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소개를 듣고 정신이 멍해졌다.


프로젝트 스타, 대표이사, 마스코트. 그 단어들의 나열로 유추하건대, 분명 이 사람이 날 이렇게 만들어버린 장본인.


너무 당당히 정체를 밝히고는 찾아온 탓에, 함부로 원망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우선 문 하나 사이로 대치한 채 이야기하기는 껄끄러운 감이 있어 집 안으로 들여보내기는 했지만...


단순히 남아도는 컵에 대충 바닥에 놓아 둔 물을 따라주었을 뿐인데도 우아하게 차를 마시듯 홀짝이는 모습은, 작은 원룸에 불과한 이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낯선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경계없이 집에 들여도 좋았던 걸까? 키도 한 2m가 되어보일 만큼 거대한데. 단순한 신체능력으로는 기존의 나로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계속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도 재미있는 반응은 해 주기 어렵습니다."


무슨 눈이 뒤통수에도 달린 것인지, 내 시선을 정확히 캐치해냈다. 노려보는 거라기 보다는 단순히 의아함의 눈빛이긴 했지만.


결국 이대로면 이야기의 진전이 없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앉았다.


작디 작은 1인용 나무탁상 건너로 마주보는 상태. 상당히 근거리인데다 키도 굉장한 차이가 났기에, 고개를 치켜들어야 하는 것이 살짝 불편했다.


...친하지도 않은 남자의 그윽하게 내려보는 시선을 받는 것도 꽤나 쉽지 않았고.


"누구세요?"


"다짜고짜 그것부터 묻는 겁니까. 제가 준 명함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거 말고요! 뭐 하는 사람인지는 이해했는데, 제가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묻는 거예요!"


내가 받은 메일은 '프로젝트 스타'에 관한 제안. 그 내용 중 어디에도 내가 마법소녀가 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단순히 내가 마법소녀를 굉장히 좋아하니까. 그에 대한 정보도 해박해보여 날 프로젝트의 참여인원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 뿐.


함께 이상의 마법소녀를 키워보자는 말은, 내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흐음. 계약서에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습니까? 이상하군요. 분명 전자서명이 도착했다면 오류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요."


남자는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속은 것도 열받는데, 키가 멀대같이 큰 잘생긴 남자가 저러니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다.


뻔뻔하게 "흐음..." 거리다 같이 들고 온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든다.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는 화면을 내쪽으로 돌리는 남자.


확실히 내가 사인했던 것과 비슷한 모습의 전자서명 파일이었다.


"이런 화면, 본 적 없으십니까? 저는 제대로 전달하고 서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착오가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말이라도 못하면 그리 밉지도 않으련만. 참 열받게도 남자는 침착하며 논리적이었다.


그래도 남자가 내게 그럴듯한 말로 사기를 쳤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무언가 하나라도 꼬투리 잡히는 게 있으면 바로 물어뜯기 위해 시선을 화면으로 옮겼다.


분명 트릭이 있을 것이다. 계약서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불리한 조항을 적어 두었다던가.


선동과 여론몰이는 이래뵈도 특기. 법적으로 이길 수는 없어도 이미지에 타격을 주겠다 협박해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가능할 터.


기대를 품고서 눈에 힘을 빡 주었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첫 페이지부터 적혀있는 조항의 내용이 눈에 밟혔다.


"어... 원래 이런 계약서였었나...?"


너무나 당연한 듯 적혀있는 계약조건. 계약서의 내용엔 프로젝트 스타의 비전과 성장 목표, 사업자정보 등 해당 프로젝트를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그 아래로는 어째서 내가 필요한지와, 급여조건, 초상권 분배, 활동영역 등등 모든 게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두 줄. '계약이행 중, 을은 갑에 소속되며 마법소녀로 활동한다. 마법소녀의 직업 특성상 퇴직은 최소 3년 전에 고지해야 하며, 무단으로 직무를 유기할 경우 마법소녀의 영혼은 마스코트에게 귀속된다.'


살벌하면서도 어찌보면 당연한 조항. 좀 무단으로 쉰다고 영혼을 가져가 버린다는 게 너무해 보이기도 했으나, 엄연히 마법소녀는 준 공무원의 위치로 사람들의 목숨과 직결되기도 하는 문제니까.


결과적으로, 너무도 명확한 기재내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사, 사기에요! 저는 이런 조항들 본 기억이 없어요! 이런 걸 제가 못 봤을리가 없어요! 무효라고요!"


없긴 왜 없어!


내가 아무리 흥분한 상태였다 해도 저런 굵직한 내용마저 놓치는 바보는 아니다.


비록 월급을 전부 마법소녀에 꼴아박는 인생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전부 사기엔 돈이 모자라서 우선순위를 분석해 티어표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대출까지 손댈 뻔 해서 인생을 말아먹을 뻔 하기는 했지만???


마법소녀에 정신이 팔려 내 영혼까지 슬쩍 담보로 내놓을만큼 바보는 아니란 말이야!


"본 적이 없는 조항이란 말씀은?"


"말 그대로 없는 조항을 지어내서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걸 어떻게 믿는데요! 아니면 제 메일함이라도 까 봐요? 어! 저 이래뵈도 네임드거든요? 나락 한 번 보내줘?!"


"우선은 진정하시고요. 지금 열이 너무 올라 계십니다."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난, 난... 난 그냥 내가 마법소녀를 키우고 보좌하는 매니저 역할 비슷한 그런 거 맡는 줄 알고 사인했단 말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무심결에 반말을 뱉어 슬쩍 눈치를 봤으나, 여전히 미동도 없는 남자.


...홧김에 말을 놓기는 했는데, 막 뒤끝이 남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쟤 마스코트랬잖아. 아직은 마법소녀니까 반말해도 되는 거 아닐까? 당장 내가 강제로 마법소녀가 되게 생겼는데, 물불 가릴 처지도 아니고.


어쨌든 지금은 억울함을 푸는 게 먼저니까.


나는 남자와 함께 그대로 컴퓨터를 향해 걸어갔다. 대기화면을 풀어두니, 곧 드러나는 화면. 다행히 창을 닫지는 않았기에 변조될 수 없는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대로 적혀있군요."


"적혀...있네...?"


아까 보았던 화면과 완벽히 동일한 계약서의 내용. 무엇 하나 빠지거나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즉, 이 계약서는 처음부터 정직하게 쓰여져 있었다는 소리.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좌절했다.


내가, 내가... 그깟 몇 마디에 눈이 돌아가서 이렇게 친절하고 노골적인 계약내용을 놓쳤다고?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바보였던 모양. 마법소녀가 보증을 서 달라 하면 서 줄 정도의 호구새끼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나저나 의외로군요. 저는 지훈씨가 좀 더 나이가 있는 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에?"


"마법소녀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원래 모습의 변형입니다. 기본적인 인식 저해는 걸려 있어 신변의 보호는 되지만, 생김새 자체는 같으니까요."


"완전 다르게 생겼는데...?"


"물론 보정은 들어갑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직업인 만큼, 기존의 매력을 살려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죠."


그럴 듯한 설명이었으나,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완벽한 여자의 모습. 그것도 기존 키보다 30cm정도는 더 낮아진 상태였으니까.


나는 27년 인생을 살며, 여자였던 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군대 현역판정을 받았던 때를 제외하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었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혼란스러워 머리를 싸매고 있으니, 남자가 다가와 내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들었다. 그저 가만히... 그리고 깊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은, 꽤나 징그럽게 비쳤다.


"반짝거리는 눈과 전체적으로 푸른 색의 배열을 보면, 분명 지훈양은 순수하고 귀여운 착한 심성의 여자였겠죠."


"아니야! 나, 나는 애초에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리본과 레이스로 가득 찬 귀여운 드레스는 귀여움에 대한 욕망의 억압일 겁니다. 비율에 비해 스커트의 길이가 짧은 것도 여성스러움에 대한 동경일 테고요."


"아, 아으으..."


상당히 어지러울 정도의 귀여움을 쏟아내는 남자. 상냥한 말투와 다정한 얼굴이 더해져, 기이하게 가슴이 쿵쿵거리는 경험을 겪는다.


그 충격의 여파로 당장 토를 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리 거리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번이 반드시 처음은 아니겠지.


저 외모와 사탕발린 말로 여러 여자 인생 끝장냈을 법한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나를 여자로 오해하고도 끌어들이려 하는 상태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지훈양의 그 모습, 굉장히 귀여우니까요."


"이, 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끝까지 열받게 추파를 던지고는 날 마법소녀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하는 남자.


제대로 거부 의사를 보이자, 조금 뒤로 떨어졌다.


"그래도 정 못하시겠다면, 지금이라도 계약을 파기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저도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고, 나이도 상당히 어려보이시니까요."


"그럼 지금 당장..."


"아쉽습니다. 기껏 창단 멤버를 자처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선금을 준비했는데. 하긴, 500만원이 그리 큰 돈도 아니긴 하죠."


"어, 5...500만원이요?"


머리에 망치를 맞은 기분이다. 그냥 감사의 의미로 주는 선금이 500? 계약서에 적혀있던 월급보다 많은 돈을 그냥 준다니?


그 돈이면 이번에 기습적으로 개최하는 트윙클 단독 콜라보 굿즈들을 쓸어담아도 돈이 남는다.


컬러풀, 핑크, 스카이블루, 옐로 등등 모든 종류의 1/5 스케일 피규어 에디션을 구매해도 300이 남는 돈.


피눈물을 머금고 스킵해야만 했던 최애의 콜라보 굿즈를... 하나도 빠짐없이 수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태어나서 처음,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다.


"저, 저, 저, 저, 저...! 할게요! 마법소녀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제발 시켜주세요...!!"