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홍현빈'입니다."


직원은 화면을 한 번 쳐다보고선, 내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화면을 쳐다보더니,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나선 허리를 조금 숙이고,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면서 마우스만 딸깍거리는 것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자, 나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말이죠, 아무리 검색해 봐도 학생 분 성함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까짓 이름 찾는 게 뭐가 이리 지체되는 건지 순간 짜증이 일었지만, 한 번 짐작해 보기로 했다.


홍현빈, 홍현빈. 태어날 때 부모님이 손수 지어주신 이름이다. 검을 현 자에 빛날 빈 자를 쓰는데, 뜻은 잘 모른다. 뜻이야 뭐 알아봤자 딱히 쓸 데도 없고, 사주를 딱히 믿는 편도 아니니, 더더욱. 그래도 일단 검색이 잘 안 된다니 곰곰히 생각은 해 보지만, 이게 실질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 지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름에 쓰는 한자 따위를 떠올리는 발상은 이 상황에서 정말 쓸모가 하나도 없는 게 아닌가.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사실은 기계 오류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취급하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다른 날에 다시 오거나 한 번만 봐 달라고 하고 적당히 들어가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17년 인생 동안 살면서 계속 써온 이름이 갑자기 바뀔 리가 있나.


'아차'


그제서야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면 혹시 '혼현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검색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이걸 까먹을 수가 있을까.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벌써 내 뒤에는 대여섯 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시면 돼요."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호다닥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종이 뭉치를 나누어 주는 학원 조교와, 맨 뒷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는 친구들이다.


"자료 받아가세요."


"끄엑…."


고작 책 몇 권 정도의 무게인데도, 팔이 후들거린다.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것의 두세 배 정도는 거뜬히 들 수 있었을 텐데. 


"현서야, 좀 도와줄까?"


내가 종이를 두 팔 가득 안고 비틀거리는 것을 마침내 친구 중에 한 명이 목격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조금 수월하게 교재를 옮길 수 있었다.


털썩.


"아, 땡큐땡큐. 고마워, 민호야."


"오늘 첫 수업이라 교재가 좀 많지? 나도 아까 옮기느라 고생 좀 했어."


"…첫 수업이라 그렇다기에는, 일반적인 학원보다 조금 많이, 많이 무거운 것 같은데."


"하하… 그럴 수 있지. 난 화장실 간다."


그렇게 교재를 다 옮기고 나서야 다른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 어떻게 된 게 내가 교재 무거워서 바들거리고 있는데 도와주는 놈이 한 명밖에 없냐?"


"오, 현빈 하이."


"미안한데, 지금 이 판 끝나려면 한참 남아서. 뭐 도와줄래야 도와줄 수가 없네."


정이라는 게 없는 더럽고 치사한 놈들이다. 나는 책가방에 교재를 쑤셔넣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에휴, 내가 말을 말지. 친구라는 걸 뒀다가 뭐하냐."


"야, 우리는 여자라고 도와주거나 더 잘 해주거나 그런 게 없어. 이런 게 진짜 친구 아니냐?"


"민호는 도와줬잖아, 새끼야."


"걔는 남자 여자 가릴 거 없이 잘 도와준다니까. 너 남자일 때 우리가 너 한 번이라도 도와준 적이 있었어?"


"이런, 씨발. 미친놈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다같이 낄낄대는 동안, 민호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현서야. 아니, 현민아. 아니 현서야. 아니, 그래서 그건 생각해 봤어?"


호칭 얘기다. 친구들한테는 편한대로 부르라고는 했지만, 썩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야, 갑자기 얻은 이름이 17년 동안 써오던 이름보다 익숙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개명한 이상 앞으로는 홍현서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기는 해야겠지만….


사실 옛날 이름대로 살아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옛날 이름을 쭉 사용하는 게 나에게 있어서도, 친구들에게 있어서도 편한 방법이긴 했으나, 나는 그저 내 이름이 불릴 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자 이름으로서는 '현빈'이라는 이름은 꽤 흔하지만, 여자 이름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법적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부모님의 설득에 이름마저 바꾸게 되었는데,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그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냥 계속 너네 편한 대로 불러. 진짜로 나는 두 개 다 별로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아."


의구심이 섞인 시선이 쏟아졌다. 그래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나의 이름이 무엇일까 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내게 가장 익숙한 이름이었던 이름이, 법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학교에 가서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내가 홍현민이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 상황 자체에 거부감이 들어 스스로 선택하지는 못하고, 결국에는 '편한 대로 불러라'같은 뻔한 이야기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날 이름을 바꾼 것이, 크나큰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다시 홍현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면, 분명 매우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고작 이름 따위에 과도하게 의미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홍현민이라는 이름도, 홍현서라는 이름도, 모두 몸에 맞지 않는 옷마냥 답답하고 불편하고 꽉 막히어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일은 내 이름이 뭔지 알 수 있을까. 그렇게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각종 잡스런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그대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