있었다.



"갈 거에요."


"그러다 다쳐!"


"아빠가 봤다면 가라고 했을 거에요."


"그야 그렇... 지만."



둘을 뿌리치고 시장쪽으로 냅다 달렸다.



-정말 갈 거냐 삐?



가방 안에 있던 삐약이였다.



"갈 거야. 도와줄 거 아니면 말리지도 마."


-왜 가는 거냐 삐? 이젠 전투도 제대로 수행 못하는 몸이잖냐 삐.


"왜 수행 못해! 텔레파시 마법, 아직 쓸 수 있잖아."


-마법 쓰는 걸 보이면 마법소녀였단 걸 들킬 텐데? 삐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벨이 딸하나는 예쁘게도 키웠네 삐.



삐약이는 삐이익 삐이익하고 웃었다.



-원동력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삐.

식 떠올려라 삐.


"원동력?"


-마법소녀의 마법에 필요한 2대 축. 잊었냐 삐?



무슨 뜬끔없는 마법 타령이야.


그보다 원동력은 또 뭐고.


마법에 필요한 축이면 원동력이 아니잖아.


마법의 축이면 마법식이랑... 아하.



-내가 막아둔 건 살의를 마법의 원동력으로 돌리는 행위 뿐이다 삐.

다른 것이면 문제 없다 삐.



1주가 한참 넘었으니 나름 오랜만이었다.


그리운 발음을 입에 담아보았다.



"변신."




*


크아악 시간이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